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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8화] 이승환 비긴즈

도깨비-1 2012. 3. 9. 16:28
[8화] 이승환 비긴즈
http://media.daum.net/v/20120309161105922

출처 :  [미디어다음] 연예일반 
글쓴이 : 다음연예 원글보기
메모 :
    오디션에 나갔다면 황망하게 떨어졌을 것
           시작으로 돌아가..다시 쳐달린다
 
 
이승환은 올해로 데뷔 23년 째다. 10장의 정규 앨범을 내고, 수없이 많은 공연을 하는 동안 그는 공연계의 신성에서 그와 같은 뮤지션을 꿈꾸는 후배들의 멘토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도 무대 위에서 온 열정을 쏟아 붓는다. 소극장에서 공연을 하던 그 때나, '공연지신'으로 불리는 지금이나 그는 늘 한 결 같은 마음으로 살아간다. 23년의 시간동안 이승환을 지탱케 해준 것은 무엇일까. 이승환의 시작으로 돌아가, 그 실마리를 찾아보자. / 편집자 주











Hwan's Begins 1. METAL KID
나는 알려진 바대로 ' rock kid '였다.

85년 당시 ' 시나위 '와 ' 작은 하늘 '이 있던 메틀 컴퍼니와 ' 뮤즈 에로스 ' ' 리자드 ' 등이 있던 '메탈 프로젝트'는 한국 헤비메틀의 태동기를 이끌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메틀 프로젝트 ' 출신이었던 나는 ' 락 스피릿 '을 형들의 온갖 기행(?)을 통해 배웠고 ' 객기도 한번쯤 부리며 살았어야 했는데 아까워 '라고 노래한 ' 붉은 낙타 '의 가사처럼 낯가림이 심하고 수줍어하던 ' 바람난 중삐리 ' ( 내 외모로 인한 그 당시 별명 ㅋㅋ )는 무대 위 형들이 보여주는 퍼포먼스에서 큰 감명을 받으며, 훗날 나도 저렇게 '광기어린 무대'를 연출할 거라며 굳은 다짐을 하곤 했었다 하하하

80년대 중반, 머리가 길다는 이유로 경범죄 단속을 받던 그 때... 핀컬파마와 체인을 두르고 징 박힌 장갑 ( 당시엔 레어 아이템 )을 하고 다녔던 나는, 불심검문을 참 많이도 당했더랬다. 내가 속해있던 밴드 ' SS '의 몇 안 되는 자작곡 ' 붉은 피 '와 ' 자녀목 '의 가사가 쓰여진 노트 때문에 심각한 상황까지 갈 뻔 했던 웃지 못 할 해프닝도 있었다 ㄷㄷㄷ

그러니...집에선 일련의 상황들이 달가울 리 없으셨다. 암묵적인 대립이 한참동안 이어졌고... 두 달간 정신과 통원치료를 받아야만 했으며, 그러는 사이 자연스레 음악은 내 미래일 수 없다는 스스로의 결론에 도달하기도 했었다.

Hwan's Begins 2. 발라더로 변신
' 메탈 프로젝트 '에서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 오 )태호를 알게 되었다. 신대철을 위협할 정도였다고 알려질 정도로 정교하고 힘 있는 연주를 하는 기타리스트였다. 태호와 나는 밴드를 함께 하기도 했었는데 서로가 헤비메틀만을 고집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아카시아 '라는 밴드였는데, 태호가 ' 시냇물가족 '으로 하자는 걸 락밴드 이름으론 어울리지 않는다고 설득하고 윽박질러 간신히 ' 아카시아 '라고 할 수 있었다 하하하

그렇게 옥신각신 밴드를 꾸려가던 1986년 ( 이 )문세형의 4집 앨범은 우릴 확실하게 발라드의 길로 이끌었다. 고 이영훈님의 노래는 차라리 한 편의 시였고, 환희였다. 그 때부터 태호는 더 이상 기타앰프의 게인을 끝까지 올리지 않았고 내 작곡습작노트엔 발라드가 차곡차곡 쌓여가기 시작했다.

' 발라드로 발라드립니다 '의 시작이었다. 하하하

Hwan's Begins 3. 17번의 퇴짜, 그리고...

' 위대한 탄생 ' 첫 회에서도 얘기했었지만, 내가 오디션프로그램에 나왔다면 십중팔구 혹평세례를 받으며 황망하게 떨어졌을 거다.

