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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성철스님(1912~93) 탄생 100년, 그 자취를 찾아 <상>

도깨비-1 2012. 12. 10.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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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1912~93) 탄생 100년, 그 자취를 찾아 <상>

 

조계사 인근 다방 레지도 엽차 내놓으며 읊조렸다

산은 산, 물은 물이지요

 

 

성철 스님 열반 후 백련암 내에 들어선 법당인 고심원(古心院) 안에 모셔진 스님의 좌상. 고즈넉한 산사에서 스님은 대자유, 해탈에 이르는 길을 찾고 또 찾았다. [안성식 기자]

 

25세 이영주가 머리 깎고 불교와 만난 곳, 해인사 퇴설당 들어서자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걷거나 머물거나 말할 때나 침묵할 때 항상 화두를 염두에 두라 스님의 죽비가 잔설이 되어 내리치고 있었다

 

 

다음 달 11일은 퇴옹(退翁) 성철(性徹·1912∼93) 스님이 태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스님은 20세 한국 불교의 아이콘이었다. 치열한 수행, 소탈한 생활로 불교계는 물론 뭇 대중에게 깊은 영향을 끼친 큰 어른이었다. 스님의 탄생 100년을 기리는 다양한 행사도 잇따를 예정이다. 성철 스님은 지금 우리에게 무슨 말을 던지고 있을까. 그 뜻을 가늠하기 위해 스님의 주요 행적지 세 곳을 찾아간다.

지난 8일 오전 8시50분. 경남 합천 해인사 일주문에 도착했다. 젊은 스님 일덕(日德)이 기자 일행을 반갑게

맞았다.

 

‘歷千劫而不古(역천겁이불고), 亘萬歲而長今(긍만세이장금)’.

 

일주문 양쪽 기둥의 주련(柱聯·기둥에 세로로 써 내린 글귀)이 눈길을 붙든다.

‘천겁의 긴 세월이 지나도 옛 되지 않고, 만세를 뻗쳐 항상 지금이다’.

영원히 변치 않을 불법, 끝내 사람들에게 기억될 성철의 구도 정신을 상징하는 듯했다.

9시30분 해인사 방장 시절 스님의 거처였던 퇴설당(堆雪堂)에 들었다.

‘사시좌선(四時坐禪)’.

오래된 편액(扁額)이 마당으로 통하는 문 위에 걸려 있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動靜). 걷거나 머무르거나, 말할 때나 침묵할 때나 항상 화두를 염두에 두라고 했던 스님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하는 구절이다.

살아서 당대 최고의 선승(禪僧)으로 존경받았고, 죽어서는 한국 불교사에 빛나는 큰스님 반열에 오른 성철(속명 이영주) 스님. 갈수록 승려가 왜소해지고 산중의 청정 도량마저 혼탁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요즘, 생전 스님이 보여줬던 품은 여전히 넉넉하고 깊다. 종교·승속(僧俗)을 떠나 수행생활의 귀감이 됐던 스님의 치열했던 정진 이야기는 아직도 흥미진진하다.



 


 

대표적인 게 8년 장좌불와(長坐不臥), 10년 동구불출(洞口不出)이다.

8년 동안 눕지 않고 앉아서 자며 참선하고, 무려 10년 동안 절 문밖 발길을 끊고 불교 공부에 몰두했다는 ‘전설적인’ 얘기다. 스님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가혹한 계율(戒律)을 스스로에게 부과한 뒤 이를 훌쩍 뛰어넘었다.

1993년 스님의 열반은 그 자신을 ‘살아 있는 부처’로 봉인하는 일종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었다. 그해 11월 10일,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치러진 스님의 다비식에는 30만 명이 몰린 것으로 전해진다. 70년대 초반부터 스님을 모신 원택(圓澤) 스님은 “해인사 밖 30리부터 길이 막혔다”고 회고한다.

해인사를 찾은 건 이 절과 부속 암자인 백련암이 스님의 출가 도량이자 열반 도량이기 때문이다. 스님은 25세의 나이에 이곳에서 머리를 깎았고, 정확히 57년 뒤 열반에 들었다. 해인사와 백련암은 자연인 이영주(李英柱)가 불교와 운명적으로 만난, 시작과 끝이다.

