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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일본의 건축사

도깨비-1 2009. 3. 31. 19:32


일본의 건축사

일본의 건축은 6~7세기 이후부터 계속해서 중국의 영향을 받아 그 형태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섬세하고 정교한 그들 고유의 양식에 장엄하고 엄숙한 중국 전통의 건축양식을 잘 조화시킨 일본은 중국보다 오히려 중국적인 요소를 더 잘 보존시켰으며, 현존하는 근세까지의 건축물은 대부분이 중국의 색채를 띠고 있다.

또한 일본은 20세기 이후 프랑스 건축을 새로이 받아들여 발전 시켰다.

 


일본의 건축은 중국에서 전파된 불교문화와 더불어 종교건축으로서 목구조 양식이 유입되어 그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는 데, 그 초기의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건물은 중국에서보다 오히려 일본에 더욱 많이 현존해 있다.

이는 일본의 승려들이 혼란기를 거치면서도 그들의 건축적 유산을 소중하게 보존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복원하거나 재건할 때 전통을 최대한 고수하였고, 단지 중국에서 특별히 유행이 바뀔 때만 그 변화에 따라 개조 하였다.

일본에는 이들 초기 사원 외에도 중국양식과 일본 민가의 고유 전통이 조화롭게 복합된 중세 귀족의 사가도 몇 개 남아 있다. 또한 일본은 20세기 초 프랑스의 건축 양식-석조 건물의 지붕에 보나 상인방을 사용하여 장식적인 특징을 갖게 하는 구조-을 처음으로 모방하여 시도한 나라이기도 하다. B.C. 200년경까지 모든 일본인들은 죠오밍(繩文)문화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들의 집들은 간단한 형태로 거친 박공구조이 거나 원추형의 초가지붕을 하고 있으며 바닥이 땅 높이보다 낮은 것으로 보아 중국 신석기 시대의 오두막과 같은 원리로 세웠다고 할 수 있다. B.C. 200년부터 A.D. 200년 사이에 일본 고유의 북부 전통이 기원이 불확실한 다른 문화에 의해 대치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야요이(顆生)문화이다. 야요이 문화 속에 지어진 집들은 단지 모형으로써만 알 수 있는 데, 전체가 목재로 건축되었고 바닥면은 땅 높이와 동일하게 세졌다.

이 전통들과는 대조적으로 보나 상인방을 이용한 새로운 건축양식이 6, 7세기 불교 전파와 더불어 한국을 통해 중국에서 일본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그 당시의 양식이 그대로 남아 있는 구조는 오늘날까지 현존해 있는 최초의 중국식 건축물이 된다. 그 중 가장 뛰어난 것은 나라(奈良)에 있는 호오 류지(法隆寺) 사원의 대웅전이다.

일본의 건축양식은 철저하게 중국의 것에 의존하였고 670년대 이후 한국의 중개역할이 중단되자 중국의 건축가 벽돌공, 조각가들이 직접 일본의 수도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이 만들어 내는 기둥, 보, 서까래 등의 구조는 그 특징이 섬 사람들에게 한정된 것이었으며, 오히려 목재 세공의 전통은 중국의 그것 보다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황제의 자리가 바뀔 때마다 그들의 편력에 따라 건물을 부수거나 재건하려는 욕구가 다양해 져 목공들에게 뛰어난 정연함과 측정단위의 정밀함을 갖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궁전 건축에서 구체화된 일본 고유의 디자인과 중국에서 유래된 디자인의 상호작용은 일본의 사원 설계에 특수한 평면과 입면을 창조해 냈고, 일본의 개방적인 발전과 중국의 보수적인 유산이 목조 건축의 새로운 특성을 가능하게 하였다.





[일본의 고유 건축] 신토디자인에서 가장 원시적이고도 성스러운 것 중 하나인 이즈모사당(오른쪽)은 툭 튀어 나온 박공, 박공벽 입구 (중국의 주정면 입구와는 대조된다) 그리고 지붕 마룻대의 균형을 잡기 위한 특수한 형태의 둥근 목재에 있어서 야요이 주택의 모형(아래)와 같은 형태를 갖는다. 박공 서까래의 교차와 돌출은 이제 디자인적인 측면에서 더 이상 원시적이거나 신성한 특색이 아니다. 이 신토사원 디자인 이후의 발전은 바로 이 양식에 중국의 양식이 가미되어 형성되어 간다.








[야쿠시지 사원은 680년에 세워진 것으로 사원의 많은 건물들중 동탑(East Pagoda)만이 남아 있다. 이 탑은 다섯 개의 지붕 대신 세 개의 지붕을 가졌다는 것-호오류지의 탑과 비교해 보자 -과 지붕을 바쳐 주기 위해서 세 개의 매개체가 복원되었다는 것으로 그 시대의 다른 탑과 구분된다. 지면으로 부터 신성한 보석으로 관을 씌운 호쇼까지 이 탑의 높이는 31m 가 된다.]






