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박철순 등)

[스크랩] <한국 야구는 왜 장훈을 기억하지 않나>

도깨비-1 2007. 5. 4. 21:54
뉴스: <한국 야구는 왜 장훈을 기억하지 않나>
출처: 오마이뉴스 2007.05.04 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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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이정래 기자] 메이저리그 영웅이 된 재키 로빈슨

극심한 인종 차별로 메이저리그에서 흑인선수들이 사라진 1887년 이후 최초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흑인선수는 재키 로빈슨이다. 1947년 브루클린 다저스(LA다저스의 전신)의 단장이었던 브랜치 리키는 재능이 넘치는 선수라면 피부색과는 상관없이 메이저리그에서 뛰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물론 흥행이라는 사업적인 측면을 고려한 일이었지만 브랜치 리키의 이같은 신념은 재키 로빈슨을 만나면서 결실을 맺게 된다.

재키 로빈슨이 관중들의 심한 야유와 모욕을 참아낼 줄 아는 인내심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면,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최악의 여건 속에서도 자신의 야구를 해나가는 용기를 가지지 못했다면 아마도 브랜치 리키의 위대한 도전은 실패로 끝났을 것이고 메이저리그의 인종의 장벽은 더욱 높아졌을 것이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재키 로빈슨이 데뷔한 지 50주년이 되는 1997년 그의 등번호 42번을 메이저리그에서 영구 결번시켰으며 2004년에는 4월 15일을 재키 로빈슨 데이로 지정했다. 4월 15일은 재키 로빈슨이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날이다.

올 시즌 재키 로빈슨 데이는 좀 더 특별했다. 재키 로빈슨의 데뷔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영구 결번인 42번이 새겨진 유니폼을 이날 하루 원하는 선수들이 입고 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많은 슈퍼스타들이 이날 42번을 달고 경기를 했으며 재키 로빈슨의 팀 다저스는 선수 전원이 42번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나서기도 했다.

영웅을 기록하고 기념할 줄 아는 메이저리그의 이같은 노력은 재키 로빈슨이 데뷔한 지 60년이 지났고 세상을 떠난 지 35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를 사람들의 가슴속에 살아있게 만들었다.

차별과 싸운 또 다른 영웅 장훈

▲ 일본에 진출한 이승엽 선수를 만난 장훈 선수
ⓒ2007 지바롯데 홈페이지

일전에 필자는 다른 매체를 통해 일본 프로야구에서 활약했던 장훈(일본명: 하리모토 이사오)선수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그에 대한 글을 쓸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답답하지만 그렇다고 장훈에 대한 글 쓰는 것을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본 프로야구에서 23시즌을 뛰는 동안 2752경기에 출장해서 3085개의 안타와 504개의 홈런을 기록했으며 0.319의 통산타율과 1676타점을 기록한 장훈은 단지 야구 잘하는 일본 프로야구 선수가 아니었다. 장훈은 60년대와 70년대의 극심했던 재일동포들에 대한 멸시와 차별에 온몸으로 맞서 싸워왔던 선수다.

장훈이 나니와상고를 졸업하고 프로야구팀인 도에이 플라이어스에 입단했던 1959년에는 한국인이 귀화하지 않고 일본 프로야구에서 뛴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던 시절이었다. 어려서부터 차별을 겪으면서 야구를 했던 장훈은 자신이 멸시받는 이유가 단지 조선인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장훈은 끝내 귀화하지 않았다. 오가와 구단주의 간곡한 설득에 흔들린 것이 사실이지만 '편하게 살자고 조국을 버릴 거면 그따위 야구를 당장 때려치고 히로시마로 내려오라' 며 호통치셨던 어머니 박순분 여사는, 잠시나마 흔들렸던 장훈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단바라의 깡패'라고 불렸던 어린 시절에는 자신을 멸시하는 일본인 학생들을 주먹으로 때려눕혔지만 주먹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를 진학하는 것조차 힘들었을 정도로 극심한 차별을 경험했던 장훈이 프로에서 자신이 받을 온갖 멸시와 불이익이 불 보듯 뻔함에도 귀화를 하지 않고 버텨나갈 수 있었던 데에는 조국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항상 가슴속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교시절 처음으로 조국 땅에 발을 내디뎠을 때 장훈은 '영혼 속부터 뒤흔들려지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장훈이 조국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 만들었던 계기가 된 것이다.

