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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구려의 영웅... 연개소문...

도깨비-1 2006. 11. 19. 23:10

연개소문(淵蓋蘇文)은 용장한 고구려사(高句麗史)를 빛낸 최후의 영웅이었다. 그가 집권하고 있는 동안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최강국이었고, 따라서 연개소문은 당황(唐皇)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이 지배하던 당시 전 중국인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도 오래도록 연개소문에 대한 공포심은 중국인들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러한 연개소문이 오랫동안 임금과 대신들을 마구 죽이고 국정을 전횡한 포악한 독재자로만 알려져 왔던 것은 고구려의 패망과 더불어 고구려인의 손으로 기록된 역사서가 모두 사라져버렸기 때문이었다.

고구려가 망한 뒤 고구려사(高句麗史)는 중국인들의 손에 의해 씌여졌고, 그 뒤 고려 인종(仁宗)대에 김부식(金富軾)이 당나라와 신라 측의 입장에 따라 당시 고구려의 역사와 연개소문의 행적을 기록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당나라와 신라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 증오의 대상이었던 까닭에 연개소문은 세상에 두번 다시 나타나서는 안될 패역무도한 인물, 부정적인 인간상으로 각인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역사의 해석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다. 제왕에게 무조건 충성을 바쳐야 하고, 대국을 섬겨야 하는 시대가 지나가자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도 달라졌다. 그는 추모성왕(皺牟聖王)이 건국하고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과 장수태왕(長壽太王)이 전성기를 이룩하였으며, 온달(溫達)과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이 위엄을 드높인 천손(天孫)의 왕국 대고구려(大高句麗)의 역사를 마지막으로 빛낸 불세출의 영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제 나라 제 겨레의 역사를 지키고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근래 중국이 국가적 사업으로 고구려사(高句麗史)와 발해사(渤海史)를 탈취하고자 획책하고 있는 비상사태를 당해 우리가 고구려, 발해의 역사를 지키지 않으면 안되는 당위성부터 짚어보고자 한다.

● 고구려사(高句麗史), 발해사(渤海史)를 지켜야 하는 당위성

근래 중국은 일본에 이어 한국 역사를 축소, 왜곡하는 것도 모자라 아예 빼앗아가려고 시도하고 있다. 이는 중국 사회과학원이 2002년 2월부터 시작한 대형 연구사업인 이른바 '동북공정(東北工程)'의 내용이 밝혀짐에 따라 알려진 사실이다. 2007년까지 5년간 우리 돈으로 3조원의 막대한 예산을 들여 추진하고 있는 이 동북공정은 엄연히 한국 역사의 일부인 고구려사(高句麗史)와 발해사(渤海史)를 중국 역사에 포함시키려는 것이 그 목적이다.

중국이 한국 역사 속의 고대 국가가 분명한 고구려사(高句麗史)와 발해사(渤海史)를 약탈하려는 의도는 어디에 있을까. 간단히 말해서 한민족(韓民族)이 많이 살고 있는 요녕성(遼寧省), 길림성(吉林省), 흑룡강성(黑龍江省) 등에 대해 '만주는 한국 민족의 역사적 고유의 땅'이란 소리를 꿈에도 하지 말라는 뜻이다.

만주 대륙은 고조선의 발상지요, 고조선이 망한 다음에는 부여와 고구려와 발해가 차례로 일어섰던 우리 고대사의 중심지였다. 비류(沸流)와 온조(溫祚) 형제가 어머니인 소서노(召西奴)를 모시고 남하해 세운 백제는 고구려에서 갈라져 나왔고, 신라도 건국의 주체세력인 박혁거세(朴赫居世) 일족을 비롯한 선주민이 만주에서 남하했으니, 결국 만주는 우리 민족사의 요람이요, 근거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고구려와 발해가 현재 자기네 영토에 있었던 나라라는 이유 하나만 가지고 중국 역사의 일부라는, 참으로 단순하고 어리석고 유치하기 그지없는 억지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중국 역사학자들은 "고구려와 발해는 중국 중앙정권의 지방 통치기구에 불과하고, 그 주민은 중국 북방의 소수민족이었다."는 터무니없는 억지를 부리고 있다. 이런 식으로 나가다가는 고구려와 발해뿐 아니라 고조선과 부여도 만주 땅에 있었으니 그 역사가 중국 역사의 일부라고 생떼를 쓰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뿐이랴. 더 나아가 백제는 '고구려의 별종'이고, 고려는 고구려의 계승권을 명분으로 건국되었으니 그 또한 중국 역사의 일부라고 주장하고 나온다면, 우리는 역사도 없는 나라가 되어버릴 것이고, 우리는 제 나라 역사도 지키지 못하고 빼앗긴 못난 민족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조상들에게는 죽어서도 볼 낯이 없는 후손, 후손들에게도 두고두고 못난 조상이라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사태가 이토록 비상한 지경에 이른 것은 우리 모두가 역사의 교훈을 망각하고, 역사교육을 소흘히 한 데서 비롯된 자업자득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래서 중국인들에게는 대대손손 공포의 전신(戰神)처럼 여겨졌던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사적을 되짚어보고자 한다.

● 당나라 황제 이하 전 중국인들에게 공포의 대상

고구려는 중국 당나라와 네 차례의 전쟁을 하여 세 번을 이겼고 한 번을 졌다. 그러나 그 한 번의 패배는 고구려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하는 최악의 결과를 낳고 말았다. 연개소문이 살아있을 때에 고구려는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연승(連勝)을 거두었으니, 참으로 연개소문은 고구려 최고의 전략가였으며 한민족(韓民族)의 방패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일찍이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는 연개소문전(淵蓋蘇文傳)에서 이렇게 평가했다.

