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문화생활일반
글쓴이 : 데일리안 원글보기
메모 : [데일리안 배강열 칼럼니스트]꿈속 같은 기억이 있다. 푸른 녹우가 폭풍으로 변하고 밤새 폭우를 쏟아내었다. 나는 일행을 만나기 위해 밤새 차를 몰아 강원도 영월로 향하는데 고속도로에는 사나운 일기로 차가 거의 다니지 않았다. 너무 세차게 내리는 비로 운전 중에 시야가 트이지 않은 두려움보다 칠흑 같은 어둠 속, 인적과 차가 끊긴 도로에 혼자 있다는 것이 공포 그 자체였다. 늦은 밤, 도착한 여관방에서는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창 밖 시골집 양철지붕으로 비 떨어지는 소리가 너무나 앙칼진 리듬으로 내 영혼을 불러내었기 때문이다. 철 이른 태풍이었다. 다음날 인근 동네들이 수몰된 것을 보고 내친걸음이라 하여 예정된 답사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발길을 돌려 다시 남부지방으로 방향을 돌렸다. 이틀간의 연휴가 이렇게 태풍으로 망가진 것에 대한 보상이 필요했다. 해인사를 중심으로 한 남부지역 답사에 다시 초점을 맞추어 남하했다. 그런데 이 폭우는 우리를 따라 같이 남하하면서 이틀 내내 길을 가로막았다. 어찌하여 대구 인근 현풍에 다다라서 갑자기 도동서원이 생각났다. 비가 오면 어떤 유적을 보는 것이 좋을까? 생각하다 돌은 물에 젖은 모습을 보아야 제격이라는 사실을 떠올린 때문이다.
논 사이 길을 따라 차를 모는데 장대비는 시야를 가렸지만 무성한 논의 녹색이 싱그러운 계절이었다. 이윽고 다람재 위에 차를 세우니 낙동강 가에 자리 잡은 도동서원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서원 앞의 오래된 은행나무가 싱싱한 자태를 뽐내고 물안개가 마을을 감싸 안는 모습이 마음을 들뜨게 했다. 여름 도동서원에서의 빗속 답사는 온몸이 비를 맞아 젖는 노고에도 불구하고 이번 가을 다시 나를 불러들이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올 여름이 지나가면서 언제 은행나무 잎이 가장 아름답게 물드는지를 셈하며 살았다. 경기도 용문사, 청도 적천사, 영동 영국사, 외암마을 맹사성 고택 등이 내가 아는 은행나무가 아름다운 곳이다. 이곳 도동서원의 은행나무는 그만큼 오래되거나 키가 큰 것은 아니지만 옆으로 벌어진 튼실한 가지나 위풍당당함이 다른 유명한 은행나무에 뒤지지 않는다. 또한 앞을 흐르는 낙동강과 서원 사이에서 가장 알맞은 풍경을 연출하는 자태를 가지고 있어서 좋다.
어느 곳이 좋다는 표현을 하고 느낌을 가질 때는 이유가 있다 내가 다녀본 서원들 중 병산서원과 더불어 이곳 도동서원이 기억 속에 가장 남는 곳이다. 두 곳 모두 누대(樓臺)와 강당, 사당의 순서로 짜인 산지형 서원의 형식을 빌려 배산임수가 잘 되는 터에 지은 곳들이다. 만대루를 앞에 두고 대청마루에 앉아 병풍처럼 둘러싸인 병산을 바라보는 병산서원은 우리나라 서원 중 제일이다. 휘감아 도는 강의 고운 모래톱과 더불어 고적한 느낌의 병산서원과 비슷한 지형에 자리 잡은 곳이 도동서원이다. 다만 병산서원보다 강에서 좀 더 떨어진 거리에 자리를 잡고 있고 앞은 들녘으로 툭 트여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조선 말기에 건축된 외삼문인 수월루(水月樓)가 병산서원의 만대루의 격에 미치지 못함도 아쉬움이다. 잠시 수월루 위에 앉아 강가를 조망해 보아도 만대루 같은 느낌이 나지 않는다. 앞의 강은 보이지만 누각 자체가 전체 건물터에 비해 너무 높고 둔중한 느낌이어서 부자연스럽다.
