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

한양의 사대문[四大門]과 사소문[四小門]

도깨비-1 2008. 2. 19. 17:59
 

사대문 [四大門] 


 조선시대 서울 도성(都城)의 사방에 세운 성문.

1396년(태조 5) 도성을 축조할 때 정남에 숭례문(崇禮門:지금의 서울 남대문), 정북에 숙청문(肅淸門), 정동에 흥인문(興仁門:지금의 서울 동대문), 정서에 돈의문(敦義門)을 세웠다.


숭례문은 1398년(태조 7)에 창건하여 1448년(세종 30)에 개축하고, 1479년(성종 10) 다시 개축한 것을, 1962년 중수(重修)해서 오늘에 이른다.


숙청문은 축조한 지 18년 만인 1413년(태종 13)에 문을 폐쇄하였다가, 1504년(연산군 10)에 동쪽으로 약간 자리를 옮겨지었는데, 그때에는 석문만 세우고 문루는 건축하지 않은 것을, 1976년 북악산(北岳山) 일대의 성곽을 복원하연서 문루를 짓고 숙정문(肅靖門)이란 편액을 걸었다.


흥인문은 1396년에 축조했는데, 다른 문과는 달리 옹성(甕城)을 쌓았다. 축조한 지 50여 년이 지난 1451년(문종 1)에 개건하고, 1868년(고종 5)에 개수한 것을 1958년에 보수공사를 하였다.


돈의문(서대문)은 도성 축조 때에 현재의 사직동에서 독립문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세운 듯한데, 1413년 풍수지리설에 따라 그 남쪽(옛 서울고등학교 서쪽)으로 옮겨 서전문(西箭門)이라 하였다가, 1422년(세종 4) 다시 그 남쪽(현 서대문 마루턱)에 이건(移建)하여 문의 이름을 도로 돈의문으로 하였다. 1711년(숙종 37) 문루를 개건하였으나, 1915년 일제의 도시계획으로 인해 철거되었다.

 

사소문 [四小門]


 조선시대 서울 도성(都城)의 4대문 사이에 나 있던 소문(小門).

1396년(태조 5) 도성을 축조할 때, 동북쪽에 홍화문(弘化門:東小門), 동남쪽에 광희문(光熙門:水口門), 서남쪽에 소덕문(昭德門:西小門), 서북쪽에 창의문(彰義門)을 세웠다.


그 중 동소문은 1484년(성종 15)에 창경궁(昌慶宮)을 건축하고 그 동문을 홍화문이라 하였으며 1511년(중종 6)에 혜화문(惠化門)으로 개칭하였다. 그 뒤 1816년(순조 16)에는 중수(重修)하고 1869년(고종 6)에 보수하였으며, 1928년에는 문루를 헐고 석문만 남겨 두었는데 그 후 전차를 부설하면서 석문마저 철거하여 지금은 그 형태를 찾아볼 수 없다.

 

수구문은 1711년(숙종 37) 새로이 석문만 건축하고 9년 후인 1720년에는 문루를 지어 광희문이라는 현판을 걸었고, 1975년 도성복원(都城復元) 공사로 석문을 수리하고 문루를 재건하였다. 광희문 이외에 1457년(세조 3) 지금의 장충동(奬忠洞)에서 한남동(漢南洞)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따로 남소문을 축조하였으나 1469년(예종 1)에 풍수지리설에 따라 폐쇄되었다.


서소문은 1738년(영조 14)에 석문을 개축하고 1744년 문루를 건축한 뒤 소의문(昭義門)으로 개칭하였으나 1914년 도시계획 때 철거되었다.

 

창의문은 1413년(태종 13)에 폐쇄되었으나, 1741년(영조 17) 성문을 다시 고쳐 짓고 인조반정 공신의 명단을 걸게 하였는데 지금도 남아 있으며 자하문이라고도 한다.

 

 4대문 4소문


인·의·예·지·신의 다섯 가지 덕을 오상이라 하였고. 서울의 사대문은 오상에 따라 이름이 지어졌다. 즉, 인-흥인지문, 의-돈의문, 예-숭례문, 지-홍지문 및 신-보신각 이다.


