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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단독] 불국사 1910년대 실측도…도면 36장 ‘원형복원 열쇠’

도깨비-1 2009. 4. 20. 09:38
출처 : 문화생활일반
글쓴이 : 한겨레 원글보기
메모 : [한겨레] 석축 돌난간 기둥·청운교 돌계단 난간 없애려다 보존 선회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고찰로 꼽히는 불국사는 20세기초 어떤 모습이었을까. 1910~20년대 일제의 두차례 수리 공사와 1969~1973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이뤄진 대대적인 보수 복원은 고증에 충실했던 것일까. 전봉희 서울대 교수팀이 국가기록원에 방치됐던 일제시대 건축 도면 더미 속에서 찾아낸 불국사 실측 수리도면 36장은 이 의문을 풀 중요한 단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옛 문헌기록 등을 보면, 불국사는 신라 경덕왕 10년(751년) 김대성의 축조 당시 약 2000칸을 자랑하는 대사찰이었으나, 16세기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전소된 뒤 19세기초까지 40여차례 중수하면서 명맥을 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1910년대 실측도면에는, 당시 절의 퇴락이 심해져 대웅전과 자하문 등의 영역과 본전(극락전), 안양문 영역의 두 부분만 남아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웅전 영역의 경우 백운교, 청운교, 그 위 석축들이 실측되어 있고, 목조·석조 건물로는 자하문, 범영루, 다보탑·석가탑, 대웅전 외에 대웅전 서쪽에 하나의 문과 작은 건물로 추정되는 '당(堂)'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당은 대웅전 서쪽 기단에 기대어 담을 두르고 지어 사찰 업무 용도에 썼던 것으로 추정된다.

서쪽인 극락전 영역은 대웅전 영역보다 더욱 변형이 심한 상태로 나타난다. 연화교, 칠보교 위에 통용문(현재의 안양문)이 있고, 이 문과 본전(극락전) 사이에 별도의 건물인 응접실, 주지실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 본전 기단의 동쪽에도 잇대어 하나의 건물이 더 딸려 있었다고 도면에 기록되어 있다. 대웅전, 극락전 부분을 구분하는 석축은 무너져내린 채 경사로와 계단이 놓여 있었고, 대웅전 영역으로 들어가는 문인 자하문 주위의 상부 석축도 무너져 흙 언덕처럼 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제는 1차 수리 공사를 앞두고 사찰 정면 위아래 석축의 돌난간과 난간 기둥, 청운교 등의 돌계단 난간도 모두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가 다시 이들 난간을 보존하는쪽으로 바꾼 사실이 수선 설계도와 그 뒤 수정된 설계도를 비교해 본 결과 드러난다. 도면을 분석한 전 교수는 "일제 당국이 유난히 불국사 석축, 계단의 난간 시설 부분들을 제거할 대상으로 주목한 게 흥미롭다"며 "이런 방식으로 절의 외관을 복원·정비하려 한 의도 등에 대한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건축사가인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도 "불국사는 70년대 복원 당시 극락전, 대웅전 사이 회랑 흔적, 정면 석축 앞의 연못터(구품연지) 등을 복원하지 않아 고증 오류 논란이 지속돼 왔다"며 "발견된 도면들은 이런 논란의 실마리를 푸는 중요한 단서로서 의미가 있다"고 분석했다.

현재 국가기록원에 소장된 일제시대 도면 중 고적 건축과 수리와 관련한 도면은 모두 262매다. 1902년 일본 학자 세키노 타다시가 한국 건축물 조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이래 조선 총독부와 산하 기관에서 1910~1940년대 작성한 도면들인데, 일제 강점기 전통 문화유산에 대한 수리·실측 사업이 진행된 양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고적 도면들의 세부를 보면, 눈에 익숙한 문화유산들이 눈에 띈다. 불국사 전각 뿐 아니라 최근 보수 공사에 들어간 다보탑과 묵서지편 발굴로 학계의 관심을 모은 석가탑 등의 경내 석탑, 주요 시설물 도면도 함께 들어 있다. 이와함께 최근 금제사리기가 발굴된 전북 익산 미륵사터 서탑, 경주 분황사 석탑과 감산사터 3층 석탑, 포석정, 충북 중원 탑평리 칠층 석탑, 지금은 사라진 경북 상주 외남면 석심회피탑(라마탑형 불탑), 서울 도심 원구단에 있다 헐린 석고전 등의 실측, 조사 도면 등도 포함되어 있다. 특히 도면 중에는 1913년 벌어진 평양 보통문 수리공사와 평남 지역의 강서대묘, 쌍영총, 감신총, 동명왕릉 등 고구려 무덤 40여곳, 개성 만월대, 평양 을밀대, 의주 통군정, 함경도 북청성 남문 등 당시 북한 유적들의 실측, 수리 현황도 상당수 담겨 있어 주목된다.

