사회이슈

[특별기고] '100년의 전쟁'

도깨비-1 2013. 1. 15. 08:39


[특별기고] '100년의 전쟁'

 

대한민국 건국 후 65년의 역사를
'정의 패배'로 보는 '증오 역사관'
'보람 있었다' 보는 '긍지 역사관'
史實은 '긍지' 절대 유리하지만
픽션 바탕한 '증오' 훨씬 집요해
인식 못 하면 문화권력 못 찾아


  류근일 /언론인 조선일보 2013. 01. 15.


 

   '민족문제연구소'라는 단체가 대선(大選)을 전후해 '100년의 전쟁'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내놓았다. 이승만과 박정희를 '순 악당(惡黨)'으로 그린 동영상이다. 이게 인터넷 공개 한 달 사이 클릭 수 무려 193만을 기록했다. 댓글은 말한다. "이승만씨 나쁜 사람 맞습니다" "그걸(경제) 일본에 헌납해서 경제 식민지 만들려고 했던 것도 박정희라고 나오고…."
   한마디로 반일(反日)과 친일(親日), 반미(反美)와 친미(親美), 민족과 반(反)민족 사이의 100년에 걸친 상쟁(相爭)의 역사에서 이승만과 박정희는 후자(後者)의 흐름을 대표한 두 '원흉'이라는 식이다. 아무런 백신도 없이 이런 동영상에 노출된 청소년들이 대한민국 65년사에 대해 어떤 악감정을 가질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이건 무얼 말하는가? '대한민국은 태어나선 안 될 나라…'라고 하는 오도(誤導)가 여전히 한국 정치의 가장 기층(基層)적인 싸움을 재생산하고 있다는 뜻이다. 대한민국이 아무리 잘나갔어도 '그래도 그것은 친일파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만든…'이라는 적의(敵意)가 도사리는 한 그리고 그 흥행이 그렇듯 대박을 터뜨리고 있다면 그 싸움은 그렇게 쉽사리 사그라질 수 없을 것이다.
   지난 대통령 선거 때도 표면상으로는 민생, 복지, 경제 민주화가 쟁점으로 떠올랐지만, 사실은 그런 역사관의 싸움이 끈질기게 저류(底流)를 이루고 있었다. 대한민국 65년사를 "보람 있었다"고 하는 '긍지(矜持)의 역사관'과 그것을 "정의가 패배한…"이라고 매도하는 '증오(憎惡)의 역사관' 사이의 싸움 말이다.
   '증오의 역사관'에는 "이승만·박정희, 너희만 아니었다면…" 하는 절치부심(切齒腐心)이 깔려 있다. "너희가 어쩌다가 경제 발전은 해가지고…" 하는 인지부조화(認知不調和)도 읽힌다. 반면에 '긍지의 역사관'에는 "대한민국 성공사(成功史)에는 이승만·박정희의 리더십 더하기 나의 피와 땀과 눈물이 녹아 있다"는 자부심이 깔려 있다.
   객관적 사실과 진실은 후자에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1974년을 고비로 한반도의 '삶의 질(質)' 경쟁은 시장과 개방 우세로 접어들었다. '긍지의 역사관'이 발효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1987년까지는 '증오의 역사관'과 종속(從屬)이론이 시대의 트렌드였다. '남영동'과 '빙고 하우스'가 낸 반사 효과였다. 그러다가 민주화, 88 올림픽, 북(北)의 300만 아사(餓死) 사태를 거치면서 그것이 설 땅은 급속히 쪼그라들었다.
   현실 설명력을 그렇게 잃어갔어도 '증오의 역사관'은 그러나 수그러들 기색이 아니다. '100년의 전쟁'과 그 열성 팬들의 반응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사람들의 머릿속과 가슴속을 누가 선점하느냐 하는 문화 전쟁에서 '증오의 역사관'이 훨씬 더 집요하고 기민했던 결과다.
   따지고 보면 '긍지의 역사관'이 꿀릴 이유는 없다. '긍지의 역사관'은 세계가 인정하는 '긍지의 근거'를 가졌다. 그러나 '증오의 역사관'은 잘된 것까지 잘못됐다고 우기는 픽션을 썼다. 이 차이가 '긍지의 역사관'이 지닌 정당성의 힘이다. 지난 대선에서 제헌(制憲) 세대, 6·25 세대, 산업화 세대, 민주화 운동 초심(初心)의 연합 세(勢)가 투표 당일 막판 끗발을 올릴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까닭이었을 것이다.
   '이들의 100년 전쟁'은 '그들의 100년 전쟁'과 다르다. 그것은 독립협회 이래의 자유·평등·박애 그리고 문명개화 이상(理想)의 우여곡절이었다. 대한민국 건국은 그 이상의 초기적 결실이었다. 6·25 때의 다부동전투 지휘관은 그 결실을 지켜낸 영웅이지 '민족 반역자'가 아니다. 산업화는 파독(派獨) 광부와 간호사들의 감격의 눈물을 쏟게 한 고심참담한 역작이었다. 그리고 비록 '지하실'에 끌려갔어도 민주화 운동의 대표 투사에겐 그것은 요덕수용소 변호인들 따위에겐 결코 빼앗길 수 없는 깃발이었다.
   문제는 이명박 시대에 이 '긍지의 역사관'이 '증오의 역사관'으로부터 문화 권력을 당겨오는 데는 역부족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그런 데엔 인식이 아예 없었다. 박근혜 당선인은 있을까? 없으면 그가 말한 '시대 교체'도 '청와대 교체'로 그칠 것이다. '100년의 전쟁'이 그걸 말해준다.  ▣