퇴설당 마당에는 전날 내린 잔설이 쌓여 있었다. 말 그대로 눈 쌓인 집이다. 바로 옆에 법보종찰(法寶宗刹)이라는 해인사의 별칭이 유래한 팔만대장경을 보관한 장경판전이 있다.

스님은 “맑은 기운이 흘러나온다”며 판전 주변을 즐겨 걸었다고 한다. 원택 스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열반에 든 곳도 퇴설당이다.

‘일생 동안 사람들을 속인 죄 수미산을 지나친다’는 내용의 열반송도 여기서 공개됐다.

스님은 81년 1월 해인사에서 조계종 7대 종정에 추대됐다. 당시 밝힌 종정 수락 법어(法語)는 그를 일약 ‘전국구 스타’로 만들었다. 법어는 ‘원각(圓覺)이 보조(普照)하니 적(寂)과 멸(滅)이 둘이 아니라’라는 알쏭달쏭한 글귀로 시작해 회심의 구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山是山 水是水)’로 끝난다.

대중은 맹물 같은 ‘산은 산, 물은 물’에 열광했다. 당시 스님들이 서울 조계사 근처 다방을 찾으면 레지(여종업원)들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에요”라며 보리차를 가져다 줬을 정도였다고 한다. 60년대 중반 스님과 인연을 맺은 목정배 동국대 명예교수의 증언이다.

퇴설당을 뒤로하고 백련암으로 향했다. 점심 무렵 암자에 도착했다. 과거에는 해인사에서 산길로 30분 거리였지만 지금은 암자 턱밑까지 포장이 돼 있다. 암자는 텅 비어 있었다. 동안거가 끝나자 스님들이 대부분 만행(萬行)을 떠나서다. 대신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기도를 하러 온 신자 몇몇이 암자를 지키고 있었다.

신자 가운데 서울에서 패션 관련 일을 하는 윤희진(38)씨가 있었다. 그는 일주일 휴가를 받아 백련암에서 매일 3000배를 올리고 있었다. “게으름 피우면 새벽 3시에 시작한 3000배가 오후 8시에 끝난다”고 했다.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는 것일까. 윤씨는 “나만을 위해 기도할 때는 채워지지 않은 공허함이 있었는데 백련암에서 주변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한 이후로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했다.

윤씨는 인터넷 카페 ‘3000배’의 회원이다. 성철 스님의 정신을 기리며 백련암을 찾아 기도하는 모임이다. 백련암 일덕 스님은 “‘3000배’ 같은 인터넷 모임이 3개 더 있다. 덕분에 주말마다 60∼80명의 신자가 북적거린다”고 했다.

스님은 퇴옹이라는 법호(法號)에 걸맞게 평생 뒷전에 물러나 불교계의 시빗거리와 담을 쌓고 살았다. 간간이 세상을 향해 매서운 죽비를 내리쳤을 뿐이다. 이런 스님의 행적은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 즉 위로는 깨우침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위한다는 대승불교의 가르침과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 것일까. 평일 오후 백련암에서 남을 위해 기도하는 불자들을 보며 빈부·이념에 따라 갈기갈기 갈라진 우리 사회를 꿰매는 실마리를 보는 듯했다.

“우리는 본래의 평화의 꽃이 만발한 크나큰 낙원에서 살고 있습니다. 시비선악의 양쪽을 버립시다. 여기에서 우리는 영원한 휴전을 하고 절대적 평화의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성철 스님의 법어 ‘중도(中道)가 부처님’에서)

내달 성철 스님 특별전 열려
수행 24곳 순례 프로그램도


성철 스님 의 수행 도량 24곳을 둘러보는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조계종 불교인재원(이사장 엄상호)과 백련불교문화재단(이사장 원택 스님)이 함께 준비했다. 다음 달 31일 스님이 태어난 경남 산청군 생가 터 옆에 건립된 겁외사부터 2014년 8월 마지막 방문지인 해인사까지 매달 한 차례씩 순례할 예정이다. ‘100주년 다례제’ ‘성철 스님 특별전’ 등도 다음 달 열린다. 순례 문의 1661-1108.
/ 중앙

