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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로] 1982년 운동권과 2012년 진보 정당 대표

도깨비-1 2012. 3. 23. 11:19


[태평로] 1982년 운동권과 2012년 진보 정당 대표

1982년 대학 선거 때
'운동권 아니면 敵'
30년 지난 지금도
좌파는 '우리만 善' 주장
정작 이정희 행태는
낯두꺼움과 찌질함


   이한우 기획취재부장/ 조선일보 2012. 03. 23

 

   어제 아침 신문을 보다 무심결에 "이정희 이 사람, 도대체 왜 이래"라고 하자 아내가 한마디했다. "당신이 모르면 누가 알겠어?" "그게 무슨 소리야?" "당신이 학생운동할 때는 더 했잖아?" 잊고 있었다. 아내는 대학 1학년 때 만났기 때문에 뭐 하나 속일 수 없는 목격자다.
   1982년, 요즘 그 시대를 알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폭압의 시대'라고 비장하게 부르는 전두환 정권 초기였다. 실제로 살벌했다. 1981년 대학에 들어간 필자는 '1년 전 광주의 진실'을 접하면서 분노했고 소위 지하 운동권에 몸을 던졌다. 열심히 했기에 선배들은 필자를 '기대주'로 꼽았다. 기대주란 별것 아니다. 이념 학습 열심히 한 다음 3학년 때쯤 'P(팸플릿의 은어)' 뿌리고 시위를 주동한 다음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 위반 혐의로 1~2년 감옥에 갔다가 골수 운동권이 될 수 있는 인물이라는 뜻이다. P의 내용이 조금 심하면 국가보안법(국보법)에 걸리기도 했다.
   '기대주'여서인지 2학년 때 지금의 총학생회장에 해당하는 학도호국단장 간접선거에 '배후'에서 관여할 기회가 있었다. 후보로는 운동권과 비운동권, 두 사람이 출마했다. 선거 바로 전날까지 운동권 출신 후보는 탁월한 연설 실력의 비운동권 후보에게 절대적 열세를 보이고 있었다. 이날 밤늦게 운동권의 '비상대책회의'가 열렸고 필자도 그 회의에 참석했다. 안건은 비운동권 후보를 '경찰서의 후원을 받는 어용 후보'라고 흑색선전하자는 것이었다. 솔직히 한편으로 놀라긴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선거에서 이길 수만 있다면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도덕적 우월감과, 적과 동지의 이분법에 바탕을 둔 운동권 사고방식에 깊이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투표 날 아침 등굣길에서 평소 정치나 운동권에 관심 없던 한 친구가 다가와 속삭이는 것 아닌가? "야, J후보는 모(某) 경찰서에서 민다는데 그 이야기 들었냐?" 대책회의가 끝난 지 10시간도 안 됐는데 학교에는 거짓 루머가 파다했다. 결국 그날 오후 마지막 유세 때 그 비운동권 후보는 피울음을 토했다. "어떻게 멀쩡한 나를 경찰의 앞잡이로 매도할 수 있는가?"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잠깐 미안했지만 필자는 그가 떨어지기를 바랐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까지 느끼지는 못했다. 그 비운동권 후보는 결국 떨어졌다. 당시 미안하기는커녕 의기양양하기까지 했다. 1982년 고려대에서 있었던 씁쓸한 이야기다. 늦었지만 그분께 진심으로 사죄한다. 그때의 경험은 결국 '운동'을 버리게 만들었다.
   지난 30년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도 총선 때가 되면 종종 그 낙선한 J씨가 떠오른다. 그 이후 총학생회가 부활됐고 운동권 출신 학생회장 후보들은 하나같이 자신은 훗날의 정치 경력을 위해 출마하는 것은 아니라고 목청을 높였다. 반면에 J씨처럼 비운동권 인사는 정치를 위해 출마한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운동권 학생들은 자신들의 '정치 공작'의 정당성을 의심치 않았다. 실제로 J씨는 뒤에 몇 차례 국회의원에 도전했다가 실패했다. 그러나 정작 더 중요한 것은 당시 운동권 출신 대부분이 국회의원에 출마해 성공하거나 실패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들과 J씨는 무슨 차이가 있는가? 아무런 차이가 없다. 둘 다 권력 지향이다.
   최근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가 보여주는 낯두꺼움과 찌질함 때문에 J씨에게는 더욱 죄스럽다. 아마도 1982년 상황이었으면 이정희 같은 사람은 운동권이 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십중팔구 고시 공부 했을 게다. 전두환 정권하에서 운동권이 된다는 것은 나름대로 자신을 거는 순수함 없이는 어려운 일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