서울의 성곽은 1396년(태조 5) 축조, 1422년(세종 4) 중수되었는데, 처음에는 석성과 토성이 섞여 있었으나, 세종이 중수할 때 전부 석성으로 개축하였다. 이 성곽에 사대문과 사소문이 있었는데, 이것을 통틀어 팔대문이라 하였다. 즉, 정북의 숙청문(북문), 정동의 흥인지문(동대문), 정남의 숭례문(남대문), 정서의 돈의문(서대문) 등의 사대문과 동북의 홍화문

(중종 6년 혜화문으로 개명, 동소문), 동남의 광희문(수구문), 서남의 소덕문(후에 소의문으로 개명, 서소문), 서북의 창의문(자하문) 등의 사소문을 합쳐 이르는 말이다. 1396년(태조 5) 도성을 축조할 때 정남에 숭례문(지금의 서울 남대문), 정북에 숙청문, 정동에 흥인지문 (지금의 서울 동대문), 정서에 돈의문을 세웠다.


4대문


◆ 숭례문(남대문) - 국보 1호 -


숭례문은 1398년(태조 7)에 창건하여 1448년(세종 30)에 개축하고, 1479년(성종 10) 다시 개축한 것을, 1962년 중수해서 오늘에 이른다. 도성의 문의 현판은 모두 가로로 쓰여져 있으나, 숭례문은 세로로 쓰여져 있다. 이것은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한 것이다. 바로 보이는 관악산이 불꽃모양을 한 화산의 형태이므로 경복궁에 화재가 나기 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현판 글씨는 양녕대군이 쓴 것으로 추사 김정희도 이 현판글씨를 보고 감탄했다고 한다.

 

◆ 흥인지문(동대문) - 보물 1호 -


흥인문은 1396년에 축조했는데, 다른 문과는 달리 옹성을 쌓았다. 축조한 지 50여 년이 지난 1451년(문종 1)에 개건하고, 1868년(고종 5)에 개수한 것을 1958년에 보수공사를 하였다. 원래 이름은 흥인문이다. 그런데 문의 이름에 갈지(之)자를 넣은 것은 동대문이 위치한 낙산의 지형이 낮아 갈지(之)자를 넣어 약한 기운을 보완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실제 타락산의 지세가 낮아 방어에 취약하기 때문에 4대문 중 유일하게 동대문에만 옹성을 건설하였다.

 

◆ 돈의문(서대문) - 현재는 없는 문


돈의문(서대문)은 도성 축조 때에 현재의 사직동에서 독립문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세운 듯한데, 1413년 풍수지리설에 따라 그 남쪽(옛 서울고등학교 서쪽)으로 옮겨 서전문이라 하였다가, 1422년(세종 4) 다시 그 남쪽(현 서대문 마루턱)에 이건하여 문의 이름을 도로 돈의문으로 하였다. 1711년(숙종 37) 문루를 개건하였으나, 1915년 일제의 도시계획으로 인해 철거되었다. 돈의문은 시대에 따라 서전문, 신문, 새문으로 불리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서대문으로 불러왔다. 조선시대 5백년 간 중국과 통하는 관문이었다.

조선말에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친일정권을 형성하는 데 방해가 된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킬 때, 바로 이 돈의문 앞에서 흥선대원군과 불량배들을 끌고 들어왔다. 일제 침략기 때 시구역 개수계획이라는 명분으로 헐리고 말았다. 일제는 돈의문의 목재와 기와를 경매하였는데 그 속에 불상과 보물이 많이 나와서 이 문을 샀던 사람은 큰 횡재를 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 숙정문(북대문) - 평상시에는 닫혀있던 문


숙청문은 축조한 지 18년 만인 1413년(태종 13)에 문을 폐쇄하였다가, 1504년(연산군 10)에 동쪽으로 약간 자리를 옮겨지었는데, 그때에는 석문만 세우고 문루는 건축하지 않은 것을, 1976년 북악산 일대의 성곽을 복원하연서 문루를 짓고 숙정문이란 편액을 걸었다. 원래 이 북쪽문은 지(智)자를 빼고 청(淸)자를 넣어서 숙청문이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북쪽문은 지형이 험난하여 사실상 사람이 왕래할 수 없었으며 특별한 행사가 없으면 항상 닫혀 있어 굳이 지(智)자를 쓸 필요가 없었다.