그러나 도동서원은 다른 서원 그 어느 곳도 갖지 못한 독특한 미학을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하다. 다름 아닌 건물의 구성에 사용된 돌이 주는 아름다움이다. 이곳에서 나는 잡석을 원형대로 혹은 다듬어 여기저기 사용한 모양새가 예사로움을 넘어 하나의 미학적인 요소를 완성단계에 올려놓고 있다. 나는 가을날 이곳의 은행나무와 더불어 그 돌들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강으로부터 형성된 낮은 구릉에 지어진 서원의 가장 앞자리에는 잡석기단위에 수월루가 세워져있다. 질박하고 낮게 몇 단으로 나누어 쌓은 기단은 멀리서 보면 마치 논두렁처럼 소박하다. 수월루를 이어주는 담장과의 어울림도 그만이며 오른쪽 담장 아래로부터 서원 바깥으로 이어진 돌로 만든 물길도 대충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어서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기단 가운데로부터 외삼문이 나 있는 수월루 오르는 돌계단도 대충 비슷한 크기로 다듬은 돌을 잇대어 만든 것으로 오랜 세월동안 빛바래고 날카롭지 않게 깎인 모양이 밟아 오르는 사람을 마음 편하게 하는 구석이 있다.
수월루 지나면 사방이 담장으로 막힌 좁고 가파른 공간이다. 강당인 중정당(中正堂)이 있는 마당에 들기 위해서는 환주문(喚主門)을 통해야하며 그곳 앞에는 또 하나의 돌계단이 있다. 넓지 않은 10단의 계단이다. 그러나 사뭇 도포자락 손으로 여미지 않으면 소맷돌에 옷자락이 쓸릴 것 같다. 계단 첫머리의 소맷돌에는 연꽃 봉오리가 소담하게 조각되어 있는데 사시사철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처염상정(處染常淨), 연꽃의 풍모를 닮는 선비가 되라는 경구처럼 느껴진다.
환주문은 '주인을 부르는 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아마도 강당으로 들어서며 자신이 이곳에서 진리를 깨닫기 위한 주체자임을 환기시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가 하는 어렴풋한 해석을 한다. 환주문은 반드시 고개를 숙여야만 들어설 수 있는 낮고 좁은 사주문(四柱門)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는 필시 경건한 마음으로 강학의 공간에 들어서야함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또한 여닫이문을 세워 놓는 정지석이 필요 이상으로 큰 꽃봉오리 형태로 박혀 있는데 이 또한 이곳을 들어서는 선비들이 낮은 문을 통해 들어오면서 몸가짐과 걸음걸이를 조심하도록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쨍한 햇살에 꽃봉오리 형태를 고스란히 드러낸 정지석이 예사롭지 않게 보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경구 한마디도 이렇게 돌 하나에 예술적 감성을 얹어 표현한 슬기로움에 지긋한 웃음이 난다.
환주문의 지붕에는 과대하게 큰 사모형태의 절병통이 얹혀있다. 문을 만들 때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빗물이 지붕으로 스미는 것을 막는 용도라고 한다. 마치 라마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공주 마곡사의 오층석탑 상륜부를 연상케 한다. 이렇듯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몸가짐에 겸손함을 가르치는 환주문이 작고 낮은 또 다른 이유는 강당인 중정당에서 수월루 넘어 낙동강을 조망하는데 있어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함도 있다고 한다.
