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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무너져 간 조선왕조와 사라져야만 하는 '덕수궁'.

도깨비-1 2007. 2. 11. 23:37

사적 제 124호, 덕수궁. 창덕궁, 경복궁, 창경궁 등과 함께 조선 왕실의 흥망성쇠의 기운을 그대로 담고 있는 덕수궁은 내가 가본 조선 왕조의 궁궐 중에서 가장 쓸쓸하고 초라한 곳이었다. 창덕궁이 거대한 규모와 후원으로 그 아름다움을 찬란히 뽐낼 때, 경복궁이 조선 왕실을 대표하는 왕권의 상징으로 여전히 그 명성을 떨치고 있을 때 덕수궁만이 쓸쓸히 무너져내린 조선왕조와 명운을 같이 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 궁궐 중 그 모양새를 제대로 보존하고 있는 곳이 과연 몇이나 되겠느냐만은 덕수궁만은 특히 훼손의 정도가 심하다. 일제시대부터 마구잡이식으로 망가지고 무너져내린 이 궁궐은 해방 이 후에도 서울시에 의해 공원화 되는 등 유적지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이런저런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마치 자신의 주인이었던 고종황제의 운명을 쏙 빼닮은 것처럼.

 

 

 

그래서 내가 기분이 쓸쓸하고 울적할 때 자주 들리는 곳이 바로 덕수궁이다. 그 쓸쓸함을, 그 황량함을, 뼈에 사무치는 그 외로움을 가장 잘 이해해 줄 수 있는 곳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일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궁궐에 앉아서 나는 조선왕조와 이야기 하고, 그들의 아픔을 이야기하고, 지금 이 시대를 돌아보는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왜 덕수궁은 조선왕조의 쓸쓸함을 유독 가지고 있는 곳일까. 그리고 나는 왜 그 쓸쓸함을 사랑하면서도 '덕수궁' 이 없어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일까. 지금부터 그에 대한 해답을 차근차근 알아보기로 하자.

 

 

 

 

우선 덕수궁 내 건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겠다. 덕수궁의 '쓸쓸함' 은 이 건물들이 가지고 있는, 이 건물들이 겪은 조선왕조의 흥망성쇠와 크나큰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첫번째로 이야기 할 건물은 바로 '준명당' 이라는 곳이다.

 

 

 

이 준명당은 덕수궁 내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물 중 하나다. 말년 일본에 의해 '황제 아닌 황제' 로 전락한 고종이 60세에 얻은 딸, 덕혜옹주의 재롱을 보며 가슴에 위안 삼았던 이곳은 산산히 조각나고 있던 그 시대, 그 나라가 가지고 있는 쓸쓸함과 희망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고종은 덕혜옹주를 너무나도 이뻐해 이 곳을 그 분의 유치원으로도 사용했다고 하니 어쩌면 이 건물이 우리나라 '최초의 유치원' 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준명당에서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2층으로 된 건물이 하나 보인다. 이 건물은 바로 '석어당' 으로써 광해군 시절 인목대비의 유폐처이기도 하다. 이른바 '서궁' 으로 불리던 이 덕수궁에서 인목대비는 아들 영창대군을 빼앗기고 통한의 세월을 보낼 수 밖에 없었는데 <계축일기> 를 보면 당시 인목대비의 삶이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를 단박에 알 수 있을 것이다.

 

 

광해군은 분명 외교와 내치면에서 상당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으나 이이첨 등을 위시한 북인세력에 자신의 정치권력 상당수를 내 줄수 밖에 없었던 비운의 왕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그는 결국 자신의 정치적 반대세력의 핵심인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을 유폐, 사살함으로써 왕으로서 자신의 근간을 확립하는 무리수를 둘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론적으로 보자면 그의 왕권수호 '전략' 은 결국 서인과 그들을 위시한 인목대비에 의해 좌절됐고 그를 파멸로 이끌었다. '만 가지 선한일도 한 가지 악한일로 무너진다' 는 옛 선인의 말을 광해는 과연 마음 깊이 새기고 있었던 것일까. 어쨌든 석어당은 이러한 복잡한 조선 정치사의 한 가운데에 서 있던 '인목대비'의 피 맺힌 한을 지금까지도 절절히 담고 있는 대표적 건물이라 하겠다.

 

 

 

 

 

 

준명당에서 함녕전으로 빠져나가다 보면 '유현문' 이라는 문을 지나가게 된다. 이 유현문 역시 덕혜옹주에 대한 고종황제의 지극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문인데 이 문을 지나가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속설이 있다고 한다. 고종황제는 덕혜옹주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담아 이 문에 많은 관심을 가졌었다고. 지금도 가만히 이 문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가마를 타고 유유히 지나가는 덕혜옹주의 환상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고종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덕혜옹주는 일본인과의 강제 결혼과 그에 따른 정신병으로 죽을 때까지 조선 황실의 비운의 옹주로서 그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었으니 이 어찌 슬프지 않다고 할 수 있으랴.