장훈은 이유있는 싸움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절대로 피하지 않았다. 장훈은 당연히(?) 심한 견제를 받았다. 하지만 뻔히 눈에 보이는 위험한 투구를 하는 일본 투수들을 장훈은 가만 놔두지 않았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장훈은 수만명의 일본인들 앞에서 당당하게 " 내가 치는 안타와 홈런은 자랑스런 우리 조선동포들을 차별하는 비열한 일본인들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시원한 복수다 " 라고 수훈 선수 인터뷰를 했을 만큼 불 같은 성격을 지닌 투사였다.

장훈은 선수 생활의 마지막 시기였던 1980년 3000안타라는 대기록에 불과 30여개를 남긴 상태에서 요미우리에서 롯데로 트레이드되는, 이해하기 힘든 일을 겪기도 했다. 1981년 장훈은 3085안타를 끝으로 전쟁 같이 치열했던 그라운드를 내려왔다.

조국에서 초라하게 잊혀져가는 장훈에 대한 안타까움

1990년 7월 24일 장훈은 일본 프로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지만 재키 로빈슨이 메이저리그 팬들에게 존중받는 만큼 그런 존경을 받지는 못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장훈은 일본인이 아닌 외국인이었고 또 때로는 과격하게 일본인들과 맞서 싸운 거친 선수였기 때문에 대기록을 세운 한국인 정도로만 기억한다고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장훈으로 하여금 부당한 차별에 당당하게 맞서 싸울 수 있게 만들었던 자랑스러운 조국은 그를 기념하고 있을까? 부끄럽지만 그를 기념하는 그 어떤 것도 이 땅에는 없다. '하리모토 이사오'는 일본 프로야구 선수였기 때문에 특별히 한국에서 기념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왜 이 나라 야구계는 장훈을 외면하는 것일까.

평생을 차별과 당당히 맞서 싸우면서 3000안타 500홈런을 친 귀화하지 않은 한국인 장훈의 고집으로 이후 일본에서 나고 자란 재일동포 야구선수들이 굳이 귀화하지 않고도 외국인 선수 적용을 받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이제 그들이 조국을 바꾸지 않아도 야구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장훈을 이렇게 초라하게 잊혀져 가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4월 15일 한국의 거의 모든 신문에서는 '재키 로빈슨 데이'를 보도하고 42번이 영구결번이 된 사연과 재키 로빈슨의 위대한 업적을 보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장훈이 언제 데뷔했는지 언제 3000안타를 기록했고 언제 은퇴를 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심지어 장훈의 등번호가 몇 번인지조차 모르고 있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아서가 아니다. 재키 로빈슨이 세상을 떠난 지 35년이 지난 지금에도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살아있게 만든 것은 팬들의 뜨거운 관심이 아니라 재키 로빈슨을 잊혀지지 않게 하기 위한 메이저리그 사무국의 배려였다.

장훈의 등번호 10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할 수는 없어도 5월 28일 장훈이 3000개의 안타를 친 날을 한국 프로야구가 '장훈의 날'로 지정을 해서 일년에 하루만이라도 장훈 선생을 사람들이 기억해 주길 바라는 것은, 필자의 도가 지나친 욕심일까.

/이정래 기자

 

덧붙이는 글 이 기사에는 장훈 선생의 자서전 < 일본을 이긴 한국인 > (성일만 엮음·평단문화사)의 본문 내용 중 일부가 인용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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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님 : 피는 물보다 진하다 -張 勳 [14]

번호 12287I 2007.05.19

 

지난주만 하더라도 슬럼프에 빠져 많은 이들의 가슴을 애태우게 했던 이승엽 선수

비로소 제 모습을 찾아가는 모습에 안도감과 함께 떠오르는 이가 한 명 있습니다

그 사람의 조언으로 부활하다..라는 신문기사도 나왔더군요

공식적으로 조언받았다고하지만 밖에선 이승엽 본인에게 비공식적인 도움이 너무나 클것으로 예상을

합니다 공식적이니까 기사화 되지만 비공식적부분은 이승엽 선수도 함구 할수밖에 없는 것도 많을거라 생각해요 누가 뭐래도 아직은 차별이 있는 편견도 있는 그곳은 일본이니까요