환주문을 중심으로 둘러 싼 담장은 도동서원의 또 다른 볼거리이다. 담장은 자연석을 정렬시킨 지대석 위에 자연 막돌을 쌓고 그 위에 암키와를 5단으로 줄 바르게 놓아 그 사이에 진흙층을 쌓아올리고 1m 간격으로 수막새를 엇갈리게 끼워 넣었다. 암키와와 수막새를 끼워 넣는 이유는 음양의 조화를 통해 생명력을 불어넣고 장식성을 최대로 살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곳의 담장은 전국 최초로 토담이 보물로 지정된 곳이다.
마침내 중정당이 있는 마당으로 들어서면 좌우측으로 서재가 있는데 동재를 거인재(居仁齋), 서재를 거의재(居義齋)라 이름 붙인 것을 보면 유교의 중심 사상인 인의(仁義)를 강조한 듯싶다. 환주문에서 부터 강당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까지는 납작하게 다듬은 돌을 깔아 사람 하나 지날 만한 돌길을 내었다.
특이한 것은 이 돌길과 중정당의 중앙 부위의 축대가 만나는 곳에 돌출된 돌거북의 머리가 조각되어 있는데 앙다문 입 양쪽에 송곳니가 날카롭고 길게 나와 있으며 이마에 잔뜩 힘을 준 사나운 형상이다. 이 돌거북의 의미는 강학 공간인 중정당 마당에서는 뛰지 말고 조용히 하라는 묵언의 가르침을 주는 상징이며 중앙 길은 스승만 다닐 수 있는 길이니 함부로 침범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무엇 하나 말로 하지 않고 상징으로 만들어진 조형물의 속뜻을 새기기가 쉽지 않다.
중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1605년 완공되었으며 서원을 감싸는 담장과 더불어 보물 제350호로 지정되어 있다. 단아한 건물이 주는 맛도 맛이거니와 이곳을 찾는 대개가 다 그렇겠지만 중정당 건물이 얹힌 기단이 특이하고 눈길을 끈다. 기단길이17m, 높이가 1.5m에 이르러 건물의 위엄을 더해주는 것 외에도 자세히 살펴보면 특이하고 재미있는 구성을 하고 있다.
우선 기단은 모양대로 잘 다듬은 돌을 격자를 맞추듯이 쌓아 올린 후 판석을 깔아 덮개돌인 갑석으로 삼았으며 맨 위에는 좀 더 깔끔하게 한 단의 갑석을 더 얹었다. 마당 가운데 돌거북을 중심으로 기단 양편으로 계단이 있으며 기단은 사각형부터 12각형의 돌들을 조각보를 잇듯이 돌 사이의 간격에 빈틈이 없게 정성으로 쌓아올려서 멀리서 보면 은은하고 조금씩 다른 색감을 가진 돌의 질감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기계적으로 똑 같이 자른 돌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돌을 모서리만 다듬어 쌓는 데는 많은 시간과 정성이 들었을 것이되 후대에 남겨진 석면을 보는 이는 그 정성의 크기를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12각형의 돌이 석축 기단에 사용된 예가 우리나라에서는 이곳 도동서원이 유일하다고 하는데 마치 남미 잉카제국 최후의 유적인 마추픽추의 성벽을 보는 것과 다름이 없다.
기단 전면 갑석 바로 아래에는 물고기와 여의주를 문 네 마리의 용이 머리만 내밀고 있는 조각이 튀어나와 있다. 이곳이 낙동강의 흐름 중 강폭이 좁아지고 물이 돌아나가는 곳이라 수해가 잦았던 탓에 수재를 예방하는 액막이용으로 만든 것이다. 또한 용은 물의 신이라 화재예방의 의미도 담고 있다. 마치 이는 절집에서 당우의 처마 밑에 설치한 용두를 보는 듯 하며 도동서원에 설치된 용머리는 사납지 않고 각각 조금씩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아쉬운 것은 네 마리의 용 중 왼편에서 두 번째 것만 원래의 것이며 나머지 세마리의 용은 도난당한 후 새로 만들어 끼워 넣은 것이다.