1집 앨범 데모를 들고 여기저기 찾아다닐 때도 난 내 개성을 알아주는 기획사는 많지 않으리라 예상했었다.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으니 염려대로 17군데의 기획사로부터 퇴짜를 맞았다. 어느 레코드회사에는 ' 기다려 '란 말 한마디에 하루 10시간씩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1주일에 한 번씩 꼬박 1년을 가서 기다리다 온 적이 있었다.

그러다 18번째 회사에서 녹음을 하게 되었다. 존경해마지않는 ' 어떤 날 '의 ( 조 )동익이형과 함께 했던 꿈같은 나날이었다. 2개월 정도 녹음이 진행되고 있을 즈음 회사는 나에게 계약을 하자고 했다. 3년에 앨범 세 장, 계약금 없고, 인세 없고, 홍보비를 1년에 2000만원씩 집에서 가져온다가 계약조건이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나였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어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께서는 묵묵히 그 동안의 녹음비 800여만원을 물어주셨고, 유산을 미리 집행하신다며 500만원을 더 주셨다. 이 앨범이 안 되면 학교로 다시 돌아간다는 조건이었다. 500만원으로 어떻게든 아껴가며 녹음을 했고...그로부터 2년 후 난... 중퇴를 했다.

Hwan's Begins 4. 공연의 시작

혼자였다. 인쇄소에도 직접 가야 했고, 동네 레코드점을 일일이 돌며 '이승환 앨범 있어요? 왜 없지?'라며 영업도 했다. TV출연을 할 생각도 없었지만 섭외 또한 없었다.

음반이 나오고 7개월 후 1990년 5월, 지금은 없어진 종로의 신나라 라이브홀에서 첫 공연을 했다. 선배가수분과의 조인트콘서트였고 친지들을 위한 공연이었다. 그 때부터 꽤 오랫동안 난 포스터를 직접 붙이고, 용달아저씨와 악기를 나르며 공연장의 음향엔지니어를 했다. 6월 이대 앞 청파소극장, 7월 다시 신나라 라이브홀에서 한 달 반 동안 매주 2일씩 공연을 했다. 악기를 싸고 풀고를 반복했다. 그러던 중 8월 마지막 공연은 매진이 되었고 10월엔 음반차트 1위에 올랐다. 음반을 내고 1년 만에 방송홍보 없이 1위가 된 거다. 방송홍보가 없었으므로 그 후로 2년 동안 버스를 타고 다녔지만 알아보는 이가 없었다. 편했다. 1집 가수가 공연에서 1집 전곡을 다 부르고 신곡도 불렀다. 가장 이상적인 활동이었다.

84년 겨울 명동의 어느 백화점 공연장에서 쭈뼛거리며 수줍어하던 ' 바람난 중삐리 '는 ' 들국화 '를 보며 머리가 쭈뼛 서는 음악의 신천지를 경험했었다. ' 저 아저씨들처럼 되면, 하면 참 좋겠다 '고 생각했더랬다.

고맙습니다. 내가 사랑하고 존경했던 모든 선배님들!! 저도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선배가 되겠습니닷!!

Hwan's Begins 5. 시작으로 돌아가기
2007년 잠실 주경기장 공연 ' HWANTASTIC '에서 공연은 결국 사람이고 음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스태프와 밴드와 관객들 사이에 흐르던 그 무언가는 아직도 짜릿하다.


그 후로 과잉된 쇼를 하지 않는다. ' 음악을 위한 쇼 '를 위해서...23년간 음악을 했다. 책임감을 느껴도 무방한 시간이고 응당 그래야 하는 시간이다. 내가 가진 미약한 음악이 누군가에게 위로와 힘이 되었음 좋겠다. 어느 시간, 어느 하늘 아래에선가 누군가의 어느 노래가 되었음 좋겠다. 군가 분노하는 순간에도, 누군가 슬퍼하는 순간에도,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하는 순간에도, 내 노래가 누군가와 함께 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먼 훗날 가수로서의 내 바람은 사람들이 날 좋은 가수였다고 기억해 주는 거다. 그것보다 더 큰 바람은 날 좋은 사람이었다고 기억해 주는 거...하하하

글 이승환 / 편집 강명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