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 우군도통사로 요동정벌을 위해 북진하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한 뒤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 세력과 손을 잡고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1392년 공양왕을 양위시키면서 스스로 조선 왕조의 태조가 되었다. 그는 도읍을 한양으로 옮긴 뒤 도성을 쌓고 도로와 관청, 시장, 학교 등을 건설하며 새 왕조의 기틀을 다졌다.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통하여 왕위에 오른 3대 왕 태종은 사병제도를 혁파하고 의정부(議政府)와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를 설치하는 등 관제개혁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는데 힘썼다. 의금부를 설치하여 법사제도를 정비하였으며, 사간원을 독립시켜 대신들을 견제하기도 했다. 또한 억불숭유 정책을 강화하여 전국의 사찰을 정리하였으며 호패법을 통해 인구를 정확하게 파악하였고, 북방의 여진족을 물리쳐 국경을 튼튼히 하기도 했다.
국가의 기틀을 안팎으로 다진 태종대의 노력으로 4대 왕 세종은 젊은 학자들을 등용하여 유교정치를 구현할 수 있었다. 세종은 정책 연구 기관인 집현전을 두어 한글을 창제하고, 측우기와 달력을 제작하고 아악을 정리하는 등 조선의 독립적이면서도 독창적인 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세종 시대에는 잘 알려진 황희나 맹사성과 같은 훌륭한 재상을 등용하여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었으며, 백성을 위한 민본정치가 꽃을 피웠다. 국방에 있어서도 김종서의 4군 6진 개척으로 인해 국토가 확장되는 등 다방면에 있어 훌륭한 치적을 쌓았다. 이후 20년간 세자로서 세종을 보필했던 문종이 일찍 사망하고 뒤이어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7대 왕 세조는 계유정난을 통해 왕권을 장악했다. 세조는 의정부의 정책결정권을 폐지하여 재상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과전법을 폐하고 직전법을 실시하고 중앙군 제도를 개편하는 등 중앙집권체제 강화에 힘썼다.
9대 왕 성종은 세종과 세조의 치적을 기반 삼아 문물제도의 정비를 완비함과 동시에 경국대전을 편찬하여 통치의 기본 이념과 방향을 법제화하였다. 또한 세종 때의 집현전에 해당하는 홍문관을 설치하고, 사림파를 등용하여 훈구파를 견제하기도 했다. 이후 즉위한 10대 왕 연산군은 두 차례의 사화를 일으키고 폭정을 일삼다 중종반정으로 폐왕이 되었다. 중종과 인종, 명종을 거쳐 즉위한 14대 왕 선조 때에는 당파싸움의 혼란을 겪는 동시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발발로 어려움을 겪었다. 선조 임금이 의주까지 피난하는 등 수세에 몰렸었으나,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과 이순신의 뛰어난 활약으로 일본을 물리친 조선은 15대 광해군에 이르러 전후 복구사업에 힘썼다.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쳤던 광해군이었지만 인조반정으로 유배되었고, 16대 임금 인조는 병자호란으로 인해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가 청에 굴복하고 말았다.
송시열과 송준길 등 대학자들이 연이어 배출되었지만 당파싸움은 더욱 심해져 붕당 간의 세력 균형이 무너지고 왕권도 불안해졌다. 이에 19대 왕 숙종은 국왕이 정치무대의 중심에 서서 붕당 간의 세력 균형을 조절하기 위한 탕평책을 펴는 한편 대동법을 전국에 실시하여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혼란한 민심을 수습하였다. 이어 21대 영조 때에도 탕평책을 시행하여 붕당의 폐단을 완화하는 한편 민생안정과 산업진흥을 위한 개혁정책을 시행하였다. 영조는 속대전 등을 편찬해 법치체제를 재정비함과 동시에 농업정책과 수취제도의 개선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균역법을 시행하고 청계천을 준설하였으며, 사치풍조를 금지하는 여러 조치를 내리는 등 재위 기간 동안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이어 즉위한 22대 왕 정조는 규장각을 통해 왕권을 뒷받침할 인재를 육성하는 한편 숙종과 영종의 탕평책을 이어 받아 더욱 적극적으로 펼쳐나갔다. 그는 100회 이상의 궁성 밖 행차를 통해 백성들의 삶을 직접 살펴 억울한 일을 왕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중ㆍ하급 관리 중에서도 유능한 인사를 직접 선발하여 국정운영을 맡겼다.
그러나 정조 사후 60여 년에 걸쳐 왕의 외척 세력이 권력을 행사하는 세도정치가 전개되면서 각종 비리와 조세수탈이 사회의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대내적으로는 세도정치에 저항하는 민중 세력이 급격히 늘어나고,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 열강세력의 문호개방 압력이 거세지는 가운데 흥선대원군은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한편 외국과의 통상수교 거부 정책을 확고히 하였다. 26대 왕 고종은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친정하게 되면서 개항을 통해 문호를 개방하였다. 청과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세력다툼 속에서 고종은 일련의 개화정책을 추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 과정에서 위정척사파의 반대와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을 겪으며 조선의 국운은 급격히 쇠약해져갔다. 1905년 을사조약에 체결되면서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긴 이후, 1910년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1907년 즉위한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은 재위 3년 만에 나라를 빼앗기는 비운을 맞이하며 519년 동안 지속되어왔던 조선왕조의 종말을 맞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