[콘도(金堂)에서 보이는 비교적 간단한 7세기의 까치발 구조와캔틸레버 서까래는 정교한 손질없이도 처마의 버팀목고 조화를 이룬다.

후에 3층 또는 4층으로 된 까치발 구조의 중심부로 캔틸레버가 들어가게 되었을 때 디자인은 시선에 의해 좌우되었고 건축은 구조적인 것 못지 않게 장식적인 것에 그 목적을 두게 되었다.]




  교토(京都)에 있는 가쓰라궁(桂離宮)   


고대 제국의 수도인 교토주변에서 울창한 산림으로 둘러싸인 곳에 자리 잡은 리큐는 외떨어진 주거지로 그 안의 가쓰라궁 은 세속적이고 비공식적인 전통이 가장 잘 나타난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다례(茶禮)의 대가이자 건축가인 고보리 엔슈(小堀遠州)가17세기 초에 세운 것인데, 그는 전에 시도되었던 그 어떤 것보다 큰 스케일로써 그의 이상이었던 전원풍 의 단순성과 회화적인 특성을 표현해 보고자 했다.

중요한 세 개의 건물을 구성하는 고쇼잉(古書院), 중쇼잉(中書院), 그리고 신고덴(新御殿)중 고쇼잉(古書院)은 좀 더 의례적 인 쇼잉(書院)양식으로 되었고 나중의 둘은 좀 더 원시적인 스키야(數寄屋)양식으로 되었다.

14세기부터 점차 도시 궁전의 지나치게 장식적인 화려함을 거부하고 세련된 위엄을 선호하게 되었다. 따라서 건축가들은 디자인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러 운 환경과의 조화를 중시하기 시작했다.

스키야는 농가와 산의 작은 오두막에 그 기원을 두는데 그 심미성은 차를 위한 공간인 다옥(茶屋)에서 두드러진다. 가쓰라의 건물들은 삼각형의 가벼운 목재로 처마버팀목에 이용하고, 기둥, 까치발, 기둥 밑의 받침돌, 중국식의 복도 등을 간단화하여 평평한 벽으로 마감하였다.

방들과 베이(기둥과 기둥사이의 공간)들은 볏짚으로 만들어진 많은 다다미로 구성 되었고 이 다다미는 모든 계층의 집에서 앉거나 눔는 공간에 사용되었다.

목재는 평평한 곳에 쓰였고 때대로 그 목재의 껍질이 그대로 남아있기도 했다. 비례의 아름다움과 평평한 자재의 편안함이 바로 그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박공벽에 세워진 베란다-접근하기 가장 자연스럽고 눈길이 가는 장소-는 주택과 정원 사이를 부드럽게 연결시켜 준다.

초기 건물의 견고한 격벽은 반투명의 종이로 싸인 미닫이 판으로 되어 있다. 미닫이문은 출입구에 반쪽 문이 들어 갈 공간을 필요로 한다.]





[가쓰라궁(桂離宮)은 주택과 정원을 결합시켜 스키야의 이상을 가장 시적으로 실현시킨 것이다. 이곳의 정원은 모든 정원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손꼽을 만한 것이다.]




[쇼킨테이 누각의 정면입구는 다른 건물에서와 마찬가지로 화려한 궁전의 풍경화를 벽에 그려 놓은 듯 자연스러운 정원의 경치를 보여준다.]




. 제1영빈실
2. 제2영빈실
3. 다도실
4. 놋쇠 화로를 두는 곳
5. 다도에 쓰일 물을 보관하는 곳
6. 도꼬노마



[소나무로 만든 하이프의 누각이라고 불리는 쇼킨테이는 13세기 이후 번창해 왔던 차노유 의식이라는 다도에 의해 내부가 구분된다.

도꼬노마는 가장 엄숙한 안락을 주며 그 방 특유의 아름다운 구조와 장식은 묵상을 위해 놓여진 꽃과 예술작품으로 한층 돋보인다.

다도는 무엇보다도 침묵을 필요로 하며 그 곳은 인위적이거나 세속적인 생활에 대해선 생각할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금의 누각이랄 수 있는 긴카쿠는 교토에서 가장 유명한 볼거리 중 하나로서 관목이 무성한 연못가에 세워져 있다. 이것은 1397년에 아시카가 장군 요시마쓰(義滿)가 그의 기타야마(北山)궁과 잘 아울리도록 세웠던 것이다.

요사미쓰 사후, 이 건물은 성스러운 사슴 울음의 사원 이라는 뜻의 로쿠엔지(桂苑寺)라는 이름으로 불교의 사원이 되었다. 이 누각은 세 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모두가 넓은 치마 밑으로 열린 창을 갖고 있다.

긴카쿠의 구조, 위치 그리고 빨려드는 듯한 친근감은 모든 역사적인 건물 중 일본인의 가슴에 가장 귀중 하게 느껴지도록 한다.(불행히도 긴카쿠는 1951년 불에 탔으나 원래 그대로의 모습으로 완벽 하게 재건되었다.)]