'연개소문(淵蓋蘇文)은 당황(唐皇) 태종(太宗) 이하 당시 전 중화인(中華人)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신당서(新唐書), 구당서(舊唐書)가 비록 그 국가적인 수치를 꺼리어 당시의 전쟁 사실을 적을 때에 연개소문의 공격적 사실을 빼고 방어전의 사실만 썼을 뿐이다. 그럴뿐더러 그 방어전의 기사 가운데서도 오직 안시성의 한 번 전역(戰役)을 "당나라 군사가 그들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다."고 적은 것 이외에는 태종이 승리한 것으로 적었다. 그러나 그 "막리지(莫離支), 더욱 교만 방자하였다.", "막리지,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는 등 문구의 측면을 보아 당인들의 연개소문에 대한 공포가 어떠했는지를 증명할 수 있다. 이위공(李衛公)의 병서(兵書)에 "막리지는 자칭 병법가였다."고 한 비웃는 말의 이면에서 연개소문의 전략을 감탄한 의사가 적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요양의 개소문(蓋蘇屯)과 산해관에서 북경까지의 여러 곳에 가끔 있는 황량대(慌糧臺)와 직예, 산서성의 각지에 산재하는 고려영(高麗營)이 연개소문의 군사들이 중화 각지에 출몰한 유적임을 말할 수 있다. 그러한즉, 만일 연개소문이 죽지 않았으면 당의 군사가 고구려의 한 치 땅을 빼앗지 못했을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단재는 연개소문이 태종(太宗)의 고구려 침공 때에 방어전(防禦戰)만 펼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습을 가해 중국 내륙까지 진격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뒤에 다시 살펴보기로 하고,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 개소문(蓋蘇文) 편을 보면 또다시 김부식(金富軾)의 사대주의적, 유학적 역사관이 그대로 드러난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 대목을 소개한다.

'그가 바른 도리로써 임금을 섬기지 않고 잔인하고 포악한 짓을 제멋대로 하여 대역죄까지 지었다. 춘추(春秋)에 임금을 죽인 역적을 토벌하지 않는 것은 그 나라에 현인이 없음이라고 했는데, 개소문은 제 몸뚱이를 보전하여 제 집에서 죽었으니 이는 요행이라 할 수 있겠다.'

김부식이 당나라와 신라의 적이었던 고구려의 실권자 연개소문을 평가한 잣대가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맞수였던 궁예(弓裔)와 견훤(甄萱)을 평가한 것과 거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김부식도 연개소문이 대단한 인물이었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하고 들어갔으니, '그는 의표가 씩씩하고 뛰어났으며, 의기가 장하여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았다"는 구절과 열전(列傳) 끝부분의 "송나라 신종(神宗)이 왕개보(王介甫)와 국사(國事)를 의논할 때 '당나라 태종(太宗)이 고구려를 치다가 어째서 이기지 못했는가?'라고 물으니 왕개보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이 비상한 인물이기 때문이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개소문도 또한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라고 한 대목이 그렇다.

● 출중한 지략과 비상한 통솔력으로 역사를 바꾼 영걸

연개소문(淵蓋蘇文)에 관한 역사적 평가는 이처럼 극명하게 엇갈리지만 그는 분명히 출중한 지략과 비상한 통솔력으로 고구려의 역사와 당시 동북아시아의 역사를 바꾸어놓은 일세의 영걸이었다. 연개소문은 당여전쟁(唐麗戰爭)의 주역이었으며, 중국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제왕으로 꼽히는 당황(唐皇)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의 유일한 맞수였다.

연개소문은 언제 태어났을까. 이를 알려주는 기록은 전무하다. 다만 그의 아들 남생(男生)의 묘지명에 나오는 그의 후손들의 출생 연도를 참고로 추측할 수밖에 없다. 이 묘지명에 따르면 남생은 함통(咸通) 17년(서기 634년)에 태어났고, 셋째 아들 남산(南産)은 함통(咸通) 22년(서기 639년)에 태어났다. 둘째 아들 남건(南建)은 기록에 없지만 그 중간인 636년이나 637년에 태어났을 것이다. 또 남생의 아들 헌성(獻誠)은 개화(開化) 10년(서기 651년)에 태어났다. 남생은 17세에 헌성을 낳은 것이다. 이를 기준으로 연개소문도 17세에 맏아들 남생을 낳았다면 그는 홍무(弘武) 28년(서기 617년)에 태어난 셈이 된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함통(咸通) 14년(서기 631년)부터 당나라의 침공을 막기 위해 동북쪽으로 부여성에서 남쪽으로 발해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는 공사를 지휘했다는 기록을 볼 때 617년에 태어났다면 631년에 겨우 15세에 불과했은 이는 사리에 맞지 않는다. 따라서 그보다 10년 전인 홍무(弘武) 18년(서기 607년)쯤에 태어난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어디에서 태어났을까.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高句麗本記)에서는 서부의 대인이라 했고, 열전(列傳)에서는 동부의 대인이라고 하여 서로 다르다. 또 구당서(舊唐書)는 서부 출신이라 했고, 신당서(新唐書)와 자치통감(資治通鑑)은 동부 출신이라고 하여 역시 서로 다르다. 오랫동안 고구려사(高句麗史)를 연구해온 경북도청 학예관 김용만(金容萬) 박사는 자신의 저서인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을 통해 동부 출신이라고 주장했다. 김 박사가 동부 출신이 맞는다고 보는 근거는 '한원(翰苑)'에 고구려의 다섯 귀족에 대해 설명하면서 "내부(內部)는 왕가의 종족이긴 하나 동부의 아래에 있었다. 그 나라의 일을 함에는 동쪽으로서 머리를 삼는 고로 동부를 위에 놓는다."고 한 대목 때문이다. 동부가 왕족보다 위에 있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지만, '한원'은 연개소문이 유혈혁명에 성공한 뒤 고구려의 사정을 기술했으므로 동부를 내부보다 위에 놓은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런데 강화군의 향토지인 강도지(江島誌)에 따르면 연개소문이 강화도 고려산 서남쪽 봉우리인 시루봉 기슭에서 태어났다고 전한다. 강화군은 이곳을 행토유적 제26호로 지정하고 하점면 지석묘고인돌공원 들머리 큰길가에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유적비'도 만들에 세워놓았다. 연개소문이 이곳 시루봉 기슭에서 태어나 치마대와 오정에서 무술을 연마했다는 것이다.

