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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축구, 진정 ‘축구장에 물채우기’ 원하는가>

도깨비-1 2008. 9. 11. 11:46
뉴스: <한국축구, 진정 ‘축구장에 물채우기’ 원하는가>
출처: 데일리안 2008.09.11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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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안 이준목 기자]

◇ 북한과의 최종예선 1차전서 1-1로 비긴 한국 축구대표팀. ⓒ 연합뉴스

간신히 비겼지만, 사실상 진 것이나 다름없는 경기였다.

원정에서의 1-1 무승부, 그러나 이 정도 결과에 만족하기에는 그 과정이 너무나 초라했다. 그나마 3차예선까지 '이 정도로 월드컵에 나갈 수 있겠는가'를 걱정해야했다면, 이제는 '이래 가지고 월드컵에 나갈 자격이 있는가'는 회의가 들 정도의 부끄러운 경기내용이었다.

한국은 3차예선 때와 마찬가지로 북한의 전술이나 스타일을 알고서도 당했다. 허정무호는 철저한 '선 수비 후 역습' 전략으로 일관한 북한을 상대로, 최전방에서부터의 적극적인 '압박'으로 상대의 패싱흐름을 차단해야했지만 이에 실패했다. 게다가 공격주도권 역시 가져오지도 못했고, 빠른 역습이나 정교한 패싱플레이로 상대 수비를 무너뜨리는 '템포'축구도 없었다.

그나마 홍영조의 PK 선제골을 내준 이후, 이른 시간에 만회골을 뽑은 장면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미드필드에서 김두현의 롱패스를 문전으로 쇄도하던 기성용이 가슴으로 트래핑한 후 오른발 슈팅으로 골문을 갈랐다.

북한이 수비진용을 갖추기 전에 빠른 공격으로 무너뜨리는 '원터치-논스톱' 플레이의 정석을 보여준 장면이었다. 아쉬운 것은 이런 장면이 단 한 번밖에 나오지 못했다는 점. 오히려 동점골 이후 허정무호는 상승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다시 단조롭고 느린 페이스로 일관하다가 경기를 마무리지어야했다.

■ 전술 부재보다 더 뼈아픈 투지 부족

오히려 북한의 페이스대로 번번이 끌려가는 허정무 감독의 무기력한 전술은 지난 올림픽에서 보여준 박성화 감독의 '데자뷰'를 연상케 할 정도로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3차예선에서의 부진으로 가뜩이나 여론의 불신을 받고 있는 허정무 감독은 이날 졸전으로 또 한 번 리더십에 치명타를 맞게 될 전망이다.

그러나 이날 경기는 그저 허정무 감독의 전술부재에만 모든 책임을 돌리기도 어려운 경기였다. 전략이든 부분전술이든 결국 선수들의 개인능력과 적극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날 대표팀 선수들은 너나할 것 없이 지리멸렬한 플레이로 일관했다.

이날 허정무호 경기내용의 대부분은 미드필드에서 무의미하게 볼을 돌리거나 결국 최전방에 롱패스 한방을 억지로 우겨넣는 '뻥 축구'에 그쳤다. 허정무호는 공격권을 잡은 순간에도 정작 공을 가지지 않은 다른 선수들이 후속 플레이를 대비하는 '전술적인 움직임'을 경기 내내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선수들의 적극성 자체가 아예 실종된 상황에서 전술이나 전략 레벨은 이미 무의미하다.

패스를 돌리고서는 볼을 가진 동료들을 멀뚱히 보고 서있기만 하거나, 어설픈 볼 처리로 공격권을 놓치기 일쑤였다. 공격이 풀리지 않는 상황에서 과감한 돌파로 문전을 헤집거나, 상대 선수와 거친 몸싸움으로 공간을 창출하는 움직임도 없었다. 영리하지 못한 것은 둘째 치고, 도대체 경기에 이기겠다는 의지가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만큼 무기력한 내용이었다.

한국축구는 지금 위기설에 시달리고 있다. 3차예선과 올림픽에서의 연이은 졸전으로 한국축구를 바라보는 팬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죽음의 조'에 배속되어 월드컵 본선 7회 연속 진출로 장담하기 어려운 절체절명의 고비다. 그러나 정작 선수들에게는 지금의 상황에 대한 냉철한 상황인식이나 위기의식이 전무한 듯하다.

