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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흔적을 찾아서] (56) 통도사와 자장 그리고 암자들

도깨비-1 2007. 5. 31. 19:22

[삼국유사 흔적을 찾아서] (56) 통도사와 자장 그리고 암자들


부처의 산릉 영취산 자락.. 암자 곳곳에 극락의 향기 / 글·사진 이 재 호 기행작가

종교의 최대 명절은 교주의 탄생일이다. 기독교의 예수가 나사렛 마구간에서 태어난 것은 12월 25일(크리스마스)이고, 불교의 석가는 음력 4월 8일(4월 초파일)이다. 나는 초파일에 큰 절을 찾지 않고 퇴락한 쓸쓸함이 그리움으로 묻어나는 자그마한 절을 찾는데 복잡한 통도사를 찾은 것은 통도사 창건주 자장 스님도 이날 태어났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자장 스님은 청렴한 관리였던 진골 김무림의 아들이다. 대를 이을 자식이 없어 삼보(三寶)에 귀의하여 천부관음(千部觀音)을 만들어 "만일 사내 아이를 낳으면 시주하여 불법의 바다(法海)에 나루터로 삼겠습니다"며 빌고 빌며 축원하여 낳은 아들이다.

통도사의 이모저모

통도사 근처부터 차들이 밀려 있다. 너무 복잡하여 암자부터 먼저 보려고 뒤돌아갔다. 여러 암자가 보이는 다리 위가 포인트라 한참을 서성거렸다. 찔레꽃 향기는 신록에 묻어나는 바람을 타고 이유 없이 내 가슴에 안긴다. 익을대로 익은 매혹적인 향기다. 도란도란 흐르는 개울물은 차 소음마저 잠재우고, 냇가에 앉았던 두루미 한 마리는 내 마음처럼 푸른 숲을 날아 하늘로 훠이훠이 오르고 있다.

거대한 영취산은 노년기의 완만한 우리나라의 산들과는 너무 달라 이국적인 묘한 맛이 든다. 마치 성난 독수리가 날개깃을 갈기갈기 세우고 있는 듯하다. 그 사나운 독수리 품 안에서 새근새근 숨쉬고 있는 것이 통도사와 여러 암자들이다. 나는 통도사 13암자 중 3대 암자는 자장암, 극락암, 백운암이라 생각한다.

극락암부터 올랐다. 극락암을 오르는 길 옆에는 하얀 찔레꽃이 어찌나 유혹하는지 발길은 논두렁 찔레꽃에 이끌렸다. 주위는 찔레꽃 천지였다. 나는 꽃 옆에 하염없이 앉아 영취산을 바라보며 극락의 향기를 맡고 있었다.

또 조금 오르자 풋풋한 신록에 하얀 감자 꽃이 성숙하게 피어 농부의 손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성숙기를 지난 시금치는 소금 절인 배추처럼 흐느적거리고 무 장다리는 하얀 소금을 뿌려 놓은 듯한데 바람은 왜 이리 부드럽게 가슴에 안기는지.

여기서 올려다 본 백운암은 극락 속에 묻혀 있는 듯하다. 나는 솔바람을 가슴에 안고 쭉쭉 뻗은 소나무, 붉은 색의 연등 길을 천천히 오르고 있다. 지금 이 순간이 극락이고 도로를 내어 왜 차만 빨리 극락에 오르게 했을까. 극락암을 가는 마지막 오르막에 교행하는 차 때문에 서 있는데 오르는 차는 시커먼 매연을 한 아름 뿜고는 올라간다. 순간 입을 닫고 숨을 멈추고 한참만에야 토해냈다. 아! 극락 가기가 쉬운 것이 아니구나.

극락암 주차장은 이승의 차들로 빽빽했다. 지금의 극락에 차로 바로 갈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극락암은 속세처럼 붐빈다. 무지개형 극락 계단에 겁 없는 아이들이 잘도 오른다.

여여문(如如門)을 지나 극락암에 이르자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진다. 극락에도 비는 오구나. 경봉 선사가 머물렀던 삼소굴(三笑窟)에 이르자 빗방울은 더욱 굵게 굵게 내린다. 옥잠화는 빗속에 너울너울 흔들리고 철쭉도 옥매화도 시들었는데 붉은 해당화만 선사의 향기가 되어 빗속을 퍼진다. 비로암으로 가는 길은 그리움이 일렁일 만했는데 웅장 거대하여 곧 바로 발길을 돌려 자장암으로 향했다.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암자 백운암은 아쉬움을 남긴 채 발길을 돌렸다.

한적한 여유 자장암

나는 통도사 여러 암자 중 자장암을 가장 많이 왔었다. 높은 산을 오르거나 험하지도 않고 적당한 거리의 한적함 때문이고 암자 밑의 계곡 반석이 운치가 있어 자주 찾았다.

