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흔적을 찾아서] (55) 통도사와 부처님 진신사리
금강계단 걸친 금빛 햇살 산산이 부서졌다 모였다… / 글사진 이재호 기행작가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대한민국 사람 치고 이 노래에 가슴 찡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고향을 떠올릴 때 가슴 메는 영원한 고향의 노래이다. 이 노래를 작사한 이원수가 양산의 고향을 떠올리며 부른 노래다. 양산하면 통도사가 유명하다. 마치 합천 해인사, 보은 속리산, 동래온천, 온양온천, 하동 쌍계사, 부여 낙화암, 광주 무등산, 강릉 경포대, 경주 불국사 하듯이 말이다. 그 양산도 부산 근교에 있다는 이유로 산천경관과 환경은 망쳐버렸다. 지금 양산은 배냇골 일부와 내원사, 그리고 여기 양산 통도사 안쪽만이 봉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피던 옛 양산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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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토요일은 늦은 봄비가 촉촉이 대지를 적시더니만 오늘은 싱그러운 풀내음만 온 산천을 뒤덮고 있다. 경주박물관대학 26기, 27기 130여 명의 학생들과 함께 통도사에 왔다. 일주문에서 계곡을 끼고 걸어가는 아름다운 통도사를 맛보여 주려고 걸어가려 하다가 오전 내내 천전리 각석과 반구대 암각화까지 걸어갔기에 곧바로 일주문 안 주차장까지 차를 타고 갔다. 더위를 피해 냇가에 발 담그는 여인, 잘 익은 수박을 쪼개놓고 행복해하는 가족들은 정겨운데 팔, 다리 쩍 벌리고 누워 자는 남자는 아마도 강심장을 지녔는가 보다. 구름다리 건너 일주문 앞에 섰다. 일주문은 사찰에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인데 흩어진 마음, 세속의 번뇌를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상징적 의미을 지닌 문이고, 온갖 잡탕의 세속에서 아득한 수미산으로 가는 첫 번째 관문이다. 4월 초파일이 얼마 남지 않아 형형색색의 연등이 줄을 이어 매달려 있다. 사라졌던 우리 산천의 '울긋불긋 꽃동네'가 여기에 모여 있었구나(?).
통도사 이름은 세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선 거대한 병풍 같이 감싸고 있는 영취산 모습이 부처님이 설법하시던 인도의 영취산 모습과 통하고, 스님이 되려면 모두 이곳의 금강계단(金剛戒壇)을 통하고, 만법을 통하여 일체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에서 붙여졌다고 한다. 팔만대장경을 간직한 해인사가 법보종찰, 16국사를 배출한 송광사가 승보종찰, 석가여래의 진신사리와 부처님이 몸에 걸쳤던 가사를 봉안하여 부처가 상주하는 불보종찰 통도사를 삼보(三寶)사찰이라 한다.
천왕문을 지나자 극락전이 살짝 버티고 있는데 동쪽 벽면에 수수한 회청색으로 미감(美感)이 좋은 반야용선 벽화가 발길을 잡는다. 죽어서 저 배를 탈 수 있는 사람은 대단한 행운이다. 이 세상에서 착하게 살고 좋은 일 많이 한 사람만이 탈 수 있다. 그래서 누구나 희망하는 극락행 호화여객선인 것이다. 배 안의 사람들은 꽃이 피는 아름다운 얼굴에 향기가 묻어난다. 부처님과 탑도 같이 배에 동승하고 있으니 이보다 더 확실한 보장이 있겠는가. 우리 모두 죽어서 저 배를 탈 수 있도록 아름답게 살자. 그러나 삭막한 현실에도 마음의 눈만 열면 '극락' 아닌 것이 없다. 흐르는 물이, 풋풋한 신록이, 흘러가는 구름이, 허공의 달이, 가슴을 적시는 바람이, 한 떨기 떨고 있는 꽃잎이, 너와 나 아름다운 대화가 '극락' 아닌 것이 없다.
▲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 |
사리신앙
삼국유사에는 이 땅에 사리를 가져온 사연을 소상하게 밝혀 놓았다. 진흥왕 15년(549)에 양나라 사신 심호(沈湖)가 사리 몇 알을 최초로 갖고 왔고, 선덕여왕 11년(643)에 자장 스님이 부처의 두개골과 부처의 어금니와 부처의 사리 100개, 자줏빛 비단에 금색 점이 있는 부처가 입던 가사 한 벌을 가지고 왔다. 이 사리를 셋으로 나누어 황룡사탑, 울산 태화탑, 그리고 여기 통도사 계단(戒壇)에 부처의 가사와 함께 보관했다. 통도사 계단은 두 층으로 되어 있으며, 위층 가운데는 돌 뚜껑을 모셔두었는데, 마치 가마솥을 엎어놓은 것 같았다고 기록해 놓았다. 신라 46대 문성왕 12년(851)에 당나라 사신으로 갔던 원홍(元弘)이 부처의 어금니를 가져왔고, 고려 예종14년(1119)에 송나라에 입공사(入貢使)로 갔던 정극영과 이지미 등이 부처의 어금니를 가져왔다.
