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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중국의 건축사

도깨비-1 2009. 3. 31. 19:32


중국의 건축사

동아시아에 널리 퍼진 목조건물의 전통이 생긴 근원이 중국이긴 하나 중국에서는 건축이 예술의 모태가 된다고 주장하기 는 힘들다. 건축은 회화나 장식의 발명에 비해 탁월한 편은 아니지만 외부에서 보여 지는 그 질서와 균형의 원칙을 보면 다른 중국 예술의 질을 짐작할 수 있다.

기둥과 보의 건축양식은 BC 23,000 년경의 신석기 시대에 그 유래를 찾을 수 있 다. 그것은 황하강 계곡의 종교로 한정지어 졌다. 중국 남부와 동남아시아에서는 말뚝 위에 세워진 목조건물의 전통이 오늘까지 지속되고 있는 반면 중국 북부에서의 최초의 거주지는 사실상 지하 동굴이었다.

초기부터 벽돌이 사용되었던 것은 아니고 대신에 벽과 기초는 다져진 흙으로 세워졌다. 중국 중부에는 커다란 목재가 드물었기 때문에 건축가는 장방형의 평면에 기둥간의 간격을 넓게 하는 경제적인 방법을 써야 했다.

기둥들 사이에는 대문과 다른 출입구들을 자유로이 개조할 수 있도록 회반죽, 거적, 창살 따위의 가벼운 벽을 세웠다. 한(漢)시대 이후에는 지붕의 정교함과 기둥머리위에 버팀목에 그 관심이 모아졌다.석조의 원통형 등근천장은 AD 1세기의 무덤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는데 목조건축물의 형태에서 모방한 것이다.

지상에서 는 벽돌이 장방형의 성벽에 연결된 소박한 주거지와 건물에 이용되었다. 이 건축물들은 지붕의 기와와 회반죽으로 바른 벽을 제외하고는 전체가 목재를 이용하여 이상적으로 지은 것이었다. 쿠빌라이 칸(Kublai Khan)의 궁전과 그 다음에 이어 지는 명나라의 것처럼 벽돌과 석재 건물이 매우 우수했을 때는 그 건물들의 비례와 장식적 요소들이 건물 정면 혹은 그 사이에 위치한 목조기둥의 영향을 받아 결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둥들로 구성된 목조건물의 일정한 비례는 그 당시 모들의 문제를 제기하게 한다. 복잡한 까치발 구조의 생산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그 때 목공들에게 있어서 넓이와 길이 또 길이와 수직적 높이 같은 것의 비율이 기초단위의 배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런 사실은 초기 서까래의 수직적 폭을 통해 알 수 있다. AD 1103년에 이계(李誠)의 ‘건축의 방법과 디자인’이라는 영조법식(營造法式)이 공식적으로 공표되었다. 이 책은 기본 모들을 이용한 설계, 건축법을 세워놓았고 제국 전체를 위한 기둥의 치수, 간격 등 의 비례에 대해 기술하였다.

영조법식은 건축물의 기본 치수와 동물, 꽃도안, 조각장식등도 기록되어 있어서 건축가들의 창문, 발코니 주변 등에 매우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이것은 바로 송(宋)의 장식예술의 보고가 되었다. 17세기 청(淸)왕조에 와서는 궁중에서 서까래의 수평적 폭을 새로운 모듈 하에 제정하였다.

그 기교는 더욱 커진 기둥의 모양에서 볼 수 있는데 착시현상을 보완하기 위해 기둥의 중하부를 부풀리는 동시에 안쪽으로 살짝 기울여 주었다. 궁전의 디자인은 한(漢)말기에 확립되었는데 그 후 수세기 동안은 중국 불교도들이 그들의 사원을 궁전의 형태에서 빌려 오는 형식을 취하였다.

사원의 전형적인 배치는 남향의 장방형으로 그 안에 대문, 통로 그리고 남북 축을 따라 하나하나 연결되는 건축물들이 들어서 있다. 그러나 궁전의 대칭적인 구도는 사원의 종교적인 입장이 대립되었다. 사원의 대웅전-파고다와 거의 동등한 위치로 규정된 사원의 중심부 -과 최초의 계획안은 사원을 궁전과는 매우 다르게 적당한 간격으로 나란히 위치시켰다.


  보나 상인방을 이용한 건축양식의 기원   




 
[당(唐)의 망루]
당(唐)시대 건물의 벽 디테일은 전형적인 8세기의 건축을 보여준다.
대문과 모퉁이 탑은 중국의 성 벽 중에 가장 특징적인 부분이었다.