■ 한국축구 '역사에서 배워라'

물론 과거에도 한국축구에 '위기'라고 불리던 시기는 여러 차례 있었다. 하지만 예전 선배들은 위기가 거론될 때마다 적어도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 조금 촌스럽게 보일지 몰라도 팀이 위기나 어려운 시기를 겪고 나면 선수들이 앞장서서 뭉치는 모습을 보여줬고, 그라운드에서 몸을 사리지 않는 투혼을 선보였다.

98프랑스월드컵 당시, 네덜란드에 0-5로 대패하고 16강 탈락 확정과 함께 차범근 감독마저 중도 경질된 초유의 상황, 승패가 큰 의미 없던 마지막 벨기에전에서 선수들은 그야말로 온몸을 내던지며 상대의 슛을 저지했고, '붕대 투혼'을 보여주며 1-1 무승부를 이끌어냈다. 2001년 컨페더레이션스컵 당시, 또다시 프랑스에 0-5로 대패하고 맞이한 멕시코전에서 경기 중 코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무릅쓰고 인저리 타임에 결승 헤딩골을 넣었던 유상철의 투혼은 지금도 많은 팬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공교롭게도 허정무 감독은 취임 당시부터 대표선수의 기본적인 자질로 정신력과 투지를 꼽은 바 있다. 그러나 정작 지금의 대표팀 선수들에게서 과연 예전 선배들의 절반만큼이라도 미치는 투지와 근성을 찾을 수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한국축구는 역사상 가장 많은 유럽 빅리거 선수들을 보유한 시대를 맞이했으며, 월드컵과 올림픽같은 국제무대 토너먼트에서 좋은 성적을 올린 경험까지 갖추고 있다.

하지만 정작 이런 외적인 성장과는 별도로 한국축구의 국제 경쟁력은 날이 갈수록 하락하고만 있다. 오히려 국내에서 스타 대접을 받고 있다는 선수들이 국제무대에서는 상대 선수 하나 제대로 제치지도 못하고, 정확한 슈팅이나 크로스 하나 만들어내지 못하는 모습은, '우물 안 개구리' 스타들의 한계만을 느끼게 한다.

국내 정상급 스트라이커로 꼽히며 반년 만에 대표팀에 복귀한 조재진은 이날 내내 부진한 모습을 보이다가 후반 17분, 0-1로 팀이 뒤진 상황에서 교체됐음에도, 느긋하게 그라운드를 천천히 걸어 나가는 여유(?)를 보여줬다. 부진한 것은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당시 팀은 만회골을 넣기 위하여 일분일초가 다급한 상황이었다.

유로 2008 당시 터키의 툰카이는 체코전에서 부심의 깃발교체로 경기가 지연되자 본인이 직접 대기심으로부터 새 깃발을 받아 마치 육상 계주선수처럼 전력 질주하여 전달하는 모습으로 화제가 됐다. 이날 터키는 체코에 두골을 먼저 내주고도 3-2로 승부를 뒤집는 이변을 연출하며, 툰카이의 전력질주 장면은 터키 축구의 투혼을 보여준 상징적인 명장면으로 남게 됐다.

물론 툰카이의 질주가 경기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처럼 사소하지만 그 작은 열정의 차이가 어쩌면 운명이 바꾸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나라를 대표하는 선수이자 '직업' 축구선수로서, 실력은 둘째치더라도 툰카이같은 투지와 적극성만이라도 보여주는 것이 기본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요구일까.

올림픽의 참패 이후 ´축구장에 물채우자´는 주장이 등장했다. 네티즌들의 기발한 감성이 더해진 이 댓글놀이는 당시만 해도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구호에 지나지 않았다. 표현은 과격할지언정 어디까지나 언어유희를 통해 여론을 일시적으로 배설하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계속될 경우, 축구장에 물채우자는 주장이 더 이상 비유적인 농담으로만 끝날 것 같지는 않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허정무 감독과 국가대표 선수들은 지금 자신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깨달아야한다. 다음 경기를 이기지 못할 경우 당장 허정무 감독의 입지조차 장담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이들 세대로 인하여 한국축구의 역사에 심각한 오명을 남길 수도 있음을 직시해야할 것이다.

벌써 2002년 이후 계속된 부진으로 한국축구에 대한 팬들의 인내와 실망감은 이미 바닥까지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이날 보여준 허정무호의 모습은, 지난 올림픽 이상의 실망감을 또 한 번 축구팬들에게 안겼다.

축구장이 물에 잠기고 나서 후회해도 때는 이미 늦다.

데일리안 스포츠 편집 김태훈 기자 [ktwsc28@dailian.co.kr] - Copyrights ⓒ (주)이비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