연개소문의 가계에 관해서도 상세한 사료는 없고, 남생의 묘지명에 "천남생(泉男生)의 증조부는 자유(子遊)이고 조부는 태조(太祚)이다. 나란히 막리지(莫離支)를 역임했는데, 부친 개소문(蓋蘇文)은 대대로(大對盧)를 역임했다. 조부와 부친이 야금(冶金)에 뛰어나고 활을 잘 다루었다. 아울러 병마(兵馬)를 장악하고 나라의 권세를 모두 잡았다."는 기록 정도이다. 그런데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의 성씨가 무슨 까닭에 천씨(泉氏)가 되었는가. 이것은 당나라를 건국한 고조(高祖) 이연(李淵)의 이름과 같기 때문에 기휘(忌諱), 즉 이를 피하기 위해 천씨로 둔값킨 것이다. 저희 임금 이름과 같기 때문에 남의 나라 실권자의 성씨를 바꾼 것인데, 김부식이 이를 그대로 좇아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에서 "개금(蓋金; 淵蓋蘇文)의 성은 천씨이다. 스스로 물속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무리를 현혹시켰다."고 했다.

● 영웅적 기상, 비범한 의기로 15세에 명성 떨쳐

연개소문(淵蓋蘇文)은 동부대인 연태조(淵太祚)의 아들로 태어나 영웅적 기상과 비범한 의기로 15세에 이미 세상에 그 이름을 널리 떨쳤다고 한다. 아버지가 죽어 그 지위를 계승하고자 했으나 여러 사람이 그의 성품이 '포악'하므로 거부했는데, 그는 여러 사람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간청하면서 만일 옳지 않은 일을 저지를 경우 죽여도 좋다는 다짐까지 했다고 전한다.

그렇게 하여 국정에 참여하게 된 연개소문은 함통(咸通) 14년부터 천리장성 축조를 감독하며 점차 두각을 드러내고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그가 유혈혁명을 일으킨 것은 함통(咸通) 25년 10월이었다. 연개소문이 혁명을 일으킨 직접적 원인은 영류태왕(榮留太王)과 대신들이 자신을 제거하기로 모의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음모를 미리 알아낸 연개소문은 대신 180여명을 수도 장안성 남쪽 교외에 열병식을 거행한다고 초청하여 모조리 죽여버렸다. 선수를 쳣던 것이다. 그리고 군사들을 거느리고 황궁으로 쳐들어가 영류태왕을 시해하고, 그의 아우인 대양왕(大陽王)의 아들 보장(寶臧)을 태왕의 자리에 앉혔다. 그렇게 하여 연개소문은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연개소문이 혁명을 일으킨 간접적 원인은 영류태왕과 고승(高勝), 양방형(梁訪亨) 등 그의 측근 대신들이 당나라에 대해 저자세 외교정책을 펼쳐 연개소문을 비롯한 강경파의 불만과 분노를 샀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그 무렵 고구려와 주변국의 정세를 잠시 살펴보자.

연개소문의 거사로 목숨을 빼앗긴 영류태왕(榮留太王)은 이름이 건무(建武)로서 영양태왕(嬰陽太王)의 이복동생이다. 영양태왕은 온달(溫達) 장군의 처남이니 곧 평강공주(平岡公主)의 오라비이다. 홍무(弘武) 23년에 수황(隋皇) 양제(煬帝)의 침략으로 수여전쟁(隨麗戰爭)이 벌어지자 영양태왕은 건무를 평양성 방어군 총사령관에 임명했는데, 건무는 평양성을 공격해오는 수나라의 수군을 격파하는 큰 전공(戰功)을 세웠다. 그런데 왕위에 오른 영류태왕은 전쟁공훈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영양태왕의 강경책과는 반대로 유화적인 외교정책을 채택했다.

● 대당(對唐) 굴욕외교에 장수들 분노

한편, 그해에 중국에서는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섰다. 그 이듬해에 영류태왕(榮留太王)은 사신을 보내 당나라 건국과 고조(高祖) 이연(李淵)의 황제 등극을 축하했다. 이어서 621년에도 사신을 보냈다. 그러자 당나라는 그 이듬해에 사신을 보내 수여전쟁(隨麗戰爭) 중 생긴 포로교환을 제의했다. 고구려가 여기에 응함으로써 양국은 일시적이지만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수나라와의 전쟁에 참전해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대부분의 장수들은 이런 굴욕적 유화책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함통(咸通) 9년(서기 626년)에 당나라에서 정변(政變)이 일어났다. 이연의 둘째아들 이세민(李世民)이 친형인 태자 이건성(李建成)과 동생 이원길(李元吉)을 암살하고, 부황(父皇)을 위협해 제위에 오른 이른바 현무문(玄武門)의 변란(變亂)이 벌어졌던 것이다. 형제를 죽이고 아버지를 협박해 황제로 즉위한 이세민이 바로 중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성군(聖君)으로 평가되는 태종(太宗)이다.

당나라의 두번째 황제인 태종은 중원 통일이 마무리되자 이번에는 주변국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런데 영류태왕이 이런 속셈도 모르고 또 사신을 통해 동돌궐(東突厥)의 힐리가한을 사로잡은 것을 축하하고 고구려와 당의 국경을 표시한 지도까지 보냈다. 고구려의 계속되는 저자세 외교에 자신감을 얻은 태종은 631년에 장손사(長孫師)를 사신으로 보내 수군(隨軍) 전사자들의 유해를 수습해 매장하고 위령제를 지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전승(戰勝)기념물인 경관(京觀)까지 제멋대로 허물어버리고 돌아갔다. 이런 오만방자한 처사에 고구려 무장(武將)들의 분노는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영류태왕(榮留太王)은 장수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남쪽으로는 신라를 공격하고, 당나라의 침공을 예방하는 천리장성을 축조하도록 했다. 그러나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은 538년부터 642년까지 토번(吐蕃), 서돌궐(腺厥), 고창국(高昌國) 등을 복속시킨 뒤 고구려를 향해 창끝을 겨누기 시작했다. 그래도 눈치를 못챈 영류태왕은 태자 환권(桓權)을 사신으로 보내고, 대신들의 자제도 당나라 국학에 입학시킬 것을 요청했다.

이에 더욱 고무된 태종은 함통(咸通) 24년(서기 641년)에 진대덕(陳大德)을 보내 고구려의 지리를 비롯한 정세를 낱낱이 염탐해오도록 시켰다. 부친의 뒤를 이어 동부대인과 막리지 직위에 올라 천리장성 축조를 감독하며 이런 사정을 훤히 궤뚫고 있던 연개소문(淵蓋蘇文)은 이대로 두었다가는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류태왕을 끼고 도는 주화파(主和派) 대신들이 사사건건 강경책을 주장하고 나서는 연개소문을 제거하려고 들었다. 그러자 결국 연개소문이 선수를 쳐서 거병(擧兵)하게 된 것이었다.