봉고차 두 대가 계속 사람을 태워 날랐다. 예전 수더분하던 분위기의 자장암은 많이 정비하여 운치는 감소되었지만 마애불이 있는 관음전과 요사채 영역은 앙징한 그리움이 여전하다.

대찰 통도사에 이상하리만치 마애불이 없는데 단 하나 있는 곳이 이 자장암이다. 해가 서산에 기울면 사라지듯 나라가 서서히 망해가면 문화도 시들게 마련이다. 조선 말(1896년)에 새긴 삼존불은 민화 같은 소박미가 있어 웃음이 절로 나오지만 마애불로서는 유치찬란하다. 관음전 안에는 바위를 그대로 살리며 지은 건물이 자연스러운 정겨움을 준다.

마애불과 관음전 뒤에 가면 통도사 창건주 자장 스님이 옹달샘에 물 뜨러 갔을 때 보았던 금개구리가 머물 수 있도록 손가락으로 구멍을 뚫어 놓은 구멍바위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금개구리를 보고 있었다. 구멍에 나와 건너편 댓잎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산천을 풋풋하게 익히는 싱싱한 초록처럼 마냥 오동통통 맑은 녹색이 감도는 금개구리였다. 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고 열심히 찾고 있다. 누군가가 "나쁜 짓 하거나 바람 피운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고 몇 번이나 말한다. 예전에 나는 구멍바위 안에 있는 금개구리를 보았고, 오늘 또 보았으니 내가 나쁜 놈은 아닌가 보다. 모두들 현세에서는 감동으로 살고 죽어서는 극락 가길…. 자장암 관음전 앞에서 서쪽 극락암과 백운암을 보니 살아있는 극락이었다.

자장 스님은 누구인가

자장은 신분사회 신라에서 상층 귀족 출신이었다. 큰 사람들은 태몽부터 달라야 신비감에 쌓인다.

아들 없어 걱정하던 근암공 최옥이 정자에서 글을 읽고 있는데 과부 한씨 부인이 날은 저물어 불빛을 찾아 왔다며 하룻밤 잠을 청한다. 서화담이 황진이에게 그랬듯이 최옥도 허락한다. 목욕재계하고 단정히 앉은 한씨 부인은 며칠 전 정신이 아득하고 해가 품안에 들어와 몸을 감싸더니 30리 밖 근암공 집으로 들어가서 감히 찾아 왔다고 말한다. 이날 두 사람이 합궁하여 낳은 아이가 천도교 창시자 수운 최제우다.

자장의 어머님도 별이 떨어져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낳은 아이가 자장이다. 태어난 날도 석가와 같은 날이어서 이름을 선종랑(善宗郞)이라 했다. 속세에 물들지 않고 의지는 굳세고 성품은 맑고 슬기로웠다.

일찍 부모를 잃었을 때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들은 일찍 허무를 느껴 대개 종교에 귀의한다. 유학자 율곡도 한때 불도에 심취했고, 인생의 쓴맛, 단맛, 다 맛본 추사 김정희도 말년에 불도에 귀의하며 인생을 마감했다.

조숙했던 자장도 일찍 부모를 여읜 슬픔으로 속세에 염증을 느껴 처자식을 버리고 재산 모두를 털어 원녕사를 세운다. 주변에 가시 울타리를 쳐놓고 알몸으로 조금만 움직여도 가시에 찔리도록 하여 무섭게 수도하였고, 머리를 들보에 매달아 혼미한 정신을 쫓는 혹독한 수련을 하였다.

재상(국무총리)으로 여러 차례 불렀으나 '오녕일일지계이사, 불원백년파계이생(吾寧一日持戒而死, 不願百年破戒而生, 내 차라리 단 하루를 살더라도 계를 지키다가 죽을지언정, 파계하여 백년을 살지 않겠다)'이라는 단호함에는 찬바람이 쌩쌩 돈다. 이런 독선적 수행은 자신도 남도 구제하지 못한다. 한계를 느낀 자장은 선덕여왕 5년(636)에 왕명으로 국비 장학생이 되어 일행 10여 명과 중국 유학길에 오른다. 천재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오만함과 독불장군의 경향을 자장도 피해가지 못했다. 추사 김정희가 왜 내가 미개한 조선에 태어났냐고 한탄했듯이, 자장도 변방 신라에 태어난 것을 한탄하며 중국에 유학을 갔던 것이다.

위기에 처한 선덕은 유학 7년 만인 634년 자장을 귀국시키고 국통으로 삼아 호국불교로 신라를 부강하게 한다. 아무리 완벽한 원칙주의자들도 스스로의 꾀에 무너지듯이 태백산 정암사서 지혜의 화신 문수보살을 알아보지 못하고 지혜를 쫓다 쓰러져 죽는다. 부처도 "스스로 해탈하지 못했더라도 우선 남을 제도하라" 했는데 어리석고 부족한 우리들은 무엇으로 남에게 감동을 줄 것인가….

/ 입력시간: 2007. 05.31. 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