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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걸인청(乞人廳)

도깨비-1 2012. 12. 10. 14:09
걸인청(乞人廳)

전남 순천시 영동에는 팔마비(八馬碑)라는 고려시대 비석이 있다.

전남 유형문화재 제76호다.

『고려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하는 비석에 얽힌 얘기는 이렇다.

고려 충렬왕 때 이곳을 다스리던 승평부사(昇平府使) 최석(崔碩)이 선정을 베풀다가 떠나게 되자 관례대로 백성들이 말 7마리를 선물했다.

최석은 폐습(弊習)이라며 도중에 낳은 망아지까지 합해 말 여덟 필을 되돌려 보냈다.

이를 계기로 헌마(獻馬) 폐습이 없어지게 되자 백성들이 그를 칭송하며 돈을 모아 송덕비를 세우고 팔마비라고 불렀다.

지방 수령의 선정과 공덕을 기리는 송덕비의 효시(嚆矢)다.

 

 

조선시대엔 팔도 골골에 송덕비가 많았다.

고을 수령이 갈리면 으레 세워지곤 했다.

부정한 수령이 자신의 청렴을 위장하려고 백성들을 시켜 억지로 세우는 경우도 적잖았다.

수탈을 일삼던 수령이 덕을 기린다는 비까지 세웠으니

백성들에겐 송덕비가 원한의 표적으로 여겨졌을 법하다.

재를 뿌리거나 똥칠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탐관오리의 송덕비로는 과천 현감의 것이 유명하다.

과천 현감이 이임하는 날 송덕비를 제막했더니

비면(碑面)에 ‘금일송차도(今日送此盜·오늘 이 도둑을 보낸다)’라고 쓰여 있더란다.

그걸 본 현감이 옆에 덧붙인 게 걸작이다.

‘명일래타도(明日來他盜·내일이면 또 다른 도둑이 오리니),

차도래부진(此盜來不盡·이 도둑은 끊임없이 온다)’.

 

 

민초(民草)들이 정성을 모아 지방관의 공덕을 기린 진정한 송덕비가 없었던 건 아니다.

『토정비결(土亭秘訣)』을 지은 토정 이지함은 선조 때 아산 현감을 지냈다.

토정이 가장 먼저 만든 게 걸인청(乞人廳)이다.

거지들을 수용해 일을 주고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왔다.

헐벗은 백성을 따뜻이 보살피는 게 수령의 본분이요, 책무라는 신념에서다.

백성들이 그를 기리는 송덕비를 세웠음은 물론이다.

충남 아산시 영인면사무소 앞뜰에 있는 영모비(永慕碑)가 그것이다.

 

[출처] 김남중 중앙일보 논설위원   

출처 : 역학동
글쓴이 : 송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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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인청으로 빈민을 구제하다 ― 이지함(李之菡)

 

이지함(중종 12년~선조 11년)은 예언가로 천문, 지리로부터 음양, 술서(術書)에 이르기까지 모두 도통한 한학자요, 기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한의학의 태두이다시피 소문난 명의이기도 했으며 수학에도 남이 따를 수 없는 비상한 재주를 가진 사람이었다. 이지함은 판관의 아들로 화담 서경덕의 문하에서 글을 읽어 경사자전(經史子傳)에 통달한 뒤, 쇠로 만든 갓을 안고 다니다가 배가 고프면 아무 데서나 그 갓을 벗어서 밥을 끓여 먹으며 전국 산천을 주유하던 인물이었다. 이처럼 천성이 활달하고 기발했던 이지함은 흙으로 단을 쌓아 올리고 그 위를 방바닥처럼 평평하게 고른 뒤 네 기둥을 세우고, 이엉을 덮어 살았기 때문에 ‘토정선생’이라고 불렸다.


이지함은 평생을 구름처럼 떠돌아다녔는데, 다 늙은 56세가 되어서야 6품 벼슬을 제수 받아 강원도 포천현감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1년 만에 사직하고 돌아왔다가 그가 죽던 61세에 충청도 아산현감으로 두 번째 벼슬길에 올랐었다. 왜 환갑을 전후한 나이까지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가 다 늦어서야 겨우 6품 벼슬을 얻어 나갔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지함은 특유의 기지와 해박한 지식으로 백성들을 가난에서 구제했다. 그가 아산현감으로 부임했을 때였다. 부임 초부터 선정을 베푼 이지함은 거의 쌀밥은 먹지 않고 가을에도 보리밥을 먹으면서 관곡을 아끼는 모범을 보였다. 이지함이야 열흘을 굶어도 배고픈 줄을 모르는 기인이라지만, 그 당시 한 고을의 원님이 보리밥을 먹고 방귀를 뀌어 가지고서야 위엄을 갖출 수 없는 것이어서 원님은 쌀밥에 고기반찬을 한 끼라도 걸러서는 안 되는 것이 관가의 풍습이었다.


그런데 지난해 흉년이 들었던지 그해 봄에 ‘모두먹기 패’가 메뚜기 떼처럼 온양고을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모두먹기 패’라는 것은 한 고을에 흉년이 들면 굶는 백성들이 아직 밥을 먹고 있는 집에 몰려가 함께 퍼먹어 버리고, 양식이 떨어진 그 집 식구들까지 같이 거지가 되어 이웃 고을로 몰려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라의 위정자들은 어디서 ‘모두먹기 패’가 나왔다 하면 전염병이 난 것처럼 무섭게 여기고 쇠와 구리를 많이 가져다가 엽전을 만들어 풀거나 풍년 든 고장의 곡식을 가져다가 흉년이 든 고장에 풀어 먹이든지 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지함은 모두먹기 패가 온양고을로 몰려들자 곧 걸인청(乞人廳)이라는 집을 짓도록 하고 모두먹기 패를 모두 잡아다가 그곳에 수용했다. 그리고 날마다 수십 수백 짐씩의 지푸라기를 가져다가 걸인들에게 짚신을 삼도록 일렀다. 그러나 원체 게으른 습성이 몸에 밴 그들은 온종일 가야 미투리 한 짝이나 삼는 둥 마는 둥 하며 주는 밥만 배불리 먹고 잠만 자려고 했다. 이지함은 그런 자들은 방망이로 다스리도록 하고 하루에 짚신 열 켤레씩을 삼아내도록 명했다. 도망치는 자도 있었지만 남은 자들은 매일 짚신 열 켤레씩을 삼아 쌀 한 말씩을 거뜬히 벌게 되니 모두 의식이 풍족하게 되었다. 이지함은 이처럼 남이 생각하지 못할 기행과 기지를 발휘하여 백성들을 가난에서 구해냈지만 정작 자신은 평생을 가난에 찌들어 살다가 세상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