 

 

 

 

 

유현문을 빠져나와 조금만 걸으면 함녕전이 있다. 고종의 침전이자 휴식처이기도 한 이곳은 일제에 의해 결국 고종이 독살당한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다.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강제 퇴위 당한 뒤, 이 곳 함녕전에서 한많은 생을 보내고 있던 고종은 결국 이 곳에서 독살이라는 지독한 방법으로 그 한많은 인생에 마침을 고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 식혜를 한잔 마시고 다급히 상궁나인을 불러 "이 식혜에 무엇을 넣었느냐!!!" 는 비명과 함께 쓰러진 고종을 생각하면 덕수궁 내에서 함녕전만큼 소름끼치게 쓸쓸해 보이는 곳도 없을 것이다. 고종은 오랜 재위기간 동안 아버지(대원군)와 아내(명성황후)에게 가로막혀 본격적으로 정치 전면에 나선 일은 드물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비전' 을 갖고 있지 않았다고 섣불리 판단하는 것은 금물이다. 그는 '쇄국' 과 '개항' 이라는 두 가지 이데올로기가 부딪히던 혼돈의 시기에 국가의 운명을 이끌어 나갔으며 대원군과 명성황후라는 걸출한 두 정치인 사이에서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기도 했다.

 

 

을미사변 이 후, 아관파천이라는 크나큰 실책을 저질렀음에도 그는 일본을 위시한 열강 세력의 침투에 맞설 '깡' 을 가지고 있었고 그 '깡' 이 헤이그 특사라는 놀라운 도전으로 이어졌다.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뒤에 기어코 고종까지 없앨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이처럼 당시 조선이 고종을 정신적 지주로 삼아 독립 의지를 불태웠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고종은 일본을 물리치지도,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지도 못한채 이 곳 함녕전에서 쓸쓸하게 쓰러져 버렸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3.1 운동이라는 숭고한 독립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으니 어찌 헛되다고만 할 수 있으랴. 고종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황제' 라는 지위에 지독히도 시달렸던, 그러나 그 운명을 거부하지 않고 시대에 당당히 맞선 조선의 위대한 '황제' 였다.

 

 

 

 

 

마지막으로 이야기 할 곳은 바로 광명문이다. 원래 함녕전의 정문이었으나 일제에 의해 남서쪽 방향으로 이전 된 이 광명문은 마구잡이 식으로 뜯어 다시 붙이는 바람에 훼손의 정도가 심하다. 예전의 그 찬란했던 위상은 어디간채 자격루와 범종의 전시처로 전락해 버린 이 문을 보자면 일제 치하 36년 세월이 얼마나 가혹했던 것인가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게 된다.

 

 

'잃어버린 36년' 은 비단 당시를 살아가던 사람들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이 광명문도 자신의 본분을 잃어버린채 초라하게 서 있으며 이제는 함녕전 정문으로 돌아가기에는 불가능해 보인다. 어쩜 이렇게 덕수궁의 건물들은 조선왕조의 쓸쓸한 명운처럼 황량하고 처량한 기운을 간직하고 있는 것일까.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날 정도로.

 

 

 

 

▲ 덕수궁의 입장권

 

[중화전, 함녕전 등 좋은 우리 건물을 놔두고 굳이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을 사진으로 썼다.

덕수궁은 우리의 궁궐이기에 '한국' 의 미를 보여줄 수 있는 사진을 쓰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토록 '쓸쓸한' 덕수궁을 사랑하면서도 덕수궁이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덕수궁은 본디 '덕수궁' 이 아니기 때문이다. 덕수궁이 사라져야 한다는 것은 '덕수궁' 이라는 이름이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야 한다. 원래의 이름인 '경운궁' 으로.

 

 

덕수궁은 강제 퇴위된 고종황제를 위해 일제가 '편안히 덕을 누리며 살라' 는 의미로 지은 이름이다. 즉, 힘 없고 무능한 황제는 이 곳에서 쉬기나 하라는 일제의 비웃음과 조롱이 담겨져 있는 것이며 '경운궁' 같은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에 불과하다. 왜, 우리는 아직도 경운궁을 '덕수궁' 이라는 잘못된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사람들에게 익숙하다고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 남대문을 숭례문이라 부르고, 역사왜곡을 시정하자고 소리 높이는 이 시대에 왜 덕수궁만큼은 마치 쓸쓸하게 남아있는 조선왕조의 한 귀퉁이처럼 다른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소외되어 있는 것인가!

 

 

그래서 나는 주장한다. 덕수궁은 사라져야 한다고. 덕수궁이 사라져야 '경운궁' 이 살아날 수 있다고.

 

 

덕수궁 바깥에는 엄청난 고층 건물들이 그 위세를 자랑하고 있고, 그 가운데 서울시의 모든 행정을 관리하는 서울시청이 마치 '지금의 궁궐' 인냥 위풍당당함을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명심해야 한다. 그들의 옆에 '경운궁' 이라고 불려야 하는 '덕수궁' 이 있다는 것을, 이 덕수궁에게 하루라도 빨리 본래의 이름을 돌려줘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는 너무나도 많은 것을 잊어버리고 산다. '덕수궁' 을 '경운궁' 으로 바꾸는 것이 무에 그리 큰 일이냐고 대꾸하는 사람들에게 "예전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그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 그 역사에서 미래를 보라." 고 말하고 싶다. 역사는 흘렀으나 그 역사를 다시 재창조하고 주도하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다.

 

 

바꾸자. 그리고 다시 보자. '경운궁' 으로 바뀐 덕수궁 만의 '조선' 을. 그 쓸쓸하고 황량했던, 그러나 치열하고 열정적이었던 100년전 그 시대의 '조선' 을.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조용하고 묵묵히 많은 것을 말해주게 될 것이다.

출처 : 문화예술
글쓴이 : 승복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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