또 양쪽 계단 부근에는 각각 다람쥐가 큰 꽃송이와 함께 조각된 돌이 박혀 있다. 정면에서 보아 오른편엔 오르는 모습의 다람쥐가 왼편에는 내려오는 모습의 다람쥐가 부조되어 있다. 이는 향교, 서원 등에서 동입서출(東入西出)이라는 기본질서를 표현한 것으로 여긴다. 이 두 다람쥐 부조가 새겨진 돌도 잃어버렸다 다시 찾아 제자리를 찾은 것이라고 한다.
한동안 기단 석축 앞에서 자리를 뜨지 못하였다. 미색부터 옅은 갈색, 짙은 갈색, 쑥색, 그리고 한 돌에서도 부분적으로 빛깔이 다른 여러 돌들이 이루는 색채의 조화가 주는 아름다움, 규칙성이 없이 쌓여 있으나 질서를 무시하지 않은 단정함, 화려하지는 않지만 멋을 부린 기단은 두고두고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재일 것임에 뿌듯하다.
중정당을 돌아 사당 앞으로 조성된 후원으로 발을 옮긴다. 봄, 여름 동안 피었던 자리에 새로 피었던 가을꽃들도 지고 있다. 배롱나무 잎이 적당히 물들고 감국이 시들고 있으며 쑥부쟁이 몇 송이 햇살에 타고 있다. 후원 가운데 사당으로 오르는 내삼문 앞 계단도 환주문처럼 좁고 가파르기는 마찬가지다. 이 계단 입구에는 태극 문양을 새겨 놓았다. 또한 내삼문 앞에 이른 자리에는 중정당 앞처럼 돌거북의 머리가 하나 놓여있다. 아마도 사당 들어가는 몸가짐을 바르게 하라는 뜻일 것이다.
그로부터 세 단 위, 마지막 계단의 면에는 꽃 모양 하나가 음각되어 있다. 목련이 만개하여 처연히 떨어진 모습 같기도 하고 배꽃 같기도 하다. 하나의 학문을 이루고자 함이 마음에 씨를 뿌려 꽃을 맺게 하는 과정과 같다면 이 꽃은 도동서원으로부터 배출 된 선비가 환헌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 선생의 영전에 예를 올리며 마음속에 키운 어사화는 아니겠는가? 또 아니면 이른 봄 고고한 선비의 냉철한 머릿속같이 맑은 빛으로 피는 매화라 해도 좋을 법하다.
서원의 가장 높은 위치에 올라 내삼문과 환주문을 연결한 사면의 담장과 그 속에 자리한 중정당을 굽어본다. 꽃담이 지형의 높낮이에 적당히 맞추어져 둘러쳐진 모습이 엄격한 규율 속의 자율적인 운치를 더한다. 하늘과 왼편 관리동 뒤의 은행나무, 담과 어우러진 모습이 영락없는 가을이다. 가을 어느 날, 낙동강 물줄기를 따라 흘러온 내 자신이 햇볕 고운 도동서원에서 돌의 향연에 주빈으로 참석한 기회를 가진 것이 행복하다. 돌들은 가을 햇살에 온전히 제 빛들을 드러내며 잔치를 하고 사람은 그 미학을 쫓아 마음도 몸도 분주하기 짝이 없다.
도동서원은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함께 동방5현의 한사람으로 추앙되는 한훤당 김굉필(金宏弼)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원래는 1568년현풍 비슬산 기슭에 사우(詞宇)를 지어 향사를 지내오다가 1573년 쌍계서원(雙溪書院)으로 사액 되었으나 임란에 전소하였다. 그후 1605년(선조 38)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지금의 자리에 창건되어 김굉필의 위패를 모셨다. 1607년 ´도동´(道東)이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1678년(숙종 4)에 정구(鄭逑)를 추가 배향했다. 경내의 건물로는 김굉필과 정구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祠堂), 원내의 여러 행사 및 학문의 강론장소로 사용한 중정당(中正堂), 유생들이 기거하던 거인재(居仁齋)·거의재(居義齋) 외에 수월루(水月樓)·환주문(喚主門)·내삼문(內三門)·장판각(藏板閣)·고직사(庫直舍) 등이 있다. 일부 건축물이 보물 제350호로 지정·보존되고 있다.