하남(河南) 북부 안양 근처에 있는 상(商) 왕조의 수도 발굴에서 사원과 궁전이 모두 초가지붕이며 목재기둥을 사용했었다 는 것을 알 수 있다. 연속적인 지붕이 있었던 것을 보아 목재지붕의 설비는 신석기시대의 작은 집에서 보다 상당히 더 잘 되었음 직하다. 이미 보나 상인방을 이용한 건축양식의 몇몇 형태가 생겼다.

건물들은 다진 흙으로 만든 약 90cm높이의 주춧돌로 세워졌고 입구는 측면이 아닌 정면에 있었으며 기둥 사이의 공간도 가장 가벼운 재료로 채워졌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학적으로 중요한 기둥머리와 처마의 서까래는 처마의 보를 받치는 간단한 기둥머리를 보여주던 BC 5세기 이전으 로 거슬러 올라가는 고고학적으로 매우 힘든 일이다.

그림에 나타난 지붕의 구조에서는 기둥의 아래 열과 윗열이 수직적 으로 배열되지 않아 복층으로 오인될 수 있으나 4~5세기경까지 존속되는 흙벽이 그에 대한 이해를 가능케 한다. 이 벽은 경사진 지붕과 연결되고 그 아래는 회랑이 지나가게 구성되어 있다. 중앙의 흙벽이 가장 높이 올라간 위엄 있는 의식적인 건물의 건축방법은 적어도 한나라(BC 1세기~AD 1세기)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생각된다.

그 후에 커다란 기둥으로 세워진 건물의 베이(기둥과 기둥 사이)가 지붕으로 덮여 졌으리라 본다. BC 3세기부터 혹은 그보다 터 일찍 지붕이 반원형의 도자기 기와로 덮여 졌고 매우 다양한 장식적 도안을 파내서 둥글게 마무리 지었다. 한나라 후기의 도자기를 보면 기둥머 리나 받침나무, 정교한 지붕 마룻대에서 솟은 까치발이 한 선으로 장식된 건물이 나타나 있다.

여기서 지붕을 올리는데 사용된 보의 형태는 짐작으로 밖에는 알 길이 없으나 아마 당(唐)과 송(宋)조의 고전적 양식이 답습되었을 것으로 생각된 다.





[중국의 지붕건축]
지붕의 가장 현저한 특징은 삼각형의 형태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서깔 아래 버팀목의
위치를 배가시켜 기둥의 수직적 하중을 확실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좁은 처마를 가진 
고대의 디자인(1)을 확대시킬 수는 없었으나(2) 기둥의 수적 증가는 내부를 복잡하게 
하고 따라서 외부기둥의 횡적 공간이 줄어든다. 이런 문제는 각각의 기둥에 받쳐진 
버팀목을 증가시키므로써 해결될 수 있다.(3) 이렇게 하기 위해 처마 서까래와 들보를 
받치고 있는 까치발은 둘 또는 그 이상의 층으로 올려졌고 아래쪽 까치발이 차례차례로
지탱해주도록 구성되었다. 가로, 세로 모두 돌출한 다발 기둥의 까치발은 역 피라미드
처럼 위쪽이 더 넓어지게 되었다.(4) 8세기부터 들보에 양쪽끝이 고정된 외팔보가 처마
기둥으로부터 더 멀리 떨어진 지점에서 다발기둥의 까치발을 지나 더 많은 까치발을 지탱
하도록 만들어졌다.





[한나라 말기(AD 1세기와 2세기)의 무덤에서 발굴된 도기모형에는 지붕 디테일만 그 시대의 목조건축을 답습한 회반죽 벽돌담으로 된 건물이 나타난다.

이 농가는 방어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창문 없는 벽으로 된 건물이었다.]





[소주(蘇州)호수의 파고다]
중국의 북부와 동부에 널리 퍼진 벽돌탑의
하나로 파고다들은 11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
세워진 불교사원에 속한다.







[대명궁]
8세기의 궁전으로 재건한 이 궁궐의 디테일은 그 당시 회화에서 따온 것이며 전체적인 평면은 발굴된 유적에 의한 것이다. 벽 안쪽을 따라 만들어진 기둥이 있는 회랑은 모서리 탑과 문의 누각을 이어준다. 동쪽편에 따로 떨어져 있는 탑을 제외하고 전체적인 평면은 남북축을 따라 대칭을 이루었다. 이 당나라의 디자인은 후에 외형을 확대시키고 다듬어 만들어진 쿠빌라이칸의 자금성의 모델이 되었다.


