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 3白의 순수함 역사의 숨결느끼며 - 상주
누에고치, 쌀, 곶감이 유달리 많이 생산돼 3백(白)의 고장 으로 불리는 상주시. 중앙고속도로나 구안국도를 따라 천평 인터체인지에서 선산 방향으로 길을 택하면 몇군데 갈림길이 있지만 거의 외길로 낙단교에 다다른다.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낙단교를 지나면 낙동면. 상주시 내방향으로 20여분 가면 상주 외답 농공단지가 나온다. 대구에서 이곳까지는 넉넉히 잡아 2시간이 채 안걸린다. 시내로 진입하지 않고 농공단지 네거리에서 국민관광단지 경천대 이정표를 보고 7Km쯤 들어가면 낙동강 수계에서 최고의 절경이라 할만한 경천대와 이곳으로부터 1~3Km 쯤에 연이어 사벌왕릉, 정기룡장군 유적지를 둘러볼 수 있다.
▲ 경천대 우담(雩潭) 채득기(蔡得沂)가 1628년(인조6년)에 터닦은 자연석대다. 천주봉밑 3층 바윗돌이 낙동강을 딛고 우뚝 섰는데, 강물이 발치에 와 회란치고 다시 번지어 남하하다가 용담(龍潭)에다 영물을 서려놓은 듯한 낙동강 제일의 명소다.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이 명승지는 옛부터 기우제를 올리던 신구(神區)요 정기룡(鄭起龍)장군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용마를 얻었다는 강변에 있다. 병자호란뒤 봉림대군이 심양으로 볼모가 되어 갈때 우담은 인조의 특명으로 대군의 주치의가 되어 따라가며 98행의 한글가사 봉산곡(일명 천 대별곡)을 지었는데 이는 국문학자료의 귀중한 유산이다. <낙동강을 발아래로 굽어보고 있는 경천대> 귀국한 뒤에 봉림대군이 벼슬로 불렀으나 굳이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한다. 대대로 이곳은 상주 선비들의 유상처요, 시회의 공간으로서 많은 한문학 작품을 남기었다.
▲ 충의사(忠毅祠)
조선조 선조때의 무장으로 임진왜란때 큰 공을 세운 정기룡장군의 유적지다. 장군은 1586년에 무과에 급제한 후 훈련원봉사, 상주목사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왜란이 일어나자 맹장으로 영호남에서 백전백승 하였으며 그후 경상도 병마사와 삼도수군통제사에 올라 국위에 일생을 바쳤 다. 신도비와 묘소는 충의사 동쪽약8백m 지점에 위치하며 신도비와 묘소간의 거리는 약1백m정도 된다. 교서2점, 교지, 신패, 옥대등 5점의 보물과 매헌실기판목 58점, 교지 19점등도 있다.
▲ 전 사벌왕릉(傳 沙伐王陵)
본래 사벌국은 신라 첨해왕때 신라로 병합되어 사벌주로 되었다. 법흥왕이 상주로 고치어 군주를 두었고 진흥왕이 상낙군(上洛으郡)으로 고치고 신문왕이 다시 주(州)로 만들었으며 경덕왕이 지금의 상주의 이름으로 고쳤으나 혜공왕이 다시 사벌주로 만들었다. 신라54대 경명왕 원년에 왕은 8왕자중 다섯째인 언창을 사벌주의 사벌대군으로 책봉해 사벌방어 장으로 사벌주를 수호토록 했다. 이때 백제의 견훤이 합천, 고령, 영천, 선산등을 점거 고립상태 에 이르자 언창은 경명왕2년에 사벌동과 취흔국촌을 본영으로 하여 사벌국이라 칭하고 자립즉위 했다. 이후 11년간 이지역을 통치하다 결국 견훤의 침공을 받아 패망했다고 전한다.
글 : 이형우기자 사진 : 정우용기자 //출처 : 매일신문 (http://www.imaei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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