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사회일반
글쓴이 : 한국일보 원글보기
메모 : '4형제 독립유공자'의 후손들 광복절 맞아 고국 찾아
가족 모두 만주로 망명 무장단체 '의군단' 조직해 활동
4형제 훈장 추서에 후손도 초청 "명예회복시켜줘 감사"
"어디 봅시다. 그러니까 그 때가…." 김영빈(82ㆍ중국 옌지시) 옹은 오래된 기억을 한참동안 더듬었다. 외조부 얘기를 해달라는 주문을 받은 김 옹은 마치 자신이 직접 목격했던 것처럼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외조부 이경재(1875~1920) 선생의 아들이자 자신의 외삼촌으로부터 전해 들었다는 그 이야기는 비극적인 가족사이자 우리 항일운동사의 한 귀퉁이를 장식한 생생한 역사였다. 이 선생과 그 남동생 세 명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함께 같은 날 순국했다.
"한학을 하신 학자셨지. 의사이기도 했고." 함북 성진 출신인 이 선생은 기울어가는 조선의 국운과 일본의 야욕을 간파하며 차츰 반일사상을 키워갔다. 이 때문에 탄압을 받자 1902년 만주 지역으로 망명을 했다. 처음엔 혼자 룽징(龍井)에 서당을 차려 자리를 잡았고, 이후 가족들과 친척들까지 불러들여 옌지에서 집성촌을 이뤘다.
"이 즈음 본국에서 3ㆍ1 운동이 벌어졌다는 소식이 들려온 거야. 그 때부터 나라를 되찾으려고 이곳 저곳에서 독립군들이 생겨나고 그랬지." 1919년 3ㆍ1 운동의 영향을 받은 이 선생의 제자 한 명이 20여명의 젊은이들을 대동하고 이 선생을 찾아왔다. 그렇게 해서 비밀리에 '의군단'(義軍團)이라는 무장단체가 결성됐다.
이 선생은 참모직을 맡았고, 세 남동생과 함께 주변의 조선인들로부터 군자금을 모금하는 데 힘썼다. 김 옹은 "군자금으로 무기를 사들이고, 일부는 상해임시정부에 보내기도 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변고가 생긴 건 1920년 11월 3일이었다. 마을에 일본군들이 들이닥쳤다. 그 해 10월 청산리 전투, 6월의 봉오동 전투 등에서 항일 무장단체들이 큰 성과를 내던 시기였다. 독이 오른 일본군은 독립군을 소탕하기 위해 조선인 마을을 돌아다니며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었다.
"의군단 이 참모가 누구냐." 일본군은 이 선생 4형제를 포함해 마을 남자들 17명을 붙잡아 이경재 선생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두 명을 먼저 사살하며 협박했지만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4일 새벽, 보다 못한 이 선생이 "우린 양민인데 이러지 마라"고 대항하다 일본군의 총에 맞고 숨졌다. 이에 격분해 달려들던 세 동생도 모두 그 자리에서 총에 맞고 숨졌다. 17명 중 12명이 그날 목숨을 거뒀다.
정부는 1991년 이 선생의 세 동생인 이여일, 이여락, 이여익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이경재 선생은 자료가 늦게 확보되면서 올해 3ㆍ1절에 뒤늦게 훈장을 받았다.
이 선생 형제들의 후손들은 광복 64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 초청으로 12일 처음으로 고국을 방문했다. 김 옹은 "할아버지들께서 조국이 결국 독립한 것과 또 이렇게 훈장까지 받았다는 사실을 알면 얼마나 기뻐하시겠느냐"며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잊지 않고 정부가 공훈을 밝혀 훈장까지 주니 정말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여익 선생의 손자인 이동철(74)씨는 "'네 할아버지는 혁명을 하다 돌아가셨다. 이를 잊지 말고 나라를 위해 공부 열심히 하라'던 할머니와 아버지의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다"며 "만주벌판에서 소리 없이 쓰러져 간 사람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줘 고마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국가보훈처는 애국장을 받은 애국지사 서훈자 후손 1명에 한해 관련 규정에 따라 매월 123만원의 지원금을 지급할 예정이다.