 

4소문


◆ 창의문(북소문) - 북대문의 역할을 했던 문


도성 4소문의 하나로 태조5년(1396) 도성을 쌓을 때 건립되었으나, 태종 13년(1413) 풍수설에 따라 숙정문과 함께 폐쇄되었다. 현재의 문루는 영조17년(1741) 세운 것으로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원형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목조 문루는 튼튼하고 정교하며, 석문은 아담하다. 문에는 지금도 성벽의 일부가 연결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이 일대를 자하동이라고 하였으므로 자하문이라고도 한다.

현재 서울의 4소문 중에서 유일하게 원래 모습으로 남아 있다. 문 위에는 나무에 새긴 닭을 걸어 두었는데, 문 밖의 땅이 지네와 비슷한 모양이어서 닭을 매달아 지네의 기운을 누르기 위함이라고 한다. 항상 숙정문이 닫혀있어 북쪽의 대문역할을 했었다.

 

◆ 광희문(남소문) - 시체가 드나들던 문


흥인지문(동대문)과 숭례문(남대문) 사이에 있는 4소문의 하나로 태조 5년(1396) 도성을 쌓을 때 창건되었다.

개천수구와 가까이 있어 수구문이라고도 하였으며, 이 문을 통하여 죽은 사람의 시신이 많이 나간다고 하여 시구문이라고도 하였다. 소의문(서소문)과 함께 서울 백성들이 죽으면 상여에 싣고 시체를 한양 밖으로 운반하던 저승문이었다. 조선 초에는 도성에서 한강나루로 가려면 광희문을 이용했는데 거리가 멀어 불편했다. 그래서 남산 타워호텔 부근에 새로운 남소문을 만들었다고 한다. 남쪽의 소문이 두 개였던 것이다. 현재의 문은 94년에 복원한 것이다.

 

◆ 혜화문(동소문) - 잘못 복원된 문


혜화문은 원래  홍화문(동소문)이라고 하였으나, 성종이 14년(1483) 창경궁을 짓고 그 동문을 홍화문(창경궁의 동문)이라 명명하는 바람에  동소문인 홍화문과 혼란을 일으키자, 중종 6년(1511) 동소문의 이름을 혜화문으로 바꾼다. 이 문으로는 동북지역 관민들과 여진족들이 주로 드나들었다. 본래 이 혜화문은 문루가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나서는 한동안 문루가 없는 암문 형태의 ‘무지개 문’으로 남아 있었다.

 현재 혜화로터리에 있다. 다른 문들은 모두 바닥에 용이 그려져 있지만 이 문은 바닥에 봉황이 그려져 있다. 그것은 이 지역이 새떼가 많아서 새의 피해를 막기 위해 새 중의 왕인 봉황을 그려 넣었다고 한다. 이 문은 새로 만들 때에 새로 난 신작로로 적당한 장소를 찾지 못해 절벽 위에 세워졌다

 

◆ 소의문(서소문) - 조선시대 죄수들을 처형하던 사형장


소덕문은 도성의 서남쪽 숭례문과 돈의문의 중간지점에 위치하였고 도성의 4소문 중의 하나로서 태조 5년(1396) 9월 다른 성문과 함께 건설되었다. 그러나 성종 3년(1472) 소의문이라고 개칭하였는데 그 이유는 성종이 예종의 왕비 장순왕후에게 ‘휘인소덕’이라는 시호를 추존하였는데 이 시호와 소덕이라는 문 이름이 같으므로 이것을 피하기 위하여 소덕문을 소의문으로 개칭하였다. 소덕문도 태조 5년(1396) 건축 당시에는 다른 성문과 같이 문루가 있었으나 언제 없어졌는지 그 시기를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문루가 없었던 것을 영조 19년(1743)에 금위영에 명하여 동년 8월에 문루를 건축하였다. 도성내의 시체는 광희문과 소의문으로만 나갈 수 있었으므로 도성내에서 서쪽으로 나가는 시체는 모두 이 문을 통하여 나갔다. 500여 년을 내려오던 이 소의문은 일제 때인 1914년 도시 계획이라는 구실로 모조리 철거하였고 지금은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으며 다만 서소문동이라는 동명만이 남아 그 옛날의 소의문을 연상케 한다.

서소문 공원은 죄인을 처형하던 장소였다. 조선시대 반역 등 국가의 중대범죄를 저지른 죄인은 서소문 밖에서 목을 베었다. 수양대군이 어린 단종을 죽이고 왕에 오르는 것을 끝가지 반대한 사육신이 죽은 장소도 이곳이다.


