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김병익칼럼]사라진 권위, 살아난 권위주의

도깨비-1 2006. 6. 17. 13:28
[김병익칼럼]사라진 권위, 살아난 권위주의



권위에서 권위주의란 말이 파생되었겠지만, 그 두 말은 상반된 어감을 준다. 국어사전에 의하면 ‘권위’는 ‘어떤 분야에서 능히 남이 신뢰할 만한 뛰어난 지식, 실력’으로, ‘권위주의’는 ‘권위에 대하여 맹목적으로 복종하거나 권위를 휘둘러 남을 억누르려고 하는 사고방식’으로 각각 긍정과 부정의 대척적인 의미로 풀이된다.

그러니까 ‘권위’는 존경과 신뢰를 내포하는 것이고 ‘권위주의’는 공포에 기초하는 것이어서 ‘권위 없는 권위주의’라든가 ‘권위주의 없는 권위’ 같은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역대 대통령들에 대한 인상들을 그 치적의 성과에 관계없이 이런 관점에서 훑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 민주화 앞당긴 脫권위주의 ▼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은 권위와 권위주의를 함께 갖고 있었다. 이 대통령은 반일 독립운동에 국부라는 이미지로, 박 대통령은 정치적 지도력과 경제개발의 성과로써 자신들의 카리스마를 세웠고 거기서 형성된 권위주의로 독재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은 같은 군부 출신이지만 전 대통령은 박 대통령의 권위주의를 승계해 강화한 대신 노 대통령은 그것을 해체하는 방향으로 운영했다. 두 대통령이 모두 ‘권위’는 없었지만 전 대통령은 권위주의를 행사했고 노 대통령은 스스로 ‘물대통령’으로 자처하며 전 대통령이 기댔던 권위주의를 버렸는데 그것이 결과적으로 민주화로의 길을 열어주었다.

문민 출신의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은 이처럼 권위주의가 해체되어가는 과정에서 스스로 만든 카리스마로 권위를 자부했다. 그 권위는 40대부터 한 세대에 걸친 집요한 반독재 투쟁과 정치적 동료들에 대한 리더십으로 획득한 것이다. 그랬기에 두 대통령은 아들들이나 측근들이 부패 혐의로 재판받고 옥살이를 했지만, 전임 대통령들과 달리 그들 자신은 이런 모욕을 당하지 않았고 퇴임 후에도 최소한의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들의 탈권위주의는 우리의 민주화를 밀어주었고 이들이 확보한 권위는 ‘제왕적’이란 비판을 받으면서도 정치적 체통을 유지케 하고 국가원수의 위엄도 보장해주었다.

취임 1년을 맞는 노무현 대통령은 그렇다면 어떨까. 그 자신은 처음부터 권위주의를 취할 상황도 아니었거니와 그러지도 않겠다는 태도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는데 그 태도는 우리 정치나 스스로를 위해 바람직한 것이었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그가 권위주의와 함께 권위도 버렸다는 점이다. 그 자신의 생애가 주변적이었지만 대통령의 권좌에 올라서도 그 의자에 어울리는 권위적 태도를 스스로 사양한 것이다. 그는 대통령 노릇 하기 어려움을 한탄했고, 대통령의 권력으로 지휘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는 세력들을 적으로 설정함으로써 자신의 격을 아래상대의 수준으로 격하시켰다. 가혹하게 말하면, 스스로 권위를 포기하면서도 박 대통령이 비판세력에 대해 취했던 ‘배제의 정책’으로 권위주의의 질 낮은 행태를 답습한 것이다.

 ▼ 배제의 정책’ 버리고 포용을 ▼

나는 권위주의든 권위든 그것이 반드시 대통령으로서의 성공적인 치적과 관련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 지금까지보다 앞으로 네 배나 긴 임기가 남아 있기 때문에 비관만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스스로 통치자로서의 권위적인 능력을 자임하고 자부하지 않으면 (혹은 못하면), 그래서 존경과 신뢰를 받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여 지도력을 상실한다면, 더구나 국민을 우리와 적으로 구분해 편들기를 계속한다면 우선 나라가 걱정이지만 그 자신을 위해서도 염려스럽다.

나는 노 대통령이 그 이력은 어떻든 변두리 의식, 주변부 콤플렉스를 벗어나 주류적 중심부에 서서 모두를 포용할 능력을 발휘하는 권위를 확보해주기 바란다. 대통령으로서의 통치력도, 우리 모두 바라는 개혁도 그 같은 권위에의 자신감 위에서야 가능할 것이다.

 (김병익 문학평론가 · 인하대 초빙교수)  (2004-02-18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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