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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검박하다고만 했는가, 이토록 화려한 한국美를

도깨비-1 2015. 8. 26. 10:12

 

누가 검박하다고만 했는가, 이토록 화려한 한국美를

  • 유홍준 / 미술사가·명지대 석좌교수

입력 : 2015.08.26 03:00 | 수정 : 2015.08.26 06:14 / 조선일보

  유홍준이 본 '세밀가귀' 展

화려한 멋, 신라 '옥 장식 달린 빗'

  섬세한 무늬 넣은 고려 '나전칠기'

 

 

"세밀해서 가히 귀하다 할 만하다."

지금 서울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에서는 한국미술사의 섬세한 멋을 보여주는 '세밀가귀(細密可貴)'전 (9월 13일까지)이 열리고 있다. "세밀해서 가히 귀하다"는 이 말은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고려 나전칠기를 보고 한 말이다.

사실 이제까지 우리는 한국미를 검박한 아름다움에서 많이 찾았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건대 그것은 한국 미의 여러 특질 중 조선 선비 문화의 소산이었을 뿐이다. 우리 미술사에는 고구려의 강인함, 백제의 우아함, 신라의 화려함, 그리고 고려의 세밀가귀도 있다. 이제 그런 넓은 시각에서 보자는 것이 이 전시회의 큰 뜻이다.

나는 두 차례 이 전시회를 보면서 아마도 내가 이제까지 본 한국 미술 특별전 중에서 가장 화려한 전시회가 아니었나 하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국보만 21점, 보물이 26점이다. 또 미국, 유럽, 일본 등 해외 소재 문화재도 40여 점이나 된다. 이처럼 명품이 많은 전시회를 보는 요령은 장르마다 딱 한 점만 집중적으로 보아 세월이 지나도 두고두고 머릿속에 남게 하는 것이다.

금속공예품 중에서는 신라의 '옥 장식 달린 빗'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거북 껍질로 얼개빗을 만들면서 손잡이에 금으로 화려한 꽃무늬를 새기고 옥으로 만든 세 가닥 꽃술을 달았다. 1000년 전에 이런 디자인이 나왔다는 사실에 할 말을 잃게 된다. 신라의 공예는 곡선의 변화가 많아 화려함이 더욱 드러난다는 것을 이 빗 하나가 다 말해준다.

청자에서는 브루클린 박물관에 소장된 '청자양각 연판문 주자'가 백미이다. 이 청자는 명성황후가 자신의 주치의였던 릴리어스 언더우드에게 하사한 것이다. 형태의 기발함은 말할 것도 없고 양각 연판 무늬에 점점이 하얀 백화(白花)를 가하여 청자의 맑은 빛깔이 더욱 순결해 보인다.

회화에서 세밀가귀는 역시 고려 불화이다. 고려 불화는 일찍이 원나라로부터 섬려하다는 평을 받아왔다. 그 섬려함은 복식 표현에 여실히 드러난다. 흰 사라를 걸쳤음에도 빨간 법의와 팔뚝 살이 은은히 비친다. 우리 학생들은 '시스루 패션'의 원조라고 즐거워했다.

그 많은 명품 중 압권은 단연코 서긍이 예찬한 고려 나전칠기가 9점이나 출품된 것이다. 현재까지 세계에 있는 고려 나전칠기는 17점이 확인되었으니 그 절반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고려 나전칠기는 당대의 '한류'였다. 원종 13년에는 원나라 황후가 나전경함을 요청하여 전함도감(鈿函都監)을 따로 설치했을 정도였고, 일본은 우왕 14년에 사신을 통해 정식으로 요청하기도 했다.

이런 고려 나전칠기이건만 국내에는 불과 2점밖에 없다. 현재 전하는 것은 거의 다 일본에 유전된 것이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영국 박물관,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보스턴 박물관, 암스테르담 박물관 소장품들도 모두 20세기 초에 일본에서 구입해간 것이다. 일본은 외교적으로도 구해갔지만 고려 말 왜구들이 약탈해온 것을 '사중(寺中)의 보물'로 간직했기 때문에 많이 전하는 것이다.

고려 나전칠기는 정말로 섬세하여 무늬로 넣은 낱낱 자개 편이 1㎝도 되지 않아 손가락으로 잡을 수 없다. 꽃 한 송이를 위해서는 화심 1개, 화판 8개, 넝쿨손 10여개 등 20개의 작은 자개가 필요로 했으니 상자 하나에 4000 내지 8000개의 자개 편이 들어갔다. 정말로 세밀가귀이다.

서긍이 귀하다고 칭송한 고려 나전칠기가 오늘날에는 너무 드물어서 더 귀하다고 할 것인데 이번 전시에 한꺼번에 9점이나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참으로 귀한 전시가 아닐 수 없다. 좋은 전시회가 열릴 때 많은 관객이 찾아와야 좋은 전시회가 또 열린다. 문화는 공급자가 제공하지만 그것을 발전시키는 것은 소비자이다.

유홍준 미술사가·명지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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