  사월, 성 그리고 농가   


헤이안(平案)과 후지와라(藤原)시대였던 784년부터 1185년까지의 기간에 일본의 건축도 중국으로부터 독립하여 발전하였다. 신토 규율의 절대성과 불교신앙의 숭고함이 전통적인 고유의 배치를 근본으로 하는 개인의 저택과 불교사원의 디자인 에 반영되었는데, 불교사원은 당시 중국에서 일고 있던 장식적 정교함을 이용하지 않고 당나라 양식을 더 확대시킨 것이 었다.

도시들은 중국의 관례에 따라 넓은 도로와 중앙의 궁터를 갖는 장방형으로 배치되었고, 성내의 건물들 역시 장방형 의 계획을 즐겨 이용하였다.

그러나 지배계층에서는 일본 고유 구조의 숭고함을 중시한 반면, 산만하게 디자인된 하층민의 거주지인 베쏘는 중국양식의 엄격함을 약화시켰다. 가쓰라궁은 이런 경향으로는 세속의 절정을 이루었고 묘도잉은 종교적 건물과 비슷하게 풍부한 창의력을 보여 주었다.

1616년부터 1868년까지 이어졌던 시민 전쟁기는 도쿠가와의 막부시대를 열게 했고 또한 그 기간 중에 지어진 석조 건물 들이 근세 이전 일본에서 유일하게 큰 규모로 지어진 창조물로 알려 진다.

그것들은 많은 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커다란 돌로 세워졌고 기초 받침대는 흰 칠을 한 두꺼운 벽이 높고도 완만하게 경사지어 있다.

이때부터 이어지는 여러 건축물이 이렇듯 견고한 방법을 강화하게 된 것은 시민 전쟁기에 출현하게 되었던 대포에 대응할 수 있는 튼튼함이 요구되었기 때문이고, 따라서 건축적인 품위보다는 접근에의 어려움과 방어력이 중시되었다.

이러한 사원이나 성의 특징적인 발전 뒤에는 평평한 목조 벽과 경사가 급한 박공 그리고 높이 솟은 초가지붕의 형태를 갖는 농가가 있는 것이다.





[흙으로 만들어진 높고 경사진 벽은 성 중심부의 탑을 둘러싸고 있다. 전체적인 건축은 성을 견고하게 지키기 위해서 디자인되었다.]




[히메지(姬路)성의 탑은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시민전쟁의 주인공들이 세운 것으로서 요새화된 거주지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이 된다.

석재를 이용하여 높이 세워진 이 구조물은 중국과 다른 어떤 새로움-중국식의 너새가 있는 박공과 곡선처리된 처마를 그대로 이용하면서 각 층을 겹겹이 쌓아놓는 방식-을 시도하였다.]





[뵤도잉의 불사조관] 일본의 불교건축 중 가장 뛰어난 이 건물은 교토 현에 있는 전원풍의 우지마치에 당시 귀족이었던 후지와라 요리미치가 자신의 전원주택인 베쏘로 세운 것이다.

그것은 1053년 뵤도잉 사원의 아미다관으로서 신선시하게 되었는데, 정원과 연못에 모여든 새들로부터 연상하여 불사조의 뜻을 가진 후도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그것은 커다란 조초로 조각된 인상을 준다. 정면의 입면은 그 모형에서 볼 수 있듯이 중앙의 누각, 양측으로 이어진 회랑, 모퉁이의 누각 등이 중국 당시대의 궁의 특성을 재현해 주고 있다.

지붕에 기대어 있는 회랑은 곡선처리된 처마의 윗 부분을 반향한다. 뒷쪽의 회랑에는 폐쇄된 공간에 세 줄의 서까래가 놓인 반면, 양측의 회랑에는 두 줄로 이어진 서까래가- 아랫줄을 정교하게, 윗줄은 간단하게-이 분할을 반복한다.

이 모든 것이 당나라의 디자인을 명확하게 반영한 것이다.





[토도이지 사원의 남대문은 1199년에 지어졌는데, 8세기 사원의 특색을 고수하려는 경향이 있다. 정면의 형태는 일반적으로 호오류지 사원과 비슷하나 서까래의 양식에는 처마를 버팀목으로 받치는 새로운 방법을 쓰고 있다.]




[농가는 중국전통에서 벗어나 일본인의 생활에 적합하도록 변형된 형태로 세워졌다. 그 디자인은 지난 15세기 동안 그 균형이 조직화된 것을 제외하고는 변화한 것이 거의 없다.

입구와 서비스 공간은 그 바닥이 지상의 높이와 동일하며, 바닥재로는 전통적인 방법으로 다진 흙을 이용하였고 나머지 공간은 30~60cm 높게 세워졌다.

방과 방 사이에는 미닫이문을 설치 했는데, 가쓰라 같은 궁에 이런 농가양식을 모방하여 그 조화의 아름다움을 실현시킴으로서 더 널리 이용되었다.]



출처 : 國家와 民族을 ♡하는 老宿者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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