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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로] 추기경이 옳은가 사제단이 옳은가

도깨비-1 2010. 12. 17. 11:39

 


[태평로] 추기경이 옳은가 사제단이 옳은가

 

  조선일보 / 김광일 부국장 겸 국제부장 / 2010년  12월 16일 

 

   크리스마스가 일주일 남았다. 가장 훈훈해야 할 계절이다. 그러나 신도들의 마음은 꽁꽁 얼어붙었다. 사제들이 '눈에 보이는 4대강'에 가 있는 사이에 신도들의 가슴 속을 흐르는 '눈에 보이지 않는 4대강'은 얼음이 두껍게 얼었다. 보이지 않는 4대강이란 '사랑의 강'이고 '구원의 강'이고 '용서의 강'이고 '기도의 강'이다. 그 강이 언 것은 어제 오늘 전국을 강타한 한파주의보 때문이 아니다.
   "추기경이 옳은가, 정의구현사제단이 옳은가?" 사실 이런 질문은 너무 무례하다. 한국 땅에서 둘 중 하나를 고르는 질문은 이데올로기적 정파주의로 금세 변질돼 버린다. 누구라도 '4대강'에 대한 의견을 말하면 우리는 그 사람의 친구까지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정파주의의 높은 파도를 피해 우리가 쉴 수 있는 곳이 사찰이요 교회요 성당이어야 한다. 옳고 그른 것은 숫자의 많고 적음이나 계급의 높고 낮음과도 무관하다. 지금부터 본질은 그곳에 있지 않다.
   우리나라 인구조사를 하면 53%가 '종교 있음'이라고 대답한다. 불교는 교직자가 5만명 가까이 되고, 개신교는 10만명, 천주교는 1만5000명 가까이 된다. 그냥 이분들을 스님·목사님·신부님이라고 불러본다면, 16만5000명의 '양심'이 이 나라를 지키고 있는 것과 같다.
   지금부터 본질은 그분들이 어떻게 '사랑·구원·용서·기도'의 강줄기를 흐르게 할 것인가에 있다. 아무리 세상의 말들이 오염되고 행동이 거칠어져도, 그 세상을 마지막으로 정화시킬 수 있는 희망은 승려와 목회자와 사제들이 지닌 소금과 목탁의 힘에 있다. "책임을 져라" "용퇴의 결단을 내려라" "궤변" 같은 말은 사제가 밥보다 귀하게 여겨야 할 기도의 말씀이 아니다. 정말로 한 말씀 하고 싶다면 "사랑하고 존경하는 추기경님이 앞을 밝게 보실 수 있는 지혜를 갖게 해주십시오" 해야 한다.
   나는 승려·목회자·사제라는 말만 들어도 거룩함을 느낀다. 그러나 성직(聖職)이 비판을 용서치 않는 성역(聖域)은 아니다. 집권당과 정부의 예산안 졸속처리가 아무리 한심해도 스님들의 말씀은 용서와 기도의 표현이 돼야 한다. "용납할 수 없다" "거부하겠다" "분노케 한다" 같은 표현은 정말로 신도들을 불편하게 한다. 얼마 전에 개신교 목회자들의 '국고지원 템플스테이 반대를 위한 연합기도회' 사진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고, 어제 아침 서울의 한 사찰에 붙은 '무슨 무슨 관계자 출입금지'라는 현수막을 보면서도 마음이 쓰렸다.
   내 기억에 불교는 타 종교계에서 하는 행사에 대해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운동을 한 것을 본 적이 없다. 현 정권 들어와 불교계의 요구는 어떤 의미에서 소박하다. 편향되게만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아니 그럴수록 우리는 그분 성직자들에게서 구휼과 자비와 평화의 기도를 듣고 싶은 것이다.
   수천년 전 모세가 호렙산에 오른 것을 주님께서 보시고, 떨기나무 한가운데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부르신다.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땅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지금 사제단 웹사이트에 그들을 비판하는 글들이 압도적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정말로 '4대강 반대'가 거룩하다면, 이제 우리는 권위의 신발, 오만의 신발은 물론이고, 정의의 신발까지도 벗어버려야 할지 모른다. "나만 옳다"고 하면서 "결사"를 외치는 순간, 그곳은 성직이 아니라 모두가 두려워하는 성역이 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