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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천주교 사제단은 "북한 가 정의구현하라"는 데 답해야 - 조선일보

도깨비-1 2010. 12. 17. 11:13

[사설] 천주교 사제단은 "북한 가 정의구현하라"는 데 답해야

      조선일보 / 2010. 12. 15

 

   천주교 정진석 추기경은 지난 8일 4대강 관련 발언을 하는 과정에서 북한의 연평도 포격과 천안함 폭침에 대해 "가슴 아픈 이야기"라며 "진리를 차단하고 자유가 없는 북(北)에 대해 비관적"이라고 말했었다.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이 발언이 "골수 반공주의자 면모를 보여줬다"고 공격했다. 참으로 이해하기 곤란한 일이다. 그럼 사제단은 오늘의 북한이 국민이 희망에 부풀어 있는 나라이며, 자신이 믿고 싶은 종교를 믿을 자유가 있는 나라라고 생각한다는 말인가. 종교인이 종교가 없고, 국민을 굶긴 채 핵무기와 미사일을 만들고, 같은 민족 젊은이를 대포나 어뢰(魚雷)로 살상(殺傷)하고, 주민이 진실을 보고 듣지 못하게 눈과 귀를 가리는 체제를 비판하는 것이 어떻게 골수 반공주의라는 말인가.
   그런 뜻에서 이회창 자유선진당 대표가 13일 이걸 보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북한의 수령 독재체제를 비판하는 것은 상식"이라며 "(북한 비판을 공격하는 것은) 바로 자신들이 골수 친북주의자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한 것은 핵심을 찔렀다. 이 대표는 "(정의구현사제단은) 안방에서 활개치듯 안전한 서울광장 촛불시위나 앞장서지 말고 삭풍과 탄압이 휘몰아치는 광야(북한)로 나가라"며 "사제들이 정말로 하느님 말씀과 정의를 위해 순교(殉敎)할 용기가 있다면 그곳에 가서 정의를 구현하고 순교하라"고 했다. 많은 국민도 같은 생각이다.
   4대강 개발은 찬반을 다툴 수 있는 사안이다. 김일성과 아들·손자 3대가 전 주민을 감시·통제·압박하고, 때로는 약식 재판으로 처형하는 지구 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동토(凍土)의 나라 북한을 비판하는 게 왜 사제단의 심기(心氣)를 그리 사납게 만든단 말인가.
   정의구현사제단이 21세기에 3대 세습이 무슨 일이냐고 단 한 번이라도 김씨 왕조를 질책한 적이 있는가. 굶주림을 피해 국경을 넘다 잡혀 정치범 수용소에 갇힌 북한 동포를 위해 단 한 번이라도 촛불을 켠 적이 있는가. 북한의 핵무장·천안함 폭침·연평도 포격을 단 한 번이라도 나무란 적이 있는가. 정의구현사제단이 이런 물음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다면 자신들의 모습이 지금 국민에게 어떻게 비치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은 새로워져야 한다. ▣


[사설] 종교계와 4대江 문제


 조선일보 / 2010. 12. 13.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10일 정진석 추기경이 며칠 전 "천주교 주교회의가 4대강 사업을 반대한다고 한 것이 아니다"고 말한 것을 반박하는 '추기경의 궤변(詭辯)'이란 성명을 발표했다. 사제단은 "추기경은 주교단이 전문가의 다양한 견해를 경청하고 깊이 논의한 끝에 내놓은 결론을 함부로 왜곡했다"며 "이렇게 노골적으로 정부를 편드시는 남모르는 고충이라도 있는 것인지 여쭙고 싶다"고 했다. 정 추기경은 8일 기자간담회에서 "지난 3월의 주교회의 결정은 4대강 개발에 대한 찬성과 반대 입장이 아니라 난개발에 대한 우려를 표시한 것"이라며 "4대강 문제는 토목공사를 하는 사람들이 전문적으로 다룰 문제지 종교인들의 영역은 아니다"라고 말했었다. 추기경은 "(4대강 문제는) 4대강이 올바로 개발되느냐 안 되느냐 결과를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도 했다.
   종교는 세속 사람들에게 의견이 맞부딪치면 자신을 낮춰, 서로 이해하고 소통해 공동의 목표를 찾도록 하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정의구현사제단은 한국 천주교의 어른인 추기경이 현안을 보는 눈이 자신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대뜸 '궤변'이라고 맞받아쳤다. 우선 이게 마음에 걸린다. 더더구나 추기경에게 "이렇게 노골적으로 정부를 편드시는 남모르는 고충이 있는 것인지 여쭙고 싶다"고 들이대는 대목에 이르면 귀를 막게 된다. 이건 '여쭙는' 게 아니라 비아냥이다. 언젠가 사제단이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께도 막말을 하고 대들던 옛일이 떠오른다.
   왜 모든 종교가 4대강 개발에 대해 적극 반대, 소극 반대, 소극 찬성, 적극 찬성으로 찢겨져 내부에서 갈등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4대강 문제가 인권·정의와 같은 보편적 가치의 영역에 속한 문제가 아니라 치수(治水)와 개발 같은 과학적·기술적·세속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4대강 개발은 환경보호, 경제효율, 하천(河川)공학의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세속의 전문가들도 어느 방향이 진정 옳은 길인지 판단하기 힘들다. 종교가 이런 문제에 발을 디디면 길을 잃게 된다. 선(善)과 악(惡)을 가르던 칼로 세속적 문제를 베려 하니 칼이 나가지 않는다. 잘 들지 않는 칼에 힘을 주면 손을 베기 쉽다. 만일에 일이 잘못되면 종교 본연의 가르침마저 힘을 잃고 종교를 감싸는 성스러운 빛에도 얼룩이 갈 염려가 있다. 정권 역시 왜 이 정권 들어서 종교와 정치의 경계선이 다시 희미해지면서 이런 일이 거듭 발생하는지 크게 자성(自省)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