 

 


[조선데스크] 정치 영화의 품격


   이하원 정치부 차장/ 조선일보 2013. 01. 15.

 

   영화 '레 미제라블'이 끝날 무렵 아내는 울고 있었다. 극장 곳곳에서 눈물을 닦으며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시작할 때만 해도 뒤로 젖혀져 있던 기자의 몸은 어느새 곧추세워져 있었다. '혁명 가요'인 주제가 '원 데이 모어(One Day More)'가 울려 퍼질 땐 손뼉을 칠 뻔했다. 2시간30분짜리 뮤지컬 영화가 400만명이 넘는 한국 관객으로부터 격찬을 받은 것은 기록적인 일이다.
   법과 원칙을 중시하는 자베르 경감과 빵 한 조각을 훔쳤다는 이유로 19년간 수감됐던 장발장. 두 사람의 대립과 갈등은 보수와 진보의 대결을 연상시켰다. 19세기 초 프랑스 민중들의 고단한 삶이 스크린을 지나가는 동안 두어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국민이 굶주리고 힘들어할 때 국가와 지도자는 무엇을 해야 하나. 파리 시민은 왜 젊은 혁명군이 간절히 도움을 바랄 때 문을 걸어 잠갔던 걸까.
   영화를 보며 기자와 비슷한 상념에 잠겼던 이들은 SNS에 자신들의 느낌을 토해내고 있다. 18대 대선에서 야당 후보가 아닌 자신들이 패배했다고 느낀 이들은 '힐링(healing·치유)'의 느낌을 주로 쓰고 있다. 자신을 보수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영화에서 받은 감동을 나누고 있다. 1980년대 학생운동을 하다가 수감되기도 했던 한 고위 공무원은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프랑스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라는 노명식 교수의 책을 다시 찾아 읽으려고 합니다. 순수한 열정이 현실의 실질적 개선으로 이뤄지기까지 얼마나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도 다시…."
   이 영화가 많은 사람을 울리며 성공한 배경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대중영화가 지식인층의 호평을 이끌어 낸 이유로는 이 영화가 가진 품격(品格)이 첫손가락에 꼽히지 않을까. '레 미제라블'은 혁명의 필요성을 말하면서도 거친 언어를 앞세우지 않았다. 가진 자들의 이기심을 비판하면서도 인간애를 잃지 않았다. 생각의 지향점이 다른 이들이 모두 이 영화에 감동하는 것은 수준 높은 예술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 '레 미제라블'의 성공은 18대 대선 직전에 정치성을 전면에 드러냈다가 역효과를 일으킨 우리나라 작품들과 비교된다. 지난해 11월엔 새누리당의 전신(前身)인 민주정의당 정권하에서 자행된 고문(拷問)을 다룬 영화가 개봉했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은 "대선에 영향을 미쳤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관객 30만명을 넘기는 데 그쳤다. 잔혹한 고문 장면만 집중적으로 보여준 탓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대선 막판엔 민중 화가의 '박근혜 출산' 그림이 논란이 됐다. 그의 다른 그림은 여성의 생식기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머리를 한 뱀이 나오는 모습도 생생히 묘사했다.
   정치성이 두드러진 작품들은 의도했던 것과는 다른 결과를 낳았다. 불편함과 불안감을 느낀 중도층이 오른쪽을 향하게 했다. 보수 세력이 소리 없이 결집하는 계기도 만들어줬다.
   현실을 바꾸려는 정치 영화와 정치 미술은 영화 '레 미제라블'을 보며 전략을 수정할 때가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