주화파의 살해 음모에 대항, 유혈혁명 일으켜

유혈혁명에 성공하여 새 국왕을 내세우고 최고 실권자가 된 당대의 영걸 연개소문(淵蓋蘇文)은 어떻게 생겼을까. 그의 위풍당당한 자태를 전해주는 기록이 구당서(舊唐書)에 나온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도 이 내용을 그대로 베껴 쓴 것이다.

'수염이 길고 몸집이 크며 칼을 다섯 자루나 차고, 좌우 사람이 감히 우러러보지 못했다. 항상 그 속관에게 땅에 엎드리게 하여 그 등을 밟고 말에 올랐으며, 말에서 내릴 때에도 그랬다. 밖에 나갈 때에는 반드시 병졸들을 길에 벌이고 인도자가 크게 소리쳐 행인을 물리치면 백성들이 두려워 피하고 다 엉겹결에 구렁텅이로 빠졌다.'

그런데 연개소문이 다섯 자루의 칼을 차고 있었다는 기록이 마치 사람들에게 위압감을 주고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라고 오해하기 쉽지만 한원(翰苑)은 당시 고구려의 남자는 누구나 칼을 다섯 자루씩 차고 다녔다고 전하니 이는 위압감이나 공포분위기 조성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연개소문이 혁명을 일으켜 임금을 죽이고 집권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당황(唐皇) 태종(太宗)은 아연 긴장했다. 연개소문이 607년에 출생했다면 태종이 9세 연상이다. 태종은 598년에 출생했기 때문이다. 태종은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개금(蓋金; 淵蓋蘇文)이 자기 임금을 죽이고 나라 정사(政事)를 독판치고 있으니 이는 진실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오늘 우리의 병력으로 고구려 땅을 빼앗기는 어렵지 않으나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나는 거란(契丹)과 말갈(靺鞨)을 시켜 그들의 못된 버릇을 길들이고자 하니 그대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그러자 태종의 처남인 장손무기(長孫無忌)가 대답했다.

"개금이 자기의 죄가 큰 줄 알고 우리가 토벌할까 두려워서 방비를 든든히 하고 있사오니 폐하께서 우선 참고 계시면 개금이 방심을 하게 되어 또 교만하고 게을러져서 그의 죄악이 더욱 커질 것이니 어렇게 된 뒤에 쳐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 무렵 남쪽에서는 백제와 신라가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의자왕(義慈王)이 642년에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의 40여개 성을 빼앗았으며, 백제의 장수 윤충(允忠)은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성주인 김품석(金品釋) 내외를 포로로 잡아 처형했다. 그런데 김품석은 바로 김춘추(金春秋)의 사위였다. 다급해진 선덕여왕(善德女王)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는 한편 김춘추를 고구려로 보내 구원병을 요청하도록 했다. 고구려의 실력자 연개소문과 신라의 실력자 김춘추 두 거물의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김춘추는 연개소문에 의해 감금되었다가 아무 소득도 없이 도망치다시피 귀국해야만 했다. 연개소문은 신라보다 백제와 손잡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만일 백제를 적으로 돌린다면 백제와 당의 수군이 황해에서 합세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면 큰일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 김춘추의 지원 요청 거절하고 백제와 손잡아

신라의 지원 요청을 받은 당은 개화(開化) 3년(서기 644년)에 대국으로서 분쟁을 조정한다는 명목으로 현장(玄奬)을 사신으로 보내 신라를 공격하지 말고 화친할 것을 권했다. 마침 군사를 신라에 보내 두 성을 함락시킨 연개소문이 태왕의 부름을 받고 돌아와 현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신라와 적대하는 것은 오늘에 생긴 일이 아니다. 수나라가 우리를 침범했을 때에 신라가 그 틈을 타서 5백리의 땅을 침탈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라가 그 땅을 돌려주지 않으면 결코 화해할 수 없다!"

그러자 현장이 이렇게 반문했다.

"이미 지난 일을 따져서 무엇 하겠는가? 옛 땅을 찾기로 말한다면 귀국이 차지하고 있는 요동도 옛날에는 모두 중국 땅이었다. 그러나 우리 대당(大唐)은 그것을 돌려달라 하지 않는데 유독 고구려만 옛 땅을 찾으려고 고집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그러자 연개소문이 크게 분노하여 소리쳤다.

"이야말로 적반하장(賊反荷杖)이로다! 우리 요동 땅을 옛날 중국 땅이라고 하는 것은 유철(劉徹; 前漢 世宗)이 도둑질하여 이른바 한사군(漢四郡)을 두었던 것을 말하는 모양인데, 그렇게 따진다면 지금 당(唐)의 영주나 유주도 모두 옛날 우리의 군현(郡縣)이었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반드시 되찾고 말 터이니 너는 돌아가서 너희 나라의 군왕에게 그렇게 전하라!"

이렇게 푸대접을 당하고 쫓겨나다시피 한 현장의 보고를 받은 당황(唐皇)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은 고구려 정벌의 결심을 더욱 굳혔다. 하지만 좀더 명분을 쌓고 시간을 벌기 위해 다시 한번 장엄(藏儼)을 사신으로 보내 연개소문을 만나보게 했다. 그러자 연개소문은 장엄을 아예 토굴 속에 가두어버렸다.

태종은 이에 옳다구나 하면서 그해 11월에 마침내 고구려를 정벌하는 군사를 일으켰다. 이때 동원된 당나라 군사는 요동도행군총관 이세적(李世勣)이 이끄는 육군이 6만여명, 평양도행군총관 장양(張亮)이 이끄는 수군이 4만 3천여명, 군마 1만필, 전함이 5백척이었다. 하지만 이 10만여명의 침략군은 태종의 친정(親征)과 함께 30만명이 넘는 대군으로 불어나게 된다.