그도 한국인이기에 피는 물보다 진하기에 이승엽에게 진정어린 애정 어린 조력자일 것입니다

장 훈.. 日本을 이긴 한국인-1940년 6월 19일生 부모의 고향은 경남

1959년  도에이 플라이어즈 입단 첫해 4번타자로 신인왕 수상

61년 첫 타격왕

1967,68,69,70,72,74년 통산 7차례 수위타자

1962년에는 퍼시픽리그 MVP 수상

1976년 巨人팀으로 이적

1980년 3천안타 달성

1981년 은퇴

1990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됨

아시아 안타수 최고기록 보유자(3085개)

이런 기록이 불구의 몸에서 나왔다는건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은것 같습니다

또한 당시 한국인의 신분으로 갖은 적의,편견,차별을 이겨낸 사람이기에 야구선수이전에 불굴의 집념의 한 사람 장 훈씨에게 우리는 박수를 보내는 것 같습니다

비슷한 세대의 사람이나 야구 전문가가 아닌이상 그에 대해서 크게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면 아마 잘 모를거예요

그가 네 살때 어느 추운 겨울 날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여서 일본 전국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을때

그날도 모닥불 주위에 웅크리고 앉아 고구마가 익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트럭 한대가 후진해서 그를 덮치고 말았습니다 그 트럭에 떠밀려 그는 불더미 속으로 오른손을 넣고 말았었죠

그 사고로 오른손은 약지와 새끼 손가락이 붙었고 엄지와 인지가 심하게 굽어버리게 됐죠

오른손잡이였던 그가 왼손잡이로 바꾸어야만 했고 장거리 타자가 아닌 중장거리 타자로 어쩔수 없이 전향해야 했던 장 훈..그 오른손이 그의 영광과 굴욕을 동시에 주었던 것입니다

그 사고로 평생 동안 그 부분이 컴플렉스가 된 장 훈..

그가 가장 존경하는 가와카미에게 딱 한번 보여 준것 말고는 어머니에게까지 그 손은 보여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야구선수로서 명성을 떨칠때도 NHK에서 취재 요청이 왔을때도 물론 끝까지 보여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실 그가 야구선수 특히 프로 야구 선수가 될려고 한건 극히 단순한 이유였습니다

당시에는 그것이 필연의 이유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 이유는 프로야구선수들이 따뜻한 난로가에 앉아서 고기와 계란을 서너개씩 집어 먹는 모습을 보고 프로선수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장 훈 왈 :" 정말 굉장한데~" 이랬다고 합니다 ㅎㅎㅎㅎ

그는 원래 투수 출신이였습니다 그만큼 운동 신경이 남달랐죠

그는 스포츠에 만능이었어요 특히 수영은 선수급일 정도로 발군이였다고 합니다

또 그가 야쿠자가 될뻔하기도 했지요 실제 그의 절친한 친구 야마모토는 야쿠자 두목이었고요

학교에서 주먹이라면 그 누구도 능가하지 못할 정도의 파워맨이였다고 합니다

운동장 하나를 야구부가 항상 차지했던 이유도 축구,배구부에서 그의 주먹을 능가하지 못했던거죠

그로인해 그의 진로에 악영향을 주기도 했습니다

폭력성 있는 학생으로 찍혔던거죠

하지만 그 위기의 순간 마다 그를 일으켜 준이가 바로 그의 어머니 한국인 어머니였습니다 한사코 한국인이길 고집했던것도 그의 어머니 영향 때문이죠 그리고 그의 형 그리고 많은 조력자들 운명의 장난인지 그를 도아준 이들은 아직도 미스테리한 부분도 있다고 합니다(그 부분은 차후 기회 있으면 글올릴께요)

그만큼 인복이 있다고 말할수밖에요

그런면에서 이승엽 선수도 인복이 참 많은 사람이 아닌가 합니다

왕정치,나가시마..現 일본야구의 대부격인 이런분들도 이승엽을 좋게 보는 이유가 아닐까해요

왕짱(왕정치의 애칭)-장훈씨는 왕정치를 이렇게 부른다고 합니다ㅎㅎ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 모르겠지만요ㅎㅎ그러고보니 그래서 승짱 이란 말도 나왔는지도 모르겠네요ㅎㅎㅎㅎ

왕정치와도 절친한 친구 사이여서 이승엽 선수 얘기도 많이 하나봅니다

왕정치 감독의 나이가 장훈씨와 똑같아요 장훈씨보다 한달하고 하루 빨리 태어 난걸로 알고 있습니다

말이 다른데로  흘렀네요 이승엽선수 물론 실력도 있지만 인품면에서 인정 받기에 그를 도와주는 이도 많은게 아닌가 봅니다

가끔 이런글 올리면서 생각한건 여기 토론방은 좋은분들이 대부분이지만 몇몇의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때문에 불쾌한적이 많았어요

자신의 허물은 보지 못하고 비판을 위한 비판을 일삼는 그런 작자들의 행태를 보면 오고 싶지 않은 생각이 절로 들더군요

그런 몇몇의 사람을 보고 또 느낀건 영화 "식스 센스"가 생각났어요

브루스 윌리스 주연의 영화 다들 아시죠?