이 서원은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없어지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매년 2월과 8월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이밖에 전라북도 부안군, 황해도 송화군, 충청남도 천안군에 각각 김구(金坵)·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이이(李珥)·주자(朱子)·김일손(金馹孫) 등을 모시던 같은 이름의 서원이 설립된 바 있으나 모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
김굉필의 본관은 서흥(瑞興). 어렸을 때의 이름은 효동(孝童)이며, 자는 대유(大猷), 호는 사옹(蓑翁)·한훤당(寒暄堂)이다. 김일손(金馹孫)·정여창(鄭汝昌) 등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소학〉 등을 배웠다. 이를 계기로 그는 〈소학〉을 손에서 놓지 않고, 누가 혹 시사(時事)를 물으면 소학동자가 무엇을 알겠는가라고 답할 정도로 〈소학〉에 심취했다.
그는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으로 이어지는 도학(道學)의 정통을 계승했다고 평가된다. 노불(老佛)을 사도(邪道)라 하여 배격하고 유학의 도통(道統)에 참여할 때 참다운 진리를 알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의 학문은 조광조, 김안국(金安國) 등에 전해져 뒷날 지치주의에 입각한 개혁정치를 주도하게 되는 기호사림파의 주축을 형성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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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람재에서 바라본 도동서원 ⓒ 들찔레 |
논 사이 길을 따라 차를 모는데 장대비는 시야를 가렸지만 무성한 논의 녹색이 싱그러운 계절이었다. 이윽고 다람재 위에 차를 세우니 낙동강 가에 자리 잡은 도동서원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서원 앞의 오래된 은행나무가 싱싱한 자태를 뽐내고 물안개가 마을을 감싸 안는 모습이 마음을 들뜨게 했다. 여름 도동서원에서의 빗속 답사는 온몸이 비를 맞아 젖는 노고에도 불구하고 이번 가을 다시 나를 불러들이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 김굉필 나무로 불리는 도동서원 앞 은행나무에 든 가을 빛 ⓒ 들찔레 |
◇ 이 은행나무도 도동서원의 상징 중 하나이다 ⓒ 들찔레 |
◇ 도동서원 수월루 ⓒ 들찔레 |
강으로부터 형성된 낮은 구릉에 지어진 서원의 가장 앞자리에는 잡석기단위에 수월루가 세워져있다. 질박하고 낮게 몇 단으로 나누어 쌓은 기단은 멀리서 보면 마치 논두렁처럼 소박하다. 수월루를 이어주는 담장과의 어울림도 그만이며 오른쪽 담장 아래로부터 서원 바깥으로 이어진 돌로 만든 물길도 대충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어서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기단 가운데로부터 외삼문이 나 있는 수월루 오르는 돌계단도 대충 비슷한 크기로 다듬은 돌을 잇대어 만든 것으로 오랜 세월동안 빛바래고 날카롭지 않게 깎인 모양이 밟아 오르는 사람을 마음 편하게 하는 구석이 있다.
◇ 환주문 오르는 계단 ⓒ 들찔레 |
◇ 환주문 계단 소맷돌의 연꽃 조각 ⓒ 들찔레 |
◇ 환주문 정지석 ⓒ 들찔레 |
◇ 꽃담에 둘러싸인 환주문 ⓒ 들찔레 |
◇ 가을 꽃과 꽃담의 조화로운 아름다움 ⓒ 들찔레 |
◇ 도동서원의 중심건물인 중정당 ⓒ 들찔레 |
◇ 중정당 앞마당의 돌거북 ⓒ 들찔레 |
중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1605년 완공되었으며 서원을 감싸는 담장과 더불어 보물 제350호로 지정되어 있다. 단아한 건물이 주는 맛도 맛이거니와 이곳을 찾는 대개가 다 그렇겠지만 중정당 건물이 얹힌 기단이 특이하고 눈길을 끈다. 기단길이17m, 높이가 1.5m에 이르러 건물의 위엄을 더해주는 것 외에도 자세히 살펴보면 특이하고 재미있는 구성을 하고 있다.