그 이듬해인 개화(開化) 4년(서기 645년) 4월에 요하를 건넌 당나라의 대군은 신성과 건안성을 공격했으나, 고구려군의 철벽같은 수비에 막혀 성을 함락시키는 데에 실패했다. 고구려는 이미 수백년 전부터 중원 왕조와 주변 오랑캐의 침략을 받는 동안 터득한 청야전술(淸野戰術)에 능했다. 이는 들판을 텅텅 비워 사람 한 명, 곡식 한 톨 남기지 않고 우물까지 막은 뒤에 모두 산성에 들어가 철통같이 지키는 전술이었다. 이세적은 군사를 돌려 10일간의 맹공 끝에 개모성을 함락시킨 뒤 요동성으로 공격 방향을 틀었다. 요동성은 전에 수황(隋皇) 양제(煬帝)가 수차 공격하다가 실패했던 고구려의 중요한 방어 거점이었다. 연개소문은 요동성이 포위당하자 보병과 기병 4만명을 보내 지원토록 했다.

● 당황(唐皇) 태종(太宗)의 침략에 국운을 걸고 맹반격

한편 5월에 이세적(李世勣)의 뒤를 따라 수십만 친군을 거느리고 뒤따르던 태종(太宗)은 2백리에 걸친 요하의 늪지인 요택에 흙을 퍼붓고 초목을 베어 다리를 놓고 가까스로 이를 건너 요동성에 이르렀다. 이때 태종은 자만심에 들떠 요택의 다리와 장비를 모두 부수어버리는 실책을 범했다. 수백겹으로 요동성을 에워싼 당군은 3백근짜리 큰 돌을 250m나 날릴 수 있는, 당시로서는 최신예 무기인 포차(砲車)로 성벽을 공격했다. 바위에 맞은 성벽마다 구명이 뚫리고 무너지자 고구려의 군사들과 주민들이 급히 목책을 쌓아 방어했다.

당군이 당차(撞車)로써 성문과 성루를 부수어도 똑같이 막아냈다. 필사적인 투혼이었다. 그렇게 10여일 동안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다가 하루는 당군이 남풍을 이용하여 화공을 퍼부었다. 성루와 성안의 많은 건물이 불탔다. 요동성의 군사와 백성들은 사력을 다해 밀려드는 당군에 맞서 싸웠으나 결국 역부족으로 성은 함락당하고 말았다.

요동성 점령에 기세가 오른 당군은 이번에는 백암성을 공격했다. 이때 연개소문은 오골성의 군사 1만명을 구원병으로 보냈다. 당나라 장수 계필하력(契苾何力)이 오골성의 지원군을 공격하다가 고구려군 병사 고돌발(高突撥)의 창에 찔려 심한 부상을 입었으나 인해전술에 밀려 고구려군은 결국 수많은 전사자를 내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백암성의 성주 손대음(孫代音)이 당군에 저항하기를 포기하고 성문을 열어 항복하는 바람에 당군은 백암성을 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

요동성과 백암성에서 수만명의 고구려 군사와 백성들을 포로로 붙잡고, 60만석에 이르는 군량을 확보한 당군은 이번에는 안시성으로 진격하여 성을 겹겹으로 포위했다. 후방에 안시성을 두고는 고구려의 내륙으로 진격할 수 없었으므로 안시성은 두 나라 모두에게 더없이 중요한 군사적 요충이었다. 연개소문은 북부욕살 고연수(高延壽)와 남부욕살 고혜진(高惠眞)에게 고구려 군사와 말갈병 15만명을 거느리고 안시성을 포위한 당군의 배후를 치도록 했다.

그러나 고연수고혜진은 요동방면군 총사령관 격인 대대로(大對盧) 고정의(高正義)의 작전명령에 따르지 않고 당군의 유인책에 빠져 무너졌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중국 측 기록이다. 당서(唐書)는 또 사흘간에 걸쳐 안시성 외곽 주필산에서 벌어진 접전에서 고구려군은 대패하고 고연수와 고혜진은 항복했다고 기록했다.

당서에 따르면 태종은 항복한 고연수와 고혜진 이하 추장 3500명을 가려 군직을 주고 당나라 내지로 보내고, 말갈병 3300명은 모두 생매장시켜 죽여버리고, 나머지 무리는 평양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것은 누구나 포복절도할 헛소리다. 안시성과 건안성과 신성의 고구려군이 배후를 막을까 두려워 진격하지 못하던 당군이 무려 15만명이나 되는 고구려군 포로를 그냥 돌려보냈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린가. 태종 이세민이 정말로 그렇게 했다면 그는 비상한 전략가이기는커녕 당대에 둘도 없는 정신병자였을 것이다.

● 주필산전투(駐必山戰鬪) 승리 이후 유격작전으로 당군 괴롭혀

당시 주필산전투(駐必山戰鬪)는 결국 고구려군의 승리로 끝났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고구려군이 연개소문(淵蓋蘇文)과 고정의(高正義)의 전략대로 지구전(持久戰)을 펼쳐 최대한 적군을 피로하게 만드는데 성공했는데, 다만 3일간 벌어진 서전에서 고연수(高延壽)와 고혜진(高惠眞)이 적군의 유인책에 빠져 1만여명의 전사자를 내고 3만여명의 군사와 더불어 항복했던 것이다. 따라서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이 '평양으로 돌려보냈다'고 중국 문헌에서 기록된 15만명의 고구려 주력군은 온전한 채 남아서 고정의의 지휘 하애 끈질긴 유격전(遊擊戰)으로 당군의 보급선과 진격로를 차단하는 등 성공적인 작전을 펼쳤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는 태종의 패전(敗戰) 사실은 얼버무려 감추고 초전(初戰)의 승리만 강조해 기록한 것이다. 오죽하면 이를 인용해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찬하던 김부식(金富軾)도 너무나 의심스러워 고구려본기(高句麗本記) 보장왕(寶臧王) 8년 조에서 이런 기록을 남겼겠는가.