진성훈 기자 bluejin@hk.co.kr
가족 모두 만주로 망명 무장단체 '의군단' 조직해 활동
4형제 훈장 추서에 후손도 초청 "명예회복시켜줘 감사"
"어디 봅시다. 그러니까 그 때가…." 김영빈(82ㆍ중국 옌지시) 옹은 오래된 기억을 한참동안 더듬었다. 외조부 얘기를 해달라는 주문을 받은 김 옹은 마치 자신이 직접 목격했던 것처럼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 고국을 방문한 '4형제 독립유공자'의 후손들이 13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독립운동에 얽힌 비극의 가족사를 말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경재 선생의 외증손녀 김순옥씨, 이여익 선생의 손자 이동철씨, 이경재 선생의 외손자 김영빈씨, 이여일 선생의 손자 이동산씨. 박서강기자
"한학을 하신 학자셨지. 의사이기도 했고." 함북 성진 출신인 이 선생은 기울어가는 조선의 국운과 일본의 야욕을 간파하며 차츰 반일사상을 키워갔다. 이 때문에 탄압을 받자 1902년 만주 지역으로 망명을 했다. 처음엔 혼자 룽징(龍井)에 서당을 차려 자리를 잡았고, 이후 가족들과 친척들까지 불러들여 옌지에서 집성촌을 이뤘다.
"이 즈음 본국에서 3ㆍ1 운동이 벌어졌다는 소식이 들려온 거야. 그 때부터 나라를 되찾으려고 이곳 저곳에서 독립군들이 생겨나고 그랬지." 1919년 3ㆍ1 운동의 영향을 받은 이 선생의 제자 한 명이 20여명의 젊은이들을 대동하고 이 선생을 찾아왔다. 그렇게 해서 비밀리에 '의군단'(義軍團)이라는 무장단체가 결성됐다.
이 선생은 참모직을 맡았고, 세 남동생과 함께 주변의 조선인들로부터 군자금을 모금하는 데 힘썼다. 김 옹은 "군자금으로 무기를 사들이고, 일부는 상해임시정부에 보내기도 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변고가 생긴 건 1920년 11월 3일이었다. 마을에 일본군들이 들이닥쳤다. 그 해 10월 청산리 전투, 6월의 봉오동 전투 등에서 항일 무장단체들이 큰 성과를 내던 시기였다. 독이 오른 일본군은 독립군을 소탕하기 위해 조선인 마을을 돌아다니며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었다.
"의군단 이 참모가 누구냐." 일본군은 이 선생 4형제를 포함해 마을 남자들 17명을 붙잡아 이경재 선생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두 명을 먼저 사살하며 협박했지만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4일 새벽, 보다 못한 이 선생이 "우린 양민인데 이러지 마라"고 대항하다 일본군의 총에 맞고 숨졌다. 이에 격분해 달려들던 세 동생도 모두 그 자리에서 총에 맞고 숨졌다. 17명 중 12명이 그날 목숨을 거뒀다.
정부는 1991년 이 선생의 세 동생인 이여일, 이여락, 이여익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이경재 선생은 자료가 늦게 확보되면서 올해 3ㆍ1절에 뒤늦게 훈장을 받았다.
이 선생 형제들의 후손들은 광복 64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 초청으로 12일 처음으로 고국을 방문했다. 김 옹은 "할아버지들께서 조국이 결국 독립한 것과 또 이렇게 훈장까지 받았다는 사실을 알면 얼마나 기뻐하시겠느냐"며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잊지 않고 정부가 공훈을 밝혀 훈장까지 주니 정말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여익 선생의 손자인 이동철(74)씨는 "'네 할아버지는 혁명을 하다 돌아가셨다. 이를 잊지 말고 나라를 위해 공부 열심히 하라'던 할머니와 아버지의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다"며 "만주벌판에서 소리 없이 쓰러져 간 사람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줘 고마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국가보훈처는 애국장을 받은 애국지사 서훈자 후손 1명에 한해 관련 규정에 따라 매월 123만원의 지원금을 지급할 예정이다.
진성훈 기자 bluej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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