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명소

조선의 마지막 주막 '삼강주막'의 정취

도깨비-1 2007. 8. 18. 10:43
 

 

 

 지니치게 너무 관광지화된 듯 싶을만큼

마당을 넓게 다듬고, 주차장도 만들고,

단체손님 맞이할 준비릉 마쳤더군요.

조금은 소박해도 좋았을 것을...

해서 원건물 사진만 찍고,

앞마당에 있는 부속건물(임시천막포함, 여러동이 있음)은 제외

 

다리 밑으로 돌라가면  수려한 팽나무(?) 한그루 서 있음.

팽나무 아래 앉을 자리라도 만들면 좋을듯...

 

 

 

 

 

조선의 마지막 주막 '삼강주막'의 정취

[조선일보   2007-03-03 13:32:27] 

100년 풍상 버텨온 예천 ‘삼강주막’ 주모는 갔어도 취흥(醉興)은 남아… 숫자 못 읽는 주모, 벽에 금 그어 외상 표시… 경상북도가 민속자료로 지정해 복원키로 <이 기사는 주간조선 [1944호] 에 게재되었습니다>

벌써 100여년이 흘렀구려. 세월은 참말 무상한 것 같으이. 이곳은 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에 자리잡은 ‘삼강주막’이라오. 낙동강·내성천·금천의 3개 강물이 합치는 곳이라 해서 그렇게들 불렀지. 주막이 생긴 것은 1900년대 초반. 정확한 날짜는 알지 못한다오. 그저 학자들이 “낙동강 700리 길을 통틀어 아직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조선시대 전통 주막”이라며 그렇게 추정할 뿐이라오.

주막 한 켠엔 멋들어지게 늘어선 아름드리 나무가 한 그루 있소. 사람들이 정월 보름날 제사를 지냈던 이 나무 수령이 200년이라니까, 그간 주막이 겪은 풍상을 어림할 수 있을 거요.

‘조선의 마지막 주막’을 지켜온 이는 유옥련(兪玉蓮) 할매라오. 1917년에 태어난 할매는 꽃다운 나이인 열아홉에 주모로 들어앉아 2005년 10월 90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약 70년간 이 주막을 지켜왔소. 마을 노인은 “할매의 고향은 옆 동네 우망리”라면서 “원래 남의 집 일을 봐 주다가 네 살 위인 뱃사공 배소봉(裵小鳳)씨와 1932년 혼인해 주막을 맡았다”고 하더군. 그러니까 이 주막은 할매가 맡기 훨씬 전부터 이곳에 있었다는 얘기가 되는 거라오.

옛날엔 정말 좋았다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삼강리’는 상인이 흥청대는 요충지였소. 이곳은 대구와 서울을 잇는 단거리 뱃길로, 낙동강을 오르내리는 소금배와 집산된 농산물은 죄다 이곳으로 모여들었다오. 마을과 주막은 상인, 뱃사람, 나들이객, 시인묵객으로 늘 붐비곤 했지. 한창일 땐 소 6마리가 들어가는 커다란 배가 오가곤 했다니까, 나루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거요.

할매는 글도, 숫자도 알지 못했다오. 그래서 한 잔을 외상하면 담벼락에 짧은 금을 긋고, 한 주전자를 외상하면 긴 금을 세로로 그어 놓았다오. 그러다 외상값을 죄다 갚으면 옆으로 길게 금을 그어 외상을 지웠지. 말 그대로 외상을 ‘그은’ 거라오. 주막 주방 옆 담벼락엔 할매가 그어둔 외상 금이 여전히 남아 있다오.

비록 술장사를 했지만 할매는 단아하고 정직했다오. 마을 노인은 “인정 있고 인심 후했던 주모”로 할매를 기억한다오. 할매는 옆 동네 술도가에서 탁주를 받아다 팔았소. 당시엔 안주래봐야 어쩌다 멸치나 콩자반이 곁들여질 뿐, 평소엔 소금이 대부분이었다오. 동네 노인 정수흠(69)씨는 “돈이 없을 땐 쌀 같은 곡물을 들고 와서 술을 받아먹곤 했다”며 “어쩌다 돈이 생겨 외상을 그으면 한두 잔 더 주기도 하고, 돈이 떨어지면 또 외상을 먹기도 하고 그랬다”고 하더군. 20~30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대여섯 달에 한 번, 어떤 땐 1년에 한 번 꼴로 외상을 갚았다오. 그러다 보니 미처 못 갚은 외상도 많았는지, 주막 흙벽엔 채 지워지지 않은 수십 개의 금이 남아 있다오.