송(宋)의 화가 미불(米)이 썼다는 '불이문(不二門)' 현판, 원나라 사신이 머물렀던 황화각(皇華閣), 미륵을 모신 용화전(龍華殿)을 지나 결코 부서지지 않는 금강계단 앞에 섰다. 대웅전이긴 하지만 부처가 없다. 저 뒤에 금강계단 사리탑에 부처의 진신 사리를 모셔놓았기 때문이다. 삼성각 앞에는 앙징스럽고 귀여운 조그마한 연못이 푸른 이끼를 머금고 있었다. 창건주 자장 스님이 통도사를 창건할 때 9마리 용이 있었는데 자장 스님이 불력으로 못의 물을 펄펄 끓게 했다. 8마리 용들은 도망갔으나 아! 한 마리의 눈먼 용이 절을 잘 지킬 테니 살려달라고 애원하여 이곳에 머물게 했던 것이다. 저 물 속에 아직도 눈먼 용이 절을 지키면서 우리를 반기고 있다.
▲ 극락전의 동쪽 벽면에 있는 반야용선 벽화. |
사리의 수난
담 너머로 본 금강계단은 수없이 달아놓은 연등 속에서 서산에 넘어가는 햇살을 받으며 고요히 머물고 있었다. 귀한 것은 누구나 탐을 내듯이 여기에 모셔둔 부처의 화신인 진신 사리도 모진 수난을 당한다.
고려 초 지방 장관 두 사람이 이 금강계단에 참배하고 공손히 돌 뚜껑을 들었는데 구렁이가 돌 상자 속에 있었고, 또 열었으나 이번에는 큰 두꺼비가 있어 감히 뚜껑을 열지 못하였다. 몽골이 유라시아 대륙을 휘젓고 다닐 때 고려도 몽고의 말발굽 아래 모진 수난을 당한다. 이 시기인 고려 고종 22년(1235) 왕의 칙명을 받은 상장군 김이생(金利生)과 시랑 유석(庾碩)이 참배했을 때는 사리는 네 개뿐이었다. 이것을 삼국유사에서는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사리 100개 중(3분의 1식 하더라도 33과가 되는데) 4과뿐인 것은 보는 사람에 따라 숨겨지기도 하고 나타나기도 하여 많고 적고 할 뿐이니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못 된다고 하였다.
원의 지배가 들어간 시기에는(1264년) 몽골(元) 황실과 고려 왕실의 사신들이 끊임없이 첨례(瞻禮)하였다. 이때도 진신 사리는 네 개가 있었고 사리 대용품인 변신사리(變身舍利)는 모래와 같이 부서져서 돌솥 밖으로 나왔는데, 이상한 향기가 며칠 동안이나 강렬히 풍겼다.
고려 말기 삼남지방 해안가에는 왜구의 노략질이 심했다. 우왕 3년(1377), 우왕 5년(1379), 두 번에 걸쳐 왜구가 진신 사리를 발굴 탈취해 가려 하여 주지 월송(月松) 대사가 이를 짊어지고 산속으로 달아나 겨우 화를 면하고 안전한 수도 개성으로 옮겼다. 당시 재상 이득분(李得芬)의 주선으로 왕실 원찰 개성 송림사에 봉안하는데 부처의 정골 하나, 사리 넷, 비라금점 가사 하나, 보리수 잎 약간이 전부였다.
고려를 무너뜨린 태조 이성계는 송림사 진신 사리를 자신의 수릉(壽陵)인 정릉의 원찰이었던 서울 홍천사 사리각 석탑에 보관한다. 태종은 첫째 둘째아들을 제치고 셋째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명나라의 책봉에 가슴 조였는데 명이 흔쾌히 처리해준 뒤 환관 출신으로 명의 칙사로 왔던 황엄이 사리를 요구하자 극단적인 배불 정책자답게 전국의 사리 558과를 몽땅 모아 주어버린다. 이렇게 하여 자장 스님이 643년 갖고 왔던 진신 사리는 중국으로 옮겨졌다.
1592년 부산포로 침입한 왜적은 통도사 진신 사리를 탈취한다. 그런데 개성으로 갔다가 중국으로 간 사리가 어찌된 영문인지 있었다는 것이다. 왜적에 탈취당한 사리는 포로로 잡혀 있던 동래 사인(士人) 백옥 거사가 선조 36년(1603) 되찾아 와서 다시 통도사 금강계단에 모시고 오늘에 이른다. 알 수 없는 한 줄기 고운 바람이 향기 머금고 맴돈다.
/ 입력시간: 2007. 05.17. 09: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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