 

 

 

 

[만물상] 성철 스님 탄생 100년

 

20세기 가톨릭 사상가로 꼽히는 토머스 머튼은 신부(神父)였지만 선(禪)불교에 깊이 빠져 '선과 맹금(猛禽)'이란 책도 남겼다. "내가 선에 입문했을 때 산은 더이상 산이 아니고, 강은 더이상 강이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선을 이해했을 때 산은 오로지 산이고, 강은 오로지 강이었다." 젊어서 방탕하게 놀다가 스물세 살에야 세례를 받은 뒤 트라피스트 수도회 신부가 된 머튼의 '산과 강' 이야기는 어디서 많이 들은 듯한 말이다. 성철 스님이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되고 나서 내놓은 첫 법어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란 말이다.

 

 

▶올해로 탄생 100년을 맞는 성철 스님(1912~1993)은 '단번에 깨친다'는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지향한 선승(禪僧)이었다. 성철은 "깨달은 순간에 번뇌망상이 다 떨어지지 않았다면 깨달았다는 말도 하지 말라"고 했다. 성철 탄생 100년을 맞아 조계종이 3월 31일부터 성철이 수행한 24개 사찰과 암자를 순례하기로 했다. 1936년 가야산 해인사로 출가한 성철은 30년 동안 산문(山門)을 떠나는 것을 꺼려했다. 잠잘 때 눕지 않고 8년을 수행하는 '장좌불와(長坐不臥)의 옛 수도승의 길을 좇았다.

 

 

 

 

 

▶성철은 여러 차례 기워 누더기가 된 승복을 입고 살며 "나는 못났으니까" 했다. 양말을 기워 신는 모습을 딱하게 여긴 제자가 질긴 나일론 양말을 선물한 적이 있다.

성철은 "이놈아, 중이라면 기워 입고 살 줄 알아야제"라고 호통쳤다.

 

▶성철은 조계종 종정이 돼서도 '가야산 호랑이'로 불리며 산을 떠나지 않았다. 성철은 1981년 법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를 내렸다.

정권 비판을 바랐던 사람들이 '현실 도피'라고 비난하자 성철은 제자들에게 말했다.

 

"내가 산중에 살면서 종정 하는 기 뭐꼬? 산중에 수행승 하나 제대로 있는 꼴을 보여주려는 것 아이가."

 

▶작년 11월 불교 학술대회에서 김성철 동국대 교수는 "성철은 출가자가 해야 할 일이 섣부른 현실 참여가 아니라 불교의 본질 회복이라고 판단했다"고 풀이했다.

 

성철이 제자들에게 남긴 유언은 "참선 잘하그래이" 한마디였다.

큰스님이 세상을 하직하는 인사 같지가 않다. 마치 학교가 파한 후 교문 앞에서 예닐곱 초등생들이 주고받는 작별인사와 다를 게 없다. '평상심(平常心)이 곧 보리(菩提)'라던 큰스님이 우리 손에 쥐여주는 따뜻한 선물처럼 울리는 한마디다.

/ 조선

 

 

 

대통령도 巨富도 물리친 큰스님의 '대쪽 리더십'

 

성철 스님 탄신 100주년

권력·돈과 거리두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 돌려보내고

주변사람들 이권 못 누리게 사찰 주지 등 보직 안 맡겨

내달부터 수행처 순례 행사, 유품전·백일법문 강좌도

 

 

 

 

"누구도 법당에서 정성을 다해 3000배(拜)를 마치지 않고서는 날 만날 생각 마라. 내 상좌들에게는 절대 사찰 주지나 주요 소임을 맡기지 마라."

 

올해 탄신 100주년, 내년 입적(入寂) 20주기를 맞는 한국 현대불교의 큰 스승 성철(性徹·1912~1993) 스님은 생전에 이렇게 강조했다. 백련불교문화재단과 조계종 중앙신도회 부설 불교인재원(이사장 엄상호)은 '지금, 여기'에 여전히 큰 의미를 지니는 성철 스님의 행적과 사상을 기리기 위해 올해 다양한 기념사업을 마련했다. 성철 스님의 상좌로 입적 때까지 20년간 시봉했던 원택(圓澤) 스님(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은 14일 간담회에서 여러 일화를 들어가며 '성철 리더십'의 요체를 설명했다.