할매의 삶은 고단했다오. 강변에 있긴 했지만 주막엔 의외로 먹을 물이 귀했소. 그래서 할매는 매일 마을로 가서, 동이에 우물물을 받아 머리에 이고 왔소. 50여년 전 남편과 사별한 뒤부터 매일을 그렇게 5남매를 키웠으니, 고단할 만도 했을 거요. 할매는 10여년 전부터 막걸리 대신 소주나 과자를 주로 팔았는데, 소주 한 병에 1000원을 받았다니 수입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오. 전국의 대폿집을 순례해 ‘사람아 바람아, 그냥 갈 수 없잖아’란 책을 쓴 화가 사석원씨는 “무뚝뚝하지만 속정 깊은 주모”로 할매를 기억한다오. 사씨는 할매가 작고하기 2년 전인 2003년 11월 ‘삼강주막’을 찾았는데, 그게 그만 마지막이 되고 말았소.

세월이 흐른 지금은 옛날 같은 정취를 느끼기 힘들다오. 마을을 가로질러 1970년대에 도로가 뚫리고, 현대식 다리인 삼강교가 마을과 주막 사이를 가로막고 들어선 바람에, 강 따라 소담하게 자리잡은 동네 모습이 훼손되고 말았소.

 동네 노인은 “다리가 뚫리던 2004년 4월, 평생 눈물을 보이지 않던 할매가 봉당마루에 앉아 쓸쓸히 눈물 훔치는 모습을 봤다”고 하더이다. 주막을 감돌며 시원하게 흘러가는 낙동강 허리를, 다리가 동강 막아버렸으니…. 도로가 생기면서 인적도 끊겨, 주막을 찾는 사람도 하나 둘씩 사라지고 말았다오.

주막은 원래 짚단에 진흙을 섞어 지었는데, 1934년 ‘갑술홍수’ 때 물에 잠기면서 한 번 보수를 했다오. 짚단을 얹어 놓은 원래 지붕도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1971년 슬레이트로 바뀌어 버렸소. 하지만 옛 모습이 아주 사라진 건 아니라오. 진흙을 바른 담장, 구들장, 아궁이도 여전하고 할매가 쓰던 토끼굴 같은 부엌도 여전하니 말이오.

경상북도는 이 주막이 가진 지역 문화·역사적 가치가 높다고 판단해 2005년 12월 26일, 이곳을 민속자료 134호로 지정했소. 무려 12억원을 들여 이곳을 문화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이라니, 옛 정취가 살아나길 기대해 봄직할 거요.

하지만 아쉬운 건 있소. 자식들이 장례를 치르면서 할매가 쓰던 그릇이니 반짇고리, 옷가지, 이불 등을 죄다 태워버렸다오. 하지만 너무 무상해 하진 마시라오. 삶이란 게 우리 같은 질그릇의 삶이건 사람의 삶이건, 세상에 나면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법이니까 말이오. 누가 또 알겠수? 문화공원이 조성되면 누군가 흙을 빚어 할매가 쓰던 우리네 그릇들을 다시 복원해줄지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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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경북) = 이범진 주간조선 기자 bomb@chosun.com]

[사진= 허재성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heophoto@chosun.com]

 

 

낙동강변의 마지막 주막
2006/04/04 오후 3:04 | 나의 테마글

흔히 낙동강을 700리 또는 1300리라고 말한다. 강원도 태백의 황지연못에서 발원하여 부산 앞 바다까지 이르는 말이다(정확히 표현하자면 1300리의 낙동강이 옳을 것이다).

이 1300리 길은 얼마나 많은 애환들을 간직하고 있을까? 물론 그 곳에는 기쁨도 있었을 것이고 또한 숱한 슬픈 사연들도 있을 것이다. 이 1300리 머나먼 길목에 우리를 전설 속으로 끌어들이는 듯한 주막이 있다.