 

<다른 의견>


1. 북대문에 해당하는 숙정문에는 왜 이름 속에 "지()"가 없는지 궁금하실 것입니다. 북쪽은 음기가 많은데 만약 이 문을 열어두면 도성에 음기가 들어와 문란해지므로 그 위쪽에 있는 홍지문(혹은 소지문)으로 이를 대신하고 사실상 북대문은 여는 법이 없었답니다.


 2. 홍지문을 4대문의 하나인 북문이라하는 의견이 있으나 숙종조에 건립된 점으로 보아 개국당시의 오방오덕(五方五德)<동서남북중(東西南北中),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에 따른 4대문이라 하기엔 무리가 있고, 아래 처럼 숙청문을 대신한 소지문이 실질적인 오방오덕(五方五德)의 정신을  담고 있다고도 보이나, 조선조 건국당시 세웠던 北방위(智)에 해당하는 문이 어느 문인지는 분명치 않다.


* 소지문(炤智門): 북문, 삼청터널 위에 있다. 자하문으로 불리우는 북소문보보다 큰 정문이나 종묘로 가는 지기를 밟는다 하여 폐쇄 하였다.


 

“태조 4년(1395) 삼봉은 새 궁궐의 전각 이름을 지었고, 5년에는 도성 8대문의 이름을 지었는데 『시경』과 『서경』에서 그 아름다운 뜻을 취하였다. 특히 4대문은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오행(五行)에 배정시켜 그 이름을 결정하였다. 인(仁)은 동방(東方)이므로 동대문에 배속되고, 의(義)는 서방(西方)이므로 서대문에 배속되고, 예(禮)는 남방(南方)이므로 남대문에 배속되고, 지(智)는 북방(北方)이므로 북대문에 배속된다. 이렇게 해서 동대문의 이름이 흥인지문(興仁之門)이 되고,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이 되고, 북대문은 소지문(炤智門)이 되었다. 그리고 오행 중 중앙에 해당하는 신(信)은 종로 중앙의 보신각(普信閣)의 이름으로 들어갔다.”  

                                                                                                                        < [도올고함(孤喊)] 숭례문 화재현장에서> 中에서

 

 


홍지문 弘智門

서울시 종로구 홍지동 산4번지.

조선 숙종 41년(1715)에 서울 성곽과 북한산성의 방위 시설을 보완하기 위하여 세운 문. 1921년에 허물어진 것을 1977년에 다시 세운 것으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에 있다.


이곳엔 북한산성을 연결하기 위해 쌓은 홍지문과 탕춘대성이 있다. 홍지문은 한성의 북쪽에 있는 문이어서 한북문이라고도 했으나, 숙종이 친필로 '弘智門'이라는 편액을 하사해 공식명칭으로 정해졌다고 한다.

이 문은 숙종 때 건축돼 1921년까지 탕춘대성문으로 역할을 해오다 이 해 일어난 홍수로 붕괴돼 50년간 방치돼 왔다. 그러다 1977년 서울시에서 탕춘대성과 함께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복원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특히 현재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이 쓴 것이다.


탕춘대성은 인왕산 동북쪽에서 시작, 북쪽의 능선을 따라 내려가다가 사천을 지나 북한산 서남쪽의 비봉 아래까지 연결해 축성한 산성이다. 이 산성의 명칭을 탕춘대성이라고 한 것은 현재 세검정이 있는 동쪽 약 100여m 되는 산봉우리에 탕춘대가 있었던 것에서 비롯됐다.  잦은 전란으로 고초를 겪은 조선은 병자호란이 끝나고 국방강화 차원에서 이 성을 쌓았다.


특히 효종(1649∼1659 재위), 현종(1659∼1674 재위)을 거쳐 숙종 때에 이르러서는 수도방위에 더욱 치중했다. 숙종은 재위 30년(1704) 3월부터 도성 수축공사를 시작했고 이 공사는 6년 후인 숙종 36년(1710)까지 계속됐다. 도성 수축공사를 끝낸 숙종은 재위 37년에는 북한산성을 축성했고 다시 탕춘대성을 축조하게 된 것.