'유공권(柳公權)의 소설에서는 "주필산전투(駐必山戰鬪)에서 고구려가 말갈과 더불어 군사를 합하니 그 군사가 40리나 뻗쳤으므로 태종이 바라보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다."고 했으며, 또 "황제가 친솔한 6군이 고구려 군사에게 제압되어 거의 위축되어 있을 때 척후병이 영공(瑩公; 李世勣)이 거느린 흑기군(黑騎軍)이 포위되었다고 고하니 황제가 크게 성을 냈다."고 했다. 비록 나중에 몸은 탈출했으나 그와 같이 겁을 냈는데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와 사마광(史馬光)의 통감(通鑑)에 이것을 말하지 않은 것은 자기 나라의 치욕을 감추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어쨌든 당군은 안시성을 함락시키고 진격하든가, 아니면 퇴각하든가 양자택일(兩者擇一)밖에 남은 수가 없었다. 안시성전투(安市城戰鬪)는 그해 7월에 본격적으로 불붙었다. 강하왕(江夏王) 도종(道宗)이 선공을 퍼부었으나 성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태종은 포차나 당차 같은 공성무기로 하루에 6, 7회씩 공격해도 별 효과가 없자 7월 15일부터 9월 15일까지 60일간 50만명을 동원해 성벽보다 높은 토산을 쌓았다. 그러나 강하왕의 지휘로 완성된 그 토산은 며칠도 안 가서 무너져버렸다.

그러자 안시성을 지키던 고구려 군사 수백명이 재빨리 무너진 성벽을 통해 밀고나와 토산을 점령했다. 그리고 참호를 파서 당군의 진격을 막은 뒤 불을 놓고 방패로 담을 쳐 수비를 굳건히 했다. 두 달 동안 공들여 쌓은 토산을 순식간에 고구려군에게 빼앗기게 된 당나라의 태종은 크게 노해 토산 수비를 책임지던 부복애(傅伏愛)를 포박해 직접 어검(御劍)으로 그를 참살했다.

● 안시성전투(安市城戰鬪)에서 패배하고 퇴각하는 당군을 추격

이후 양군은 토산을 두고 4일간 치열한 접전을 벌였는데 결과는 고구려군의 승리였다. 때는 음력 9월 말, 찬바람은 불어오고 양식도 떨어져가고 있었다. 안시성은커녕 자기들이 쌓은 토산조차 탈환하지 못한 당나라 군대의 총지휘관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은 마침내 이번 전쟁이 승산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남은 길은 퇴각뿐, 결국 태종은 전군에 후퇴명령을 내렸다. 사서의 기록을 살펴보건대 태종이 급히 퇴각을 결정한 것은 추위도 추위지만 무엇보다도 연개소문이 당군의 보급선을 차단하고 유격전을 펼쳤기 때문이었다. 사서에는 태종의 퇴각 장면을 이렇게 기록한다.

'황제가 생각하기를 요동은 일찍 추워져서 풀이 마르고 물이 얼어 군마를 오래 머물게 할 수 없으며, 또한 군량이 장차 떨어졌으므로 군사를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안시성 밑에서 군사로 시위를 하고 돌아가니 성안에서는 모두 자취를 감추고 나오지 않았다. 성주가 성루에 올라 절하며 작병하니 황제는 그가 성을 굳게 지킨 것을 칭찬하면서 겹실로 짠 명주 1백필을 주어 임금 섬기는 성의를 격려했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에 이해할 수 없는 기록이다.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군사들을 거느리고 황급히 도망치기 바쁜 판에 무슨 여유로 군사 시위를 하며, 또 패퇴하는 주제에 적장의 분전을 가상히 여기고 칭찬하며 상까지 주었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오히려 우리나라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인, 태종이 안시성주 양만춘(楊萬春)의 궁시(弓矢)에 맞아 한쪽 눈알이 빠졌다거나, 그로 인해 죽었다는 말이 더 설득력이 있다.

어쨌든 그렇게 퇴각하여 요택을 건너는데 수레와 말들이 건널 수가 없자 태종이 몸소 말채찍 끈으로 섶을 묶어 진창을 메우며 황망히 달아났다는 것이다. 그해 음력 10월이었다. 이렇게 당여전쟁(唐麗戰爭)은 고구려의 승리로 일단 막을 내렸다. 그런데 당시 안시성주로 알려진 양만춘(楊萬春)은 어떤 인물인가. 그의 이름은 정사(正史)에는 전하지 않고, 다만 송준길(宋浚吉)의 동춘당선생별집(同春堂先生別集)에 안시성의 방어전(防禦戰)을 지휘했던 장수가 양만춘이라고 씌여져 있을 뿐이다.

안시성주에 관해서는 태종이 백암성을 점령한 뒤 장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내가 들으매 안시는 성이 험하고 군사가 강하여 그 성주가 용맹하여 막리지의 난에도 성을 지켜 항복하지 않았고, 막리지가 쳤으나 그를 굴복시킬 수 없기에 성을 그에게 주고 말았다 한다."

안시성주 양만춘은 물론 나라를 위해 사력을 다해 성을 지키고 30만이 넘는 당나라의 대군을 격퇴시켜 첫번째 당여전쟁(唐麗戰爭)에서 고구려가 승리하는데 가장 큰 공훈(功勳)을 세운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전쟁의 승리가 오로지 양만춘의 공로는 아니라는 점을 간과(看過)해서는 안된다. 사실 당여전쟁(唐麗戰爭)에서 고구려군 최고 지휘관은 대막리지(大莫離支) 연개소문(淵蓋蘇文)이었고 요동 방어전의 야전군 사령관은 재상인 대대로(大對盧) 고정의(高正義)였다. 양만춘은 직급이 고구려 관직 중 제5위인 위두대형(位頭大兄)으로 안시성을 지키는 욕살(褥薩)이었고, 또 안시성은 요동성이나 신성보다 규모도 작은 편이었다. 따라서 안시성주가 연개소문의 유혈혁명에 반대하고, 또 연개소문이 쳤으나 이기지 못했다는 따위의 기록은 신빙성이 없는 것이다.

이는 양만춘(楊萬春)의 전공(戰功)을 평가절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중국인들의 역사 기록이 잘못되었음을 밝히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가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 것이 옳다고 본다.

'이세민(李世民)이 수십만 대군으로 네다섯 달에 이르도록 한낱 안시의 외로운 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수치를 가려 숨기기 위해, 안시성은 곧 이세민이 공략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본국 고구려의 대권을 잡은 연개소문도 어쩌지 못했다는 기록을 남긴 것이다.'

● 패퇴하는 당군 추격, 중국 내륙까지 진격했다는 설도...