◇ 조각보같은 석축기단, 가운데 12각형의 돌이 보인다 ⓒ 들찔레 |
◇ 기단 갑석 아래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네 마리의 용 ⓒ 들찔레 |
◇ 동입서출(東入西出)을 표현한 계단가의 다람쥐와 꽃판을 새긴 부조 ⓒ 들찔레 |
한동안 기단 석축 앞에서 자리를 뜨지 못하였다. 미색부터 옅은 갈색, 짙은 갈색, 쑥색, 그리고 한 돌에서도 부분적으로 빛깔이 다른 여러 돌들이 이루는 색채의 조화가 주는 아름다움, 규칙성이 없이 쌓여 있으나 질서를 무시하지 않은 단정함, 화려하지는 않지만 멋을 부린 기단은 두고두고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재일 것임에 뿌듯하다.
◇ 사당의 내삼문 오르는 계단 ⓒ 들찔레 |
◇ 내삼문에서 아래로 바라본 계단 ⓒ 들찔레 |
◇ 내삼문 계단에 만들어진 돌거북상 ⓒ 들찔레 |
◇ 음각의 꽃무늬 ⓒ 들찔레 |
◇ 서원 바깥에서 보는 가을 풍경 ⓒ 들찔레 |
도동서원은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함께 동방5현의 한사람으로 추앙되는 한훤당 김굉필(金宏弼)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원래는 1568년현풍 비슬산 기슭에 사우(詞宇)를 지어 향사를 지내오다가 1573년 쌍계서원(雙溪書院)으로 사액 되었으나 임란에 전소하였다. 그후 1605년(선조 38)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지금의 자리에 창건되어 김굉필의 위패를 모셨다. 1607년 ´도동´(道東)이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1678년(숙종 4)에 정구(鄭逑)를 추가 배향했다. 경내의 건물로는 김굉필과 정구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祠堂), 원내의 여러 행사 및 학문의 강론장소로 사용한 중정당(中正堂), 유생들이 기거하던 거인재(居仁齋)·거의재(居義齋) 외에 수월루(水月樓)·환주문(喚主門)·내삼문(內三門)·장판각(藏板閣)·고직사(庫直舍) 등이 있다. 일부 건축물이 보물 제350호로 지정·보존되고 있다.
이 서원은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없어지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매년 2월과 8월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이밖에 전라북도 부안군, 황해도 송화군, 충청남도 천안군에 각각 김구(金坵)·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이이(李珥)·주자(朱子)·김일손(金馹孫) 등을 모시던 같은 이름의 서원이 설립된 바 있으나 모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
김굉필의 본관은 서흥(瑞興). 어렸을 때의 이름은 효동(孝童)이며, 자는 대유(大猷), 호는 사옹(蓑翁)·한훤당(寒暄堂)이다. 김일손(金馹孫)·정여창(鄭汝昌) 등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소학〉 등을 배웠다. 이를 계기로 그는 〈소학〉을 손에서 놓지 않고, 누가 혹 시사(時事)를 물으면 소학동자가 무엇을 알겠는가라고 답할 정도로 〈소학〉에 심취했다.
그는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으로 이어지는 도학(道學)의 정통을 계승했다고 평가된다. 노불(老佛)을 사도(邪道)라 하여 배격하고 유학의 도통(道統)에 참여할 때 참다운 진리를 알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의 학문은 조광조, 김안국(金安國) 등에 전해져 뒷날 지치주의에 입각한 개혁정치를 주도하게 되는 기호사림파의 주축을 형성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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