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이슈

[최보식 칼럼] 좌파세력에 배울 점

도깨비-1 2011. 8. 5. 10:25


[최보식 칼럼] 좌파세력에 배울 점

시위대에는 야유회 오듯 아이를 동반한 젊은 부부도 있었다
이들과 맞선 우파는 황혼의 노인들이었다
시위대와 마주치자 "저 빨갱이!" 흥분했다

최보식 선임기자 / 2011. 08. 05.  조선일보

 

   서울에 물난리가 났을 때 한 비판적인 중견 교수와의 통화는 이렇게 끝났다.
   "오 시장이 서울시 수해 방지 예산을 10분의 1로 줄였다는 것 아니오. 수해 현장에는 얼굴도 내비치지 않고. 숨어지내야겠지요. 나왔다가는 성난 군중에게 두들겨 맞을 테니…."
   이 놀라운 뉴스를 모르고 있었군. 인터넷과 트위터에서 이미 빠르게 퍼져가고 있었다. 물에 잠긴 서울을 배경으로 해신(海神) 포세이돈에 오 시장의 얼굴을 합성한 '오세이돈'에 나는 감탄했다. '오세훈 주연의 무상급수(水)' 풍자도 딱 들어맞았다. 일류의 감각이다.
   물을 막는 것보다 말을 막는 게 더 급했을지 모른다. 서울시는 기자회견을 열어 "수해 방지 예산은 더 늘어났다"며 통계 숫자를 제시했다. 수해 현장을 돌아다닌 오 시장의 일정 자료를 돌렸고, 현장에서 첫날 점심은 선지해장국, 둘째날은 순댓국밥을 먹은 것까지 공개했다. 좌파세력은 '무상급식 선택' 주민투표를 앞둔 오 시장을 폭우에 떠내려보내고 싶었을 것이다.
   사실을 왜곡해 목표를 쟁취하려는 선동술에 침뱉고 돌아설 일만은 아니다. 배우는 자세가 되어 있다면 악당에게도 배울 점이 있다. 중국의 유명한 악당 도척(盜蹠)이 말했다. "방안 어디에 값진 물건이 있는지 단번에 알아내는 성(聖), 훔칠 때 앞장서는 용(勇), 훔친 뒤 마지막에 나오는 의(義), 그날 상황을 잘 판단하는 지(智), 장물을 공평하게 나눠주는 인(仁), 도둑질도 이런 덕목을 갖춰야 제대로 할 수 있다." 그러니 좌파세력에서 어찌 배우려고 하지 않는가.
   나는 좌파세력의 뛰어난 감각과 기민함에 늘 탄복한다. 이들은 인터넷과 트위터를 장악하고 어떻게 하면 대중들에게 파고들고 먹히는지를 안다. 시위대를 태운 버스를 '희망버스'라고 이름붙인 것은 우파의 머리로는 백 번 죽었다 깨어나도 어림없다.
   좌파세력의 번성은 대중문화·예술·문학 분야의 솜씨 좋은 프로들이 동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잠깐 오른쪽을 기웃거리던 68세의 황석영씨도 운동모를 쓴 채 자랑스럽게 시위버스에 올라탔다. 그만큼 국내 가치시장에서 좌파가 더 매력적이 됐다는 뜻이다. 그 이유를 우파는 탐구하고 반성해야 한다.
   사회 분위기도 좌파 쪽에 우호적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한진중공업 시위대에는 야유회 오듯 아이를 동반한 젊은 부부도 있었다. 이들과 맞선 우파의 모습은 황혼에 가까운 노인들이었다. 노인들은 시위대와 마주치자 "저 빨갱이!" 흥분했다. 힘에 부쳐 길에서 쓰러질 듯했지만, '이 나라를 어떻게 지켜냈는데' 하는 사명감으로 자신을 지탱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때 좌파에 결정타를 먹였던 '빨갱이'는 이제 용어의 힘을 잃었다. 나라를 걱정해온 어른들로서는 기운이 빠지겠지만. '급진 좌경세력'이란 1980년대 말도 더 이상 우리 사회를 경각시키지 못한다. 그렇게 말할수록 말하는 사람만 점점 구닥다리로 밀려난다. 이제 젊은 세대는 '극우'와 '보수 꼴통'을 더 조롱하고, 그걸 멋으로 안다. 좌파세력이 우파 전체에 덮어씌워 놓은 용어전략이 효과를 본 것이다.
   좌파세력에서 이런 감각과 선동기술만 배울 것은 아니다. 이들의 열정, 조직력, 목표를 향한 단합이야말로 우파가 꼭 배워야 할 것이다.
   소집 신호음이 발령나면 이들은 5분대기조인듯 금세 몰려온다. 한진중공업에도 광우병 촛불시위를 주도했던 60여개 단체가 속속 집결했다. 시위 현장에서 즉석 모금함을 돌리면 제 호주머니를 비울 줄 안다. 선거판에서 우파는 '실탄'을 내려줘야 움직이지만, 이들은 자기 돈을 들여가면서 뛴다. 자신들이 꿈꾸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무엇보다 정권을 바꾸기 위해 지금 자신의 것을 양보하고 희생도 감수한다.
   우파로 넘어오는 순간 이런 전율할 만한 감동은 사라진다. 힘센 자, 돈 많은 자, 지위 높은 자, 능력 있는 자들은 자유시장경제의 과실만 따갈 뿐이다. 그 체제를 바르게 지켜낼 의무와 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본 적이 없다. 열정도 없고, 해야 할 절박성도 못 느낀다. 약자와 소외자에 대한 정의감도 없다. 오늘 하루 자신만의 멋진 식사와 취미생활, 편안한 잠을 방해받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서 높이 40m 크레인에 올라가 200여일 농성한 김진숙씨를 '좌파 불순세력'으로 쉽게 욕한다.
   하지만 우파에서는 그 누구도 그런 크레인에 올라갈 용기가 없다. 그늘 속 비정규직과 정리해고 문제를 우파의 고민으로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크레인 농성자보다 '우파'로 상징되는 그 회장님을 향해 고개를 흔드는 게 우리 사회의 균형감각이다. 우파가 아직 몰락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은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