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이야기

나지막하지만 돋보인다… 건물도, 건축 철학도

도깨비-1 2013. 3. 13. 17:35


나지막하지만 돋보인다… 건물도, 건축 철학도

[건축 거장들 나의 대표작] [끝]

 김종성 '경주 선재미술관'


- 정확한 비례가 빚은 우아함
직사각형과 돔 결합한 외관
내부 철골 기둥은 9.6m 간격


- '20세기 건축가'의 꿈
"이 건물, 아직도 멀쩡하네"
수십 년 뒤 가장 듣고 싶어


 

 경주 박세미 기자/ 조선일보 2013. 03. 12.
 

   천년 고도(古都) 경주엔 우아하고 깔끔한 현대미술관이 있다. 고즈넉한 보문관광단지 안에 나지막이 앉아있는 경주 선재미술관.
   건축가 김종성(78·서울건축 명예고문)은 선재미술관을 자신의 대표작이라고 했다. 김종성은 서울 서린동 SK사옥, 남산·경주 힐튼호텔, 서울대 박물관, 올림픽 역도경기장, 서울 아트선재센터 등을 설계한 한국 1세대 건축가이다. 최근 만난 그는 "건축의 주인공은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선재미술관은 그런 나의 건축관에 가장 충실한 작품"이라고 했다.
   그가 선재미술관을 대표작으로 꼽은 건 사실 의외의 일. '글라스 타워(초고층 유리빌딩)의 창시자'로 불리는 독일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를 사사(師事)한 그는 대형 오피스 빌딩과 호텔 설계로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오피스 빌딩은 공간적 융통성보다는 최적의 구조와 경제적 효율성을 따져 설계한다. 그런 면에서 건축적 감동이 덜한 아쉬움이 있다"고 했다.
   단순한 직사각형 건물(전시관)과 둥근 돔을 낀 직사각형 건물(업무동)을 살포시 포갠 선재미술관의 첫인상은 고전적이다. 그리 넓지 않은 땅(2971㎡)에 수평으로 길고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다. 마치 대리석처럼 반짝이는 외관은 분홍빛의 경북 상주돌과 진녹색의 경남 후동돌 두 가지로 마감한 것. 각각 전시관과 업무동을 감싸고 있다. "네모·동그라미의 단순한 외관이 주는 단조로움을 희석하고 조형적 아름다움을 주기 위한 장치죠."
   내부는 '빛과 기둥, 비율'이란 주제에 충실하다. 전시관 1층 일부와 2층 전체 지붕에 올려진 8개의 사분원(四分圓)은 우아함을 고조시키는 동시에 건물 내부에 환한 자연광을 던져주는 요소. 직사광선이 미술품의 색을 바래게 하는 일을 막기 위해 사분원의 남쪽 둥근 면은 납으로 마감했고, 간접적인 빛을 받는 북쪽 직선면은 유리로 마감했다.
   참나무와 돌, 금속 등으로 마무리한 내부는 담백하다. 건물 내부에는 9.6m 간격으로 철골 기둥을 세웠다. 사실 작품 설치를 우선하는 미술관 설계에서 기둥을 세우는 건 흔치 않은 일. 그러나 건축가는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올리는 건 한국 전통 건축의 기본이다. 더구나 경주라면 더욱 그래야 한다"고 했다.
   자칫 평범한 건물처럼 보이지만 우아한 인상을 잃지 않는 건 건물이 정확한 비례에 의해 설계됐기 때문일 것이다. 건축가는 근대 건축의 유산인 수학적인 기본 평면 단위(7.2m×7.2m)를 철저히 신봉하되, 이를 1.2m의 배수로 해석해 공간 내부에 다양한 크기로 적용했다. 덕분에 선재미술관은 크고 작은 평면이 정확한 배수와 비율로 쪼개지고 더해진 안정적인 공간이 됐다.
   고희(古稀·70세)를 기점으로 은퇴한 그는 현재 미국 뉴욕에 머물고 있다. 그는 자신을 '20세기 건축가'로 명명하면서도 이런 말을 잊지 않았다. "건축이 눈부시게 변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 본질은 그리 빨리 변하지 않아요. 어떤 건물은 멋있게 보이지만 10년만 지나면 주름살이 패고, 어떤 건물은 평범한 것 같지만 50년이 지나도 소나무처럼 아름답지요. 먼 훗날 사람들이 내 건물을 보고 '한물갔다'고 할 수는 있어요. 그러나 나는 수십 년 후에도 '어, 이 건물 아직도 멀쩡하네'란 소리를 더 듣는 건축가로 남고 싶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