기쁨보다는 왠지 슬픈 사연이 더 많을 것 같은, 안내판 하나 없이 초라하게 숨어 있듯 홀로 서 있는 주막. 낙동강변의 이 시대의 마지막 주막이라고 일컬어지는 곳, 바로 '삼강주막'이다. 이 주막을 보는 순간 마치 세월이 멈춰선 듯 이 시대와 너무나 먼 것 같은 옛 모습에 그만 숨이 막힌다.

ⓒ2004 최정균
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 힘센 장정 두세 명이 밀어붙이면 곧 넘어갈 것 같은 80여 년이 다된 흙벽의 15평 정도 조그마한 주막이 쓰러질 듯 서 있다. 옆으로 굽은 나무 기둥들이 아직도 지푸라기가 듬성듬성 보이는 진흙벽 속에 묻혀 위태롭게 버티고 있다. 예전에는 초가지붕이던 것을 강에서 불어오는 심한 바람 때문에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대에 스레이트 지붕으로 바꾼 것 외에는 예전 그대로라고 한다. 두 칸짜리 작은 방과 부엌 하나가 전부다.

이 곳은 회룡포를 거쳐 내려오는 내성천과 이웃 용궁면을 휘감아 내려오는 금천이 만나 하나의 낙동강을 이루는 곳, 즉 세 개의 강이 있는 곳이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삼강리(三江里).

ⓒ2004 최정균
유옥연(88세) 할머니가 지금도 이 주막을 홀로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연세가 많은데도 놀랄 만큼 곱고 예쁜 얼굴, 시집오실 때 해온 이불을 지금도 고이 간직하며 살아가시는 할머니이시다.

이 곳을 처음 찾았을 때는 가을걷이가 막 시작되는 10월 초. 몇몇의 지인들과 동행하던 길이었고 늦은 오후였기에 할머니와 말씀도 나누지 못한 채 돌아오고 말았다.

이후 세 번 이곳을 찾았다. 가슴이 뭉클하도록 할머니로부터 옛날 이야기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일본을 강타한 태풍 도카게 때문인지 먹구름이 바로 머리 위에서 짓누르고 을씨년스럽게 바람도 강한 날이었다. 할머니는 변함없이 앞 마당을 쓸고 계셨다. 연세에 비해 아직도 정정하시고 지저분한 것은 보지 못하는 정갈한 성격 때문에 잠시라도 제 자리에 계시지 않으신다.

ⓒ2004 최정균
"예전에는 주막이 세 개가 더 있었어. 그때는 나루를 건너는 사람들도 많았지. 장날이 되면 점심 때에 막걸리가 동이 나고 장사도 잘 되었지. 하루에 나룻배가 스무 번이나 더 건넜으니까. 길도 많아지고 다리들도 생기니 나룻배도 없어지고, 사공들도 떠나 어디론가 갔지. 사공들에게는 농사지어 쌀 몇 됫박, 보리 몇 됫박을 주었어. 다들 어렵게 살 때잖아."

말씀을 하시는 동안 할머니는 이미 옛날 속으로 돌아가신 듯했다.

강 이곳과 저쪽을 이어주던 나루터.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작은 주막.
강을 건너려면 나루터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고, 잠시 주막에서 컬컬한 목을 막걸리로 달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그리고 예쁜 주모에게 취중에 장난기 어린 농담도 걸지 않았을까? 또한 이 마을 저 마을의 소문과 화제가 자연스럽게 입소문으로 전해지던 곳도 이러한 주막이었을 것이다.

짧은 말씀 속에서 예전에 사람들로 북적이던 이곳이 어떠했는지 짐작해 본다. 지금도 나루터라 칭하는 곳의 주막이지만 이미 20여 년 전에 나룻배는 없어지고 바로 뚝 너머 낙동강변 무성한 억새 속에 형태를 알 수 없을 만큼 쪼개져 나뒹굴고 있다.

무남독녀로 태어나 (연년생 여동생은 얼굴도 모른 채 어렸을 때 사망) 친정은 이미 대가 끊겨 인척이 없다고 하시는 할머니. 노년에 이러한 것들이 더욱 할머니를 외롭게 만드나 보다.

풍양면 음앙골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나 열여섯에 두 살 위 신랑인 배씨와 정혼 후 바로 지척에 있는 삼강리 마을에 살면서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적은 농사일을 하며 5남매를 낳았다. 6·25 전쟁 바로 직전에 병고로 남편과 사별하였으니 이미 56년이 되었다.