전 교수팀이 발굴한 도면들은 근대 건축물들에 대한 것도 많다. 1910년대 중후반 서울 세종로 광화문 사거리 앞 일대의 도시 가로 도면인 '경성광화문통관유지일람도', 옛 청와대 관저인 조선 총독 관저와 용산 총독 관저의 설계도, 경성제국대학 본관, 중앙시험소청사, 조선총독부 박물관, 조선물산공진회, 조선박람회 행사장 등의 설계 도면 등은 이번에 처음 확인된 것들이다. 이들 가운데 '경성광화문통관유지일람도'는 경기도청, 조선보병대, 헌병대가 세종로 일대에 들어서고 전차 노선이 광화문 사거리 오른쪽으로 치우쳐 경복궁쪽으로 북상하는 경로와 소규모 필지들 구획선까지 표시한 도면으로 일제 강점 초기 서울 도심 거리 변화상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또 근대건축가 박길룡(1898~1943)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서울 동숭동 경성제대 본관(현 한국 문화예술위원회·사적 278호)은 원 도면 확인 결과 후대 내부의 간막이가 변경되고, 동쪽 건물 일부가 증축되는 등 얼개가 변형된 사실도 확인됐다. 대학로의 대표적 근대 건축물인 서울 동숭동 '구 공업전습소 본관'(사적 279호)의 경우 설계도면을 확인한 결과 실제 건물 이름은 1912년 설립된 중앙시험소였으며 공업전습소 본관은 그 이전 이름으로 원래 위치도 현재 사적 건물 뒤편에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밖에 1915년 열린 조선물산공진회, 1929년 조선박람회, 일본 각지의 박람회에 출품한 조선관의 도면, 일제가 서울 남산에 닦았던 조선신궁과 조선 침략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해 현 서울 장충단 공원에 세운 사당인 박문사 설계도 등도 확인되어 건축사 연구의 희귀 사료들을 다수 확보했다. 

이들 도면 발굴·정리 및 해제는 국가 기록원이 주관하는 콘텐츠 구축 2차 사업의 하나로 올 상반기중 해제 자료집이 출간될 예정이다. 그러나, 아직도 보존처리되지 않은 도면이 12000여장이나 남아있어, 도면의 보존 처리와 내용 해제에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날 건축역사학회의 발표회에서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17세기 중엽 효종의 사위 심익현(1641~1683)의 가옥 도면인 '청평위군 평면도'를 비롯한 17~19세기 전통 가옥도면 23건도 공개됐다. 이들 도면은 옛 왕실도서관인 장서각 서고에 소장된 왕실 문서 중 일부다. 도면을 분석한 홍승재 원광대 건축학부 교수는 발표한 논문을 통해 "그동안 거의 볼 수 없었던 19세기 이전의 고건축 실사도면이라는 점에서 전통 건축사와 주거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청평위궁, '변세의 가' '이유명 참판가' 등 사대부가 집들의 내부 칸 구조 뿐 아니라 '군소가옥연접도형'처럼 도로에 면한 중소가옥 78채와 전(가게) 등의 배치 얼개도 구체적으로 담고있어 조선 후기 옛 서울의 다양한 주거 모습을 알려준다. 홍 교수는 "도면을 살펴보면 17~19세기 사대부 집들은 60~70여칸은 보통이고, 최대 180여칸까지 100칸이 넘는 집이 10채에 달했다"며 "궁궐을 의식해 99칸까지만 짓는 것이 허용됐다는 세간의 상식은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 판명된 셈"이라고 말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 사진·도판 제공 한국건축역사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