단재(丹齋)는 또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서 연개소문(淵蓋蘇文)이 퇴각하는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을 추격해 만리장성 너머 당나라 내륙까지 침공했다고 썼으며, 연개소문전(淵蓋蘇文傳)에서는 그러므로 연개소문이 "조선 민족 역사상 미증유의 군국적 침략주의를 행한 인물"이라면서, "이 전쟁 이후 3년만에 당황(唐皇) 태종(太宗)이 죽고 연개소문의 세력이 더욱 강성해져 뒤에 직예(直隷), 산서(山西) 등지에 침입하여 가끔 군현(郡縣)을 설치하였다. 이는 비록 사책에 빠졌으나 전술하였듯이 각지의 고려영(高麗營)이라는 땅이름이 기록보다 더 정확한 사료가 될 것이며..."라고 했다.

단재가 말한 증거는 북경에서 산해관에 이르는 사이의 황량대와 산동성, 하북성 등지의 고려영이라는 지명, 북경 인근의 고려진, 고려성 등이다. 또 강소성의 숙천(宿遷)에서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의 군대가 설인귀(薛仁貴)가 이끄는 당군과 전투를 벌여 대승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으며, 건호현(建湖縣)에 있는 몽롱탑(朦朧塔)에서는 태종(太宗)이 연개소문의 고구려군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빠졌을 때에 설인귀가 나타나 고구려군을 물리치고 태종을 구출해 달아났다는 전설도 전해지고 있다.

심지어 태백일사(太白逸史)에는 연게소문의 군대가 태종을 추격해 당나라의 수도 장안성까지 쳐들어가 태종의 항복을 받아냈다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이를 모두 믿기는 어렵고, 상식적인 선에서 추측하자면 연개소문이 승세(勝勢)를 타고 패퇴하는 당군을 추격하여 오늘의 북경 일대까지 진격했을지는 모르지만, 단기적 작전으로 그쳤을 것이다. 이미 추운 겨울로 접어들 때였으므로 설혹 일정한 지역을 점령했다 하더라도 그곳을 통치할 수는 없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당서(新唐書)는 또 이런 웃기는 기록을 남겼다.

'태종(太宗)은 회군하면서 연개소문(淵蓋蘇文)에게 궁복(弓服)을 내렸는데 연개소문은 이것을 받고도 사자를 보내 사례하지 않았다. 이에 조서(詔書)를 내려 조공을 깎아버리라고 했다.'

명색이 천자(天子)니 황제니 하는 자가 치욕스러운 패전(敗戰) 끝에 퇴각하면서 어느 겨를에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인 연개소문에게 선물을 내리고, 또 그것을 받고도 감사의 인사를 하지 않았다고 조공을 깎으라고 했다니, 이는 참으로 중국인다운 황당무계한 발상이요, 표현이라고 할 수밖에는 없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첫번째 당여전쟁(唐麗戰爭)은 고구려의 승리로 끝났는데, 당황(唐皇) 태종(太宗)은 죽기 전까지 패전의 치욕을 잊지 못하고 설욕의 기회만 노렸다. 하지만 워낙 혼이 난 탓에 정면공격은 못하고 산발적이며 국지적인 도발을 꾸준히 계속했다.

647년에는 우진달(牛進達)을 청구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산동성 내주에서 바다를 건너 공격토록 하고, 이세적(李世勣)을 요동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육로로 침공토록 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고구려군의 맹렬한 반격에 아무 소득도 없이 패퇴했다. 그 이듬해에도 설만철(薛萬徹)이 청구도행군총관이 되어 군사 3만명을 거느리고 내주에서 바다를 건너 압록강으로 들어와 박작성을 공격했지만 고구려군의 결사적 응전을 깨뜨리지 못하고 퇴각했다.

● 패배의 치욕 씻지 못하고 죽은 태종 이세민.

개화(開化) 8년(서기 649년) 4월에 연개소문의 숙적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이 죽었다. 그가 죽기 전에 고구려를 치지 말라고 유언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는 허구이다. 그는 죽기 전까지 고구려에게 설욕하지 못한 것을 필생의 한으로 여겨서 수많은 전함을 건조하고 30만 대군으로 네번째 고구려 정벌을 꾀하다가 죽어버린 것이었다. 그의 사인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연개소문에게 패한 스트레스가 가장 큰 원인이었을 것이다. 안시성주 양만춘에게 맞은 화살촉의 독으로 죽었다는 설도 있고, 요택을 건널 때 피부병과 등창이 나서 앓다가 죽었다고도 하고, 패전의 치욕을 당한 원한이 만성두통이 되어 죽었다는 설도 있으니, 어느 족이 맞든 결국 그는 연개소문 때문에 죽은 셈이다.

태종 이세민의 뒤를 이어 즉위한 고종(高宗) 이치(李治)는 아버지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655년에 정명진(程明振)과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또다시 고구려를 치게 했으나 실패했다. 또 658년과 그 다음해에도 정명진과 설인귀(薛仁貴) 등을 보냈으나 역시 패퇴했다. 660년 7월에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그해 12월에도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무 소득이 없었다. 그 이듬해 4월에 초조해진 고종은 35만 대군을 동원해 친정(親征)에 나서려다가 여러 대신이 말리는 바람에 포기하고 말았다. 하지만 장수들을 보내 계속해서 고구려를 공격토록 했다. 그해 9월에 연개소문은 맏아들 남생에게 군사 2만명을 주어 압록강을 지키게 하니 당군이 감히 강을 건너지 못했다.

개화(開化) 21년(서기 662년) 당군은 정월부터 또 다시 고구려를 침공했다. 크게 본노한 연개소문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전해 사수대전(司水大戰)에서 당나라 장수 방효태(龐孝泰)와 그의 아들 13명을 비롯해 당나라 군사 3만여명을 전멸시키는 대승을 거두고 평양을 침공하던 소정방(蘇定方)의 부대마저 격퇴시켰다. 그리고 사서는 연개소문이 666년에 죽고 그의 맏아들 남생이 막리지를 세습하여 권력을 장악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연개소문이 정말로 666년에 죽었는가 하는 데에는 그동안 사학계에서 많은 논란이 있었다.