 

◇3000배…권력·富와 거리 두기

 

"스님의 '3000배 요구'는 청정한 수행자의 모습을 지켜내기 위한 철벽과 같았다. 권력(權力)·금력(金力)으로부터 자유로운 모습으로 모든 출가자에게 본을 보이신 것이다." 원택 스님의 설명이다. 1978년 구마고속도로 개통 때는 박정희 대통령이 해인사를 방문했지만, 방장 성철 스님은 만나지 못했다.

당시 스님은 "대통령은 세상의 어른이지만 총림(叢林)에선 방장이 어른인데, 날 만나 삼배를 안 하실 바에야 서로 안 만나는 게 낫다"고 했다. 후일 금융사기 사건으로 구속되는 '큰손' 장영자씨 부부도 1980년대 초반 백련암 앞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당시 주변에선 "장씨 부부를 한 번만 만나주면 대한민국 사찰 불사(佛事)가 전부 다 해결된다"며 졸랐지만 스님의 대답은 이랬다.

 

"그런 불사라면 안 할란다."

 

◇보직 맡기지 말라…주변 관리

 

성철 스님은 또 상좌들이 자신의 그늘에서 권력과 이권을 누릴 여지 자체를 없애버렸다. 세속 말로 하면 일종의 '친인척 관리'다. 1967년 해인사 방장으로 추대된 뒤 주지에게 늘 "내 상좌들에게는 절대 본·말사 주지나 주요 보직을 맡기지 말라"고 '명령'했다. 원택 스님은 "볼멘소리를 하는 이도 있었지만, 어쩌면 그 덕에 지금껏 상좌들이 큰 다툼 없이 살아온 것 같다"고 했다.

 

 

◇수행처 24곳 순례… 기념행사 다양

 

 

 

 

백련재단과 불교인재원은 내달 31일 스님의 생가를 복원해 세워진 산청 겁외사를 시작으로 평생 수행처 24곳을 매달 순례하는 '영원한 자유인 성철 큰스님 수행도량 순례'를 시작한다.〈지도〉

 

장마철과 한겨울을 빼고 2014년 8월까지 계속될 대장정이다. 스님이 출가 전 참선을 시작해 40여일 만에 동정일여(動靜一如)의 경지에 들었던 산청 대원사(4월), 출가 본사인 합천 해인사(5월) 등을 거쳐 스님이 깨달음을 얻어 오도송을 읊었던 대구 동화사(9월), '봉암사 결사'의 현장인 문경 봉암사(2013년 7월)도 간다.

10년 장좌불와(長坐不臥)하며 정진했던 대구 파계사 성전암(2014년 4월) 등을 거쳐, 1966년 이후 1993년 열반 때까지 주석했던 해인사 백련암에서 순례의 마침표를 찍는다.

 

또 내달 5일부터는 매주 월요일 저녁 7시 서울 견지동 전법회관 선운당에서 '백일법문 강좌', 내달 11일에는 서울 견지동 조계사에서 탄신 100주년 다례재, 9일부터 6월 3일까지는 조계종 불교중앙박물관에서 성철 스님의 유품과 유필, 사진, 동영상 등을 선보이는 성철 스님 생애 특별전 '자기를 바로 봅시다'도 열린다. 또 작년부터 '퇴옹성철의 100년과 한국불교의 100년'을 주제로 열리고 있는 학술 포럼은 올해 '퇴옹성철과 한국불교'를 소주제로 스님의 돈점사상과 중도론 등을 4차례에 걸쳐 논의한다.

 

 

 

 

 

 

혼돈의 세상, 성철 스님에게 길을 묻는다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 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데/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성철 스님 열반송)

 

평생 “속이지 말고 공부하라.”고 외쳤던 ‘가야산 호랑이’ 성철(1912~1993) 스님. 한국 현대불교를 대표하는 성철 스님의 탄신 100주년을 맞아 그의 수행처를 따라가며 수행의 의미를 되새기는 순례법회가 마련된다.