지가 귀신이면서 귀신인줄도 모르고 남 걱정하고 별의별 간섭 다하고 별 짓거리 다하는 행동들 말이죠

왜 자신들이 많은이들에게 욕먹는지 모르는게 똑같은것 같아요ㅎㅎㅎㅎ우끼지 않습니까ㅎㅎㅎㅎ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는것 같아요 그런 몇몇 사람들요ㅎㅎ

다음에 기회가 있다면 관심있는 선수 또는 감독 등등 글 올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즐거운 주말 되셔요~

(원글)

 http://bbs.sports.media.daum.net/gaia/do/sports/bbs/group2/jbaseball/read?bbsId=F010&articleId=12287

 

 

 

 

通算打撃成績

  • 太字はリーグトップ。

年度 所属 試合 打数 得点 安打 二塁打 三塁打 本塁打 塁打 打点 盗塁 四死球 三振 打率
1959年 東映 125 418 48 115 18 5 13 182 57 10 34 54 .275(16)
1960年 106 384 49 116 25 3 16 195 56 15 29 56 .302(4)
1961年 129 473 77 159 31 10 24 282 95 18 51 42 .336(1)
1962年 133 472 89 157 24 4 31 282 99 23 90 46 .333(4)
1963年 150 529 90 148 16 7 33 277 96 41 95 47 .280(10)
1964年 129 461 85 151 21 6 21 247 72 31 79 42 .328(2)
1965年 132 455 61 133 13 3 23 221 88 29 76 37 .292(6)
1966年 122 443 67 146 13 2 28 247 90 10 45 31 .330(2)
1967年 120 414 72 139 18 3 28 247 88 18 76 30 .336(1)
1968年 114 363 70 122 12 2 24 210 65 13 65 20 .336(1)
1969年 129 480 77 160 27 1 20 249 67 20 73 33 .333(1)
1970年 125 459 92 176 16 2 34 298 100 16 72 36 .383(1)
1971年 128 480 73 150 21 3 26 255 78 18 61 32 .313(7)
1972年 127 472 93 169 25 4 31 295 89 10 72 37 .358(1)
1973年 日拓 128 441 77 143 18 0 33 260 93 12 99 32 .324(2)
1974年 日本ハム 120 406 64 138 20 3 14 206 62 14 83 28 .340(1)
1975年 119 410 45 113 12 2 15 174 46 6 59 26 .276(15)
1976年 巨人 130 513 89 182 35 5 22 293 93 8 55 44 .355(2)
1977年 122 440 67 153 16 6 24 253 82 3 46 37 .348(2)
1978年 115 424 53 131 17 1 21 213 73 1 28 39 .309(12)
1979年 77 228 26 60 7 0 8 91 32 1 24 21 .263
1980年 ロッテ 102 341 50 89 9 0 12 134 39 0 28 31 .261
1981年 70 169 9 35 6 0 3 50 16 2 12 14 .219
通算 2752 9666 1523 3085 420 72 504 5161 1676 319 1352 815 .319


  • 通算試合 2752試合(歴代3位)
  • 通算打率 .31915(歴代4位) ※7000打数以上では、歴代1位。
  • 通算打数 9666打数(歴代2位)
  • 通算得点 1523点(歴代3位)
  • 通算安打 3085本(歴代1位) ※通算3000本安打を達成しているのは日本プロ野球史上、張本のみ。
  • 通算二塁打 420本(歴代5位)
  • 通算三塁打 72本(歴代9位)
  • 通算本塁打 504本(歴代7位)
  • 通算塁打 5161本(歴代3位)
  • 通算打点 1676打点(歴代4位)
  • 通算盗塁 319盗塁(歴代21位)
  • 通算犠打 4個
  • 通算犠飛 90本(歴代5位)
  • 通算四球 1274個(歴代3位)
  • 通算死球 78個
  • 通算三振 815三振
  • 通算併殺打 145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