● 연개소문의 갑작스런 죽음도 역사의 수수께끼

대부분의 학자는 연개소문이 666년이나 그 지난해에 죽었다는 설을 지지했고,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는 그가 백제가 망하기 전인 657년에 죽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두 주장은 모두 문제가 있다. 중국 하남성 남양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남생의 묘지명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남생의 나이 9세가 되자 선인(仙人)의 지위를 주었다... 15세에 중리소형(中裏小兄)을 주었고, 18세에 중리대형(中裏大兄)을 주었으며, 23세에 중리위두대형(中裏位頭大兄)으로 고쳐 임명했고, 24세에 나머지 관직은 그대로 하고 장군을 겸하게 했다. 28세에 막리지(莫離支)로 임명하고 삼군대장군(三軍大將軍)을 겸해주었으며, 32세에 태막리지(太莫離支)로 더해 군국을 총괄하는 아형원수가 되었다.'

따라서 남생이 막리지가 된 해는 개화(開化) 20년(서기 661년)이니 그 이전에 연개소문이 죽었다고 볼 수는 없다. 더구나 연개소문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당나라 장수 방효태(龐孝泰)의 군대를 섬멸시킨 해가 그 이듬해가 아닌가. 또한 666년에 죽었다는 설도 그해에 남생이 당으로 도망치는 등 여러 사건이 벌어진 것을 볼 때 납득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연개소문이 죽은 해는 662년부터 665년 사이, 좀더 정확히는 663년 또는 664년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연개소문이 필자의 츠측대로 607년에 태어나 664년에 죽었다면 그때 그의 나이 환갑도 안 된 58세였다. 그의 사인은 전혀 기록이 없지만 아마도 병사한 것으로 추측된다.

일세의 영걸 연개소문은 그렇게 죽었는데, 그는 죽기 전에 남생(男生), 남건(男建), 남산(南山) 세 아들을 불러 이렇게 유언했다고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전한다.

"너희 형제는 고기와 물같이 화합해 작위를 다투는 짓을 하지 말라. 만일 그런 일이 있으면 반드시 이웃 나라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불세출의 영웅이었지만 자식 농사는 잘못 지었던 모양이다. 그가 죽은 지 2~3년도 안 되어 세 아들이 권력투쟁을 벌여 결국 고구려를 멸망의 길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연개소문이 그런 유언을 한 것도 평소 세 아들의 사이가 나쁜 것을 알았다는 반증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전에 세 아들에게 높은 벼슬을 준 것은 연개소문 또한 남에게 권력을 넘겨주기 싫어한 독재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김용만 박사는 이들이 골육상쟁을 벌인 원인이 친형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 자식 농사 잘못 지어 고구려는 망국의 길로...

어쨌든 형제간의 골육상쟁(骨肉相爭)은 남생이 수도 장안성을 비운 사이에 일어났다. 남생이 남건과 남산에게 국정을 맡기고 지방순시를 떠난 사이에 어떤 자가 형제간을 이간질했다. 그자가 두 동생에게 "남생이 두 분이 자기를 싫어하므로 장차 두 분을 제거하려 합니다."라고 하자 두 동생이 이를 믿지 않았다. 그러자 또 다른 자가 이번에는 남생에게 "남건과 남산이 태막리지가 돌아오면 저희들의 권력을 빼앗길까 두려워 도성으로 못 들어오게 하려 합니다."라고 했다. 삼형제는 처음엔 이 말을 믿지 않다가 마침내 서로를 의심하게 되었다. 남생이 비밀리에 심복을 장안성에 보내 사실을 알아오라 시켰는데 그만 동생들에게 붙잡혔다. 이 일이 직접적 원인이 되어 형제간의 갈등은 상쟁으로 번졌다.

남건은 황명을 빙자하여 남생을 소환했으나 남생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남건은 남생의 아들은 헌충(獻忠)을 살해하였다. 이로써 내전이 벌어졌다. 국내성을 장악한 남생은 이어서 오골성을 점령하고 남건, 남산 두 아우와 무력충돌을 했다. 오골성에서도 쫓겨난남생은 결국 아들 헌성(獻成)을 당나라로 보내 항복을 저청했다. 그러자 당황(唐皇) 고종(高宗)은 남생에게 요동도독 겸 평양방면 안무대사란 벼슬을 주었다. 고구려의 최고 집권자가 하루아침에 자기 나라를 공격하는 적국의 최고 사령관으로 둔갑한 것이었다. 이것이 개화(開化) 25년(서기 666년) 9월의 일이었다. 그리고 당은 대군을 일으켜 본격적인 고구려 정복에 나섰다.

한편, 고구려는 남건이 막리지가 되어 국정을 전담하고 당군의 침략을 막으려 했지만 한번 기울기 시작한 국운은 둑이 터진 제방과도 같이 걷잡을 수 없었다. 668년 고구려의 내분을 둘도 없는 호기로 삼은 당(唐)은 반역자 남생을 길잡이 삼아 50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공했다. 설상가상으로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淵淨土)까지 12개 성을 들어 신라에 항복했다. 신라도 2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공격했다. 남건과 남산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을 모두 동원하여 죽을힘을 다해 도성을 지켰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려 그해 9월에 항복하고 말았다. 이로써 추모성왕(皺牟聖王)의 개국 이후 28대 국왕 705년을 이어오던 거대왕국 고구려, 우리나라 5천년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개척했던 고구려는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져버렸다.

그런데 어떤 이는 고구려의 역사가 7백년이 아니라 9백년이라고도 한다. 이는 가언충(賈言忠)이 당황(唐皇) 고종(高宗)에게 한 말 가운데 "고구려 비기(秘記)에 '9백년이 되기 전에 80세 된 대장이 와서 멸망시킬 것이다.' 라는 말이 있는데 고씨(高氏)가 한나라 때 나라를 세워 지금 9백년이 되었고 이적(李勣)의 나이가 80세입니다."라는 데에서 비롯된 이야기이다.

좌우간 고구려가 멸망한 것은 당나라의 침략 때문이 아니라 연개소문의 아들들 때문이었다. 고구려의 위엄을 사방에 덜치던 불세출의 영웅 연개소문, 고구려의 자존심 그 자체였던 연개소문이 지하에서 그런 사실을 알았다면 얼마나 비분하고 통탄했을 것인가.

 

 

출처 블로그 > 갈바다
원본 http://blog.naver.com/wind5700/80030376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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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송골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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