 

 

▲ 누더기를 걸친 채 늘 ‘자신을 속이지 말라.’고 후학들을 가르쳤던 성철 스님. 스님의 탄신 100주년을 맞아 다양한 기념 행사가 마련되고 있다. 서울신문 포토라이브러리

 

 

재단법인 백련불교문화재단과 중앙신도회부설 불교인재교육원이 다음 달 31일부터 2014년 8월까지 매달 진행하는 ‘성철 스님 수행도량 순례법회’다. 성철 스님의 수행도량을 전수 답사하는 순례법회가 열리기는 처음이다.

 

순례단은 합천 해인사를 비롯해 부산 범어사, 양산 통도사, 영천 은해사, 대구 동화사, 순천 송광사, 예산 수덕사, 문경 봉암사 등 성철 스님이 주석하며 수행했던 24개 사찰을 방문할 예정이다. 수계득도부터 정진, 오도, 열반까지 스님의 구도 여정을 모두 밟는 셈이다.

 

순례법회의 가장 큰 특징은 성철 스님의 가르침을 배워 일상에서 회향한다는 점. 이동하는 차량에서 성철 스님의 수행 일화를 소개하며 법사 스님이 법문을 진행한다. 늘 “남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던 스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회와 이웃을 향해 기도하는 시간도 갖는다.

 

불교계는 이 순례법회 말고도 다양한 기념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불교인재개발원이 3월 5일부터 매주 월요일 저녁 인재개발원 내 선운당에서 실시하는 ‘백일법문 강좌’와 백련불교문화재단의 릴레이 학술포럼은 가장 눈길을 끄는 행사다.

 

이 가운데 ‘백일법문 강좌’는 성철 스님의 삶과 사상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법문의 진수와 가르침을 찬찬히 되새기는 자리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인 원택 스님과 금강대 김성철 교수, 불광연구원 서재영 박사가 불교의 본질, 중도사상, 중관사상, 화엄 및 선종사상을 강의한다.

 

백련불교문화재단의 릴레이 포럼은 성철 사상의 본질인 돈오돈수(頓悟頓修·단번에 깨우쳐 더 수행이 없는 경지)와 한국 불교의 수행법을 집중 조명하는 자리다. ‘퇴옹 성철과 돈점논쟁’(3월 29일)을 시작으로 ‘돈오돈수와 퇴옹 성철의 수증론’(5월 24일), ‘퇴옹 성철의 중도론’(9월 27일), ‘간화선(看話禪)과 위파사나’(11월 22일)에 대한 토론이 이어진다.

 

문화사업도 풍성하게 열린다. 불교중앙박물관에서는 스님의 일대기를 담은 전시회(3월 8일∼6월 3일)가 마련돼 스님의 유품, 유필, 사진을 볼 수 있다. 서예가 겸 전각가인 김양동 화백이 법어집 ‘본지풍광’ 속 말씀을 서화로 꾸민 ‘성철 스님의 법어 서화전’을 준비하고 있으며 가을쯤엔 박대성 화백이 성철 스님의 행적지와 초상을 수묵으로 그린 전시회를 연다.

 

스님의 생애를 담은 ‘성철 큰스님 행장’, 말씀에 사진을 곁들인 ‘본래 눈을 뜨고 보면’ 같은 서적도 2월 말 잇따라 출간되며 스님의 일화를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춘 동화도 5월쯤 선보인다.

 

플래시 애니메이션, 비디오 클립, 웹툰 등 성철 스님과 관련해 다양한 콘텐츠를 제작, 인터넷과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서비스하는 사업도 추진된다. 이 같은 사업을 준비해 온 백련불교문화재단은 “성철 스님이 사회에 끼친 영향을 모색하면서 스님을 한국을 대표하는 20세기 사상가로 자리매김하는 작업에 초점을 맞췄다.”며 “스님을 문화 아이콘으로서도 새롭게 조명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 서울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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