유복자인 막내(55세)를 낳았을 때 6·25 전쟁이 터지고 이곳까지 밀어 닥친 북괴군에게 고초도 당한다. 핏덩어리 막내를 괴뢰군들이 보더니 "애 낳수다"하며 밤새도록 총칼을 번뜩이며 괴롭히다가 보리짚단 속에서 잠시 잠을 자더니 이른 새벽에 도망치듯 떠났다고 한다.

남편과 사별후 손바닥만한 농사를 지으며 5남매를 키우기가 벅차 지금의 이 곳으로 내려와 옛주인으로부터 이 주막을 넘겨 받아 시작한 게 할머니 나이 마흔살 때. 이때부터 이 주막에서 48년간을 살고 계신 것이다.

그때는 경남 김해쪽에서 올라오던 소금배들도 있었고, 산 넘어 풍양쪽에서 문경을 거쳐 서울로 가는 이들도 많았고, 마을 사람들이 농사일을 하려면 강을 건너야 했기 때문에 제법 붐볐던 곳이었단다. 그후 아랫마을에 조그마한 다리가 생기고 70년경에 도로들이 확장됨에 따라 주막을 이용하던 사람들의 발걸음도 뜸해지고 나룻배와 사공들도 없어졌다.

무더운 여름이면 삼강리 노인 몇 분이 내려와 200년이 더 된 회화나무 그늘 밑의 평상에서 맥주 몇 병을 마른 멸치와 고추장으로 안주하며 나누는 객담이 유일한 낙이다. 차량으로 오가다 옛 전설에나 나옴직한 이 시대의 마지막 주막인 이 곳을 타지 여행객들이 가끔 찾아올 뿐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다.

ⓒ2004 최정균
"저 다리 때문에 이제는 마을이 안 보여. 짐차밖에 다니지 않아 시끄럽기만 하구."

영순과 풍양을 잇는 새로운 도로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이 주막을 아슬아슬하게 비켜간 새로운 도로가 내심 불만이시다. 삼강교를 현대식으로 건설하며 도로를 높이느라 뚝을 쌓고 그 위에 도로를 냈기 때문에 마치 주막과 마을을 갈라놓은 듯하다. 그래서 할머니는 더욱 외로움을 느끼시는가 보다.

할머니와 옛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예천군 직원 두 분이 답사를 왔다. 낙동강변에 유일하게 남은 이 주막을 문화재로 지정해 줄 것을 이미 도에 요청했고, 내년에는 예산을 할당받아 보수공사를 할 예정이란다. 가급적이면 예전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채 보수할 계획이며 초가지붕으로 운치있게 꾸밀 계획이란다. 이 말씀에 할머니는 벌써 걱정이 앞선다.

공사 기간 중 잠시라도 어느 곳으로 거처를 옮겨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으신 모양이다. 아무쪼록 할머니에게 불편이 없도록 잘해 주었으면, 그리고 현대식이 아닌 옛 모습을 가능하면 유지한 채 보수공사를 해 주었으면.

"고기는 왜 사와. 나 고기 못먹어. 라면이라도 끓여 줄까?"
"제 걱정 마시고 할머니나 챙겨 드세요."

무슨 말씀을 더 하실 것 같은, 아니면 남에게 말 못할 많은 사연을 지니고 계신 듯한 할머니의 서글픈 표정을 뒤로 한 채 그 곳을 떠났다. 아마 오랫동안 주막을 지키고 있는 회화나무만이 그 사연을 잘 알고 있으리라. 할머니가 편찮으신 곳 없이 오래 오래 옛 이야기를 머금고 살아가셨으면….

어느덧 해는 서쪽산 뒤로 숨고 태풍 뒤끝에 남아 있는 먹구름 속으로 한줄기 석양빛이 주막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2004 최정균

님이 떠난자리에 폐허만 덩그러이 남았으나......

아직도 삼강나루터 이 주막에선 보부상들의 떠들썩한 소리가 들리는듯 합니다.

아~ 세월의 무상함이여......ㅠㅠ




 




 




 




 




 






 


삼강에서 굴미로 넘어가다가

삼강다리가 보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