그러나 탕춘대성에 대한 축성역, 축성 방법, 축성 경비 등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아쉬움으로 남는다



숙정문 (肅靖門)


조선 태조 4년(1395)에 건립한 서울 사대문의 하나. 문루(門樓)가 없고 암문(暗門)으로 되어 있는데 순조 때 폐문되었다.

삼청터널 위에 자리한 숙정문은 남대문·동대문·서대문과 함께 서울성곽 4대문의 하나로 속칭북문(北門)이었다. 서울의 정북에 위치한 이 문은 처음에는 숙청문(肅淸門)이었는데 무슨까닭인지 숙정문(肅靖門)으로 개칭되어 중종(中宗) 이후의 실록에는 모두 숙정문으로 기록되고 있다.

4소문의 하나인 창의문(彰義門)과 함께 양주(楊州)와 고양(高陽)으로 왕래하는 통로로 이용되기도 한 이 문은 서울성곽의 다른 문과 같이 태조 5년(1396)에 창건되었다. 이문은 연산군 10년(1504)에 원래의 위치에서 약간 동쪽인 지금 자리로 이건하였는데 이때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로 된 석문(石門)만 세우고 문루(門樓)는 세우지 않은 듯하다. 1975년 서울특별시에서 무너진 문루를 복원하려고 할 때 석문만 있었느냐 아니면 문루도 있었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여러차례 토론을 거쳐, 태조 때 문루가 건축되었다는 것을 근거로 이를 복원한 뒤 숙정문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조선 초의 기록을 보면 풍수설과 음양설에 따라 숙정문을 닫아 두었거나 열어 놓기도 하였다. 그 예로 태종 13년(1413) 6월에 풍수학자 최양선(崔揚善)이 풍수지리학상 경복궁의 양팔이 되는 창의문과 숙정문을 통행하는 것은 지맥(地脈)을 손상시킨다는 상서(上書)가 있자, 마침내 이 문을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사람의 통행을 금지하였다.

그 후 태종 16년(1416)에는 기우절목(祈雨節目)을 만들어 가뭄이 심하면 숙정문을 열고 남대문을 닫았으며, 비가 많이 내리면 숙정문을 닫고 남대문을 열게 하였다. 즉 가뭄이 심하면 먼저 종묘·사직과 명산(名山)·대천(大川)에 기우제를 지내고, 그래도 비가 오지 않으면 남대문을 닫고 숙정문을 열어 놓는다. 그리고 시장(市場)을 옮기고 보신각의 종을 치는 대신 쟁(錚)을 치게 하였다. 이는 북은 음(陰)이요, 남은 양(陽)인 까닭에 가물면 양을 억제하고 음을 부양하는 음양오행설에서 나온 것이다. 예종 때의 기록에도 몹시 가물면 종로의 시장을 구리개(현 을지로 입구)로 옮기고, 남대문을 닫은 다음 북문, 즉 숙정문을 열게한 뒤에 기우제를 지냈다고 하였다.

한편 조선시대 이규경이 지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의하면, 숙정문을 열어 놓으면 서울 장안의 여자가 음란해 지므로 항상 문을 닫아 두게 되었다고 소개 하였다. 이것도 숙정문이 음방(陰方)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기록이 있었던 것이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보면 상원(上元 : 음력 정월 대보름) 전에 민가의 부녀자들이 세번 숙정문에 가서 놀면 그 해의 재액을 면할수 있다는 말이 전해온다고 하였다. 이는 숙정문 부근의 자연풍경이 아름다워 도성의 사녀(士女)들이 자주 이곳을 찾아와 놀던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오래도록 비가 오면 숭례, 흥인, 돈의, 숙정문에 나가서 비 개이기를 비는 제사인 영제를 지냈다.

조선시대 선조 때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峰類說)>을 보면 숙정문 밖 한 바위 틈에서 액체가 흘러 나오는데 맑을 때는 마치 막걸리빛 같고 진할 때는 떡과 같아서 사람들이 다투어 먹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숙정문 밖의 쌀바위(米岩) 전설이 남아있다. 이 전설에 의하면 옛날 하루 세차례씩 1되 가량의 쌀이 나왔는데 나뭇군 노인이 욕심이 생겨 이 바위에 지키고 앉아 쌀이 나오는 대로 자루에 담아 가득 채우기를 한 달 가량 계속 했더니 쌀 대신 끈적끈적한 물이 나왔다 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