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파주 NFC(국가대표 트레이닝쎈터) 현관로비에 걸려 있습니다.
김용식 감독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일본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뛴, 축구로 세계에 이름을 알린 첫 번째 선수였다. 김감독은
1910년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나 10세 때 축구를 시작해 36년 베를린올림픽(일본대표팀의 유일한 한국선수) 48년 런던올림픽(한국대표)에
출전한 뒤 52년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은퇴 후 대표팀 감독으로 54년 스위스월드컵에 참가했으며 양지팀·신탁은행(이상 실업팀) 등을 거쳐 81년
할렐루야 초대감독을 지냈다. FIFA 국제심판과 축구협회 부회장도 역임했다.
그의 작전메모를 들여다 보니 5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좋은 가르침이다..
54년 김감독이 선수들에게 전달한 메모로, 4페이지에 걸친 내용이다 영어로 세계적 선수가 되기 위해 필요한 요소들에 대한
언급, 지금도 통할만한 공격과 수비의 5원리 등이 빽빽하게 적혀있다. 이 메모는 당시 주장인 주영광에게 전달, 스위스 행 비행기안에서
선수들에게 숙지토록 했다. 하지만 당시 비행기 좌석이 발이 바닥에 닿지 않을 만큼 높아 선수들은 다리에 쥐가 날만큼 열악한 환경에서, 작전메모
속의 내용들이 선수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되었을 지는 의문이다.
작전메모 속의 내용을 조금만 소개해 보면 아래와 같다
Top class (세계적인 좋은 선수가 되려면..) - 연습의 꾸준한 되풀이는 완성을
초래한다 - 강력한 투지가 있어야 한다 - 기본기술이 완성되어야 한다. - 명철한 두뇌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공격과 수비의 5원리 공격: 넓게 설 것, 깊게 설 것, 침투 play를 할 것 수비: 밀집방어, 균형이 잡혀있는
수비를 할 것 스위스 월드컵을 기억하자!
어느 신문에 난 광고의 다음과 같은 문구가 가슴에 와
닿았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스위스로 떠났습니다. 미군의 수송기를 얻어 타고 가야만
했습니다. 예순 네 시간의 비행 끝에 도착했지만 쉬지도 못한 채 경기를 치러야했습니다. 응원단, 응원가는 커녕 제대로 된 축구화가 없어 징을
박고 뛰기도 했습니다. 외롭고 힘들었지만 쉬지 않고 달렸습니다. 내 나라 대표라는 당당한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위스 월드컵 관련 기록 <한권으로 보는 한국최초 101장면 '월드컵 출전' 중><한국 축구
발전사>에서 발췌
전쟁의 상흔은 깊었다. 그렇다고 주저 앉을 수도 없는 노릇. 재기의 몸부림이 사회 곳곳에서 일어났다. 바로 그 재기의 선봉에 한국축구가
나섰다. 1954년 3월 스위스 월드컵 극동지역예선이 벌어졌다. 상대는 일본이었다. 아시아에 처음으로 문호를 개방, 당시 본선진출권에
도전한나라는 한국과 일본뿐이었다. 당초 홈앤드어웨이 방식이었지만 일본인에게 결코 한국땅을 밟게 할수 없다는 정부의 방침에 다라 일본과의 지역예선
두경기를 모두 원정지에서 치렀다. 도쿄의 메이지 신궁 경기장에서, 첫 경기를 5대1로 이긴후 2차전에서 2대2로 비겨 사상 최초의 월드컵
출전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스위스 월드컵은 1954년 6/16 -7/4까지 열렸다. 전쟁의 상처가 그대로 남아있을 때 여의도 비행장에서 미군비행기를 타고 스위스에
도착한 것이 개막일 밤이었다. 6월9일 서울을 떠나 일본을 경유, 장장 7일만에 현지에 당도하여 다음날 오전에 세게 최강팀과 맞붙은 것이었다.(
우리팀이 스위스 취리히에 도착한 것은 6월16일, 대회는 이미 막이 올라있었다. 첫 경기는 이튿날 6월17일 오후 3시에
벌어졌다.) 비행기 안에서 선수들의 발이 바닥에 닿지도 않아 선수의 생명인 발의 피로도가 엄청났다. 뿐만
아니라 선수단 전원이 함께 장도에 오르지도 못했다. 여행사의 실수로 김용식감독과 1진 선수 12명이 도착한 후 2진은 2차전 직전에야 스위스땅을
밟을수 있었다. 마침 스위스 제네바에서 한국전쟁 참전 16개국회의가 열려 한국경기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첫 상대는 국제경기
32전 무패를 기록하고 있던 헝가리 김용식 감독은 '절대로 공세를 취하지 말고 수비에 치중하다가 찬스가 나면
역공을 펴라'고 주문했지만 전반에 다섯골, 후반에 네골을 더 내주며 0대 9로 패했다. 안간힘을 썼지만 골이 계속 들어갔던 것이다.
후반들어 한국 선수들 대부분이 발에 쥐가 나 운동장에 털썩 주저앉고 쓰러졌다.
시합이 끝난후 헝가리 감독은 한국팀은 사자처럼 용감했다고 말했다. 한국팀은 닷새 뒤 제네바에서 터키팀과 싸워 0대 7로 패해 다시 한번
처녀 출전국의 비애를 느껴야 했다. 귀국후 기자회견에서 김용식 감독은 앞으로 영국식의 W형 공격법을 버리고 구라파나 남미의 1대1전법을
쓰겠다고 말했다.
▶아드보카트 감독의 작전메모가 궁금하다
아드보카트는 전략가다. 그는 한국팀의 주무기를 강인한 체력이라고 보고 체력의
효과를 가장 극대화할 수 있는 전략으로‘체력 안배’의 전술을 사용해 왔다. 후반전을 승부처로 정하고, 전반에 무리한 경기 운용을 주문하지
않았다. 토고전과 프랑스전 모두 한국팀은 전반전에 실점했지만 조급해 하지 않고 수비를 다지고 체력을 비축하며 후반전을 기다렸던 것이다.
아드보카트는 프랑스전 직후 인터뷰에서 “후반에 선수를 교체하면서 압박을 강화하고 에너지를 쏟아부은 게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아드보카트 감독은 어떤 작전으로 6.24 스위스전을 맞이할까?
초반부터 선제골을 위해 달려들 것인지, 이전 경기들 처럼 전반엔 수비를 튼튼히 하고 힘을 비축한 뒤 후반 들어 적극적 공세를 펼칠
것 인지 궁금하다. 또 초반 무기력증이 반복되지 않도록, 초반부터 공세를 강화할 경우 상대 역습은 어떻게 차단할 것인지, 공수의 균형을 깨지
않고, 공세를 취할 압박의 형태는 무엇일지? 포백을 고수하는지? 박지성을 공격을 이끌 야전 사령관인 공격형 미드필더로 배치 할것인지? 아드보카트
감독의 작전메모가 궁금하다
한국은,54년 스위스 월드컵, 헝가리와의 경기 이후, 월드컵 때마다 세계 강호와 맞대결을 펼쳐 끈질긴 투혼을 보이며 최선을 다한 승부를
펼쳐왔다 태극전사들이, 다가오는 6월 24일 스위스를 꺾고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 헝가리에 0-9,터키에 0-7로 참패한 선배들의
아픔을 52년만에 씻어주기 바란다
이제 우리선수들이 다시 한 번 투혼을 발휘하여, 어려움을 이겨낸 '희망'을 보여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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