  북경의 자금성   



1272년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당도했을 때 쿠빌라이는 중국 남부의 송(宋)제국을 정복하고 2개의 수도를 건설하고 있었다. 북부의 수도는 만리장성을 지나서 있는 상도(上都)였고, 남부의 수도는 중국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이상적인 형태로 남아있는데 왕의 도시, 북경이라고 한다.

북경의 장방형 평면은 남향으로 나있는 대문, 남북으로 이뤄지는 축과 중앙 궁궐 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은 전한시대에서 유래된 것이다. 쿠빌라이의 북경은 전 인구를 이 성안으로 수용하기 위한 목적 이 담겨 있었다. 왜냐하면 그 성벽 자체가 그 성을 지키는 군인이요 무기였기 때문이다.

자금성이라는 궁궐은 북경을 확실하게 한정하는 가장 바깥쪽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벽의 출입구는 그 후 발굴 작업이 진행될 때 최초로 발견되었지 만 지금은 단지 몇 개의 혼적만이 남아 있다.

북경의 외벽은 이제 현대적 도시로 변해 찾아볼 수 없고 남아있는 것은 거대한 자금성뿐이다. 자금성에서 지금까지 현존해 있는 것은 정밀한축과 대칭구조의 계획위에 약 1.6km까지 확대되는 거대한 문, 광장, 회당 등이다. 천안문(天安門)을 지나 북쪽으로 가면 자금성의 경관 중 빼놓을 수 없는 오문(午門)이라는 정문에 이르게 된다. 5개의 대리석 다리를 건너면 그 다음의 궁정으로 연결된다.

먼저 주 경내의 위엄 있는 누각이 보이는 데 그것을 태화문(太和門, 태평문)이라 한다. 다음으로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태화전(太和殿 태평궁)이 연결되는 데, 그곳에서 황제가 궁정 아래 머리를 숙이고 모여선 관리들을 접견하였다. 이 궁은 3층의 대리석 주춧돌위에 세워졌는데, 그 주변이 황제가 옷을 갈아입거나 휴식을 취할 때 이용되었던 2개의 뒤채로 둘러싸여 있다.

그곳을 지나면 황제의 거주지로 이용되었던 안뜰이 자리 잡고 있다. 넓게 이어지는 공간에서 보여주는 지붕선의 기상과 그 계획의 장대한 논리 성 외에 명나라 건축의-경향을 2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목재기둥과 벽돌, 대리석과의 조화이고, 다른 하나는 다양 한 색채와 정교한 조각으로 장식된 계단과 난간, 처마이다.

처마 끝에는 여러 색의 서까래로 연속된 기둥머리가 그 기원이 갖는 구조적 기능을 상징화하고 있다. 오늘날까지 이르는 주택의 장식은 18세기 황제 건륭(乾隆)의 덕이라 할 수 있다.







[지붕의 선단석과 처마선은 매우 흥미를 갖게 하며 다른 모든 궁정은 이와같이 연속 되는 건축물들로 이루어졌다.]





[이 궁의 주거 부분에 딸린 궁정은 누각의 스케일과 공간이 작아져 마치 보통 집안과 같은 친근감을 준다.]







[앞뜰에 놓인 5개의 대리석 다리를 지나 자금성에서 처음 보이는 고도로 장식된 건물은 태화문(太和門)이다. 앞뜰에 있는 대문의 양끝은 동과 서에서 궁정을 둘러 싸고 있는 각 실에 의해 만들어진 양측면의 누각 그리고 회랑과 모풍이 누각에 까지 연결되어진다. 대리석 난간은 명나라 초기에 개조한 것이고 청동을 입힌 수호사자는 황제 건륭(乾隆)이 놓은 것이다.]





[중국문양과 장식]당(唐) 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중국 도자기의 특징적인 형태가 건축에 있어서 유광도기로 나타난다. 유명한 용벽(Dragon Wall)은 가장 훌륭한 도자기 장식품이며 꽃과 꽃잎의 문양은 벽의 하단 구석을 메우거나 궁정을 구분짓는 벽의 원형양각에서 볼 수 있다. 지붕의 박공 끝에는 전설 속의 창조물을 표현한 작은 입상들이 줄지어 있다.


출처 : 國家와 民族을 ♡하는 老宿者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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