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덕의 新줌마병법] 꽃이 지네, 사랑도 지네
입력 : 2015.05.05 03:00 / 조선일보
나이 칠십 팔팔한 청춘인데 내 임은 요양병원에 누웠네
지난날 떠올리면 야속하지만 야망 잃고 스러지니 가여워라
라일락향기 이토록 황홀한데 사랑이 지니 봄마저 야속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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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윤덕 문화부 차장
나는 잘 있다. 다리 아픈 게 어디 하루이틀이냐. 기침도 잦아들었다. 석이랑 준이, 큰사위는 잘 있는지. 적적하기는. 밥 달라, 물 달라 귀찮게 구는 남자 없으니 세상이 편하다. 어버이날은 무슨. 아무것도 필요 없다. 자식들 아픈 데 없이 오순도순 서로 보듬고 살면 그것이 젤로 큰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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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희 아버지한테 다녀왔다. 날씨가 어찌나 방정맞던지. 다 늙은 할망구 그리운 서방님 만나러 간다니 꽃들이 시샘을 하더구나. 눈은 어두운데 비까지 내리니 어디가 어딘지 분간이 돼야 말이지. 요양병원 가는 버스를 반대로 탄 바람에 온 시내를 빙빙 돌다 멀미 나 숨이 깔딱 넘어갈 뻔했다. 비바람에 옴팡 젖어 병실로 들어서는데 이 양반 눈을 질끈 감고 있더구나. 마누라 왔으니 눈 좀 떠보소, 팔을 흔들어도 꼼짝을 않더구나. 2주일 만에 왔다고 토라진 게지. 멀디 먼 병원에 당신 혼자 내박쳐뒀다고 역정이 나신 게야. 나도 바빴지. 자식 손주들 1년내 먹을 된장 담가야 하고, 무더위 닥치기 전 고구마도 심어야 하고. 요즘 열무가 좀 좋으냐. 해서 한 단지 담아 병원에도 좀 가져오느라 늦었다고 싹싹 빌었다.
그 사이 할머니 제사도 있었구나. 하나밖에 없는 며느리 달달 볶아먹던 시어머니인데도 다급하니 빌게 되더라. 목숨처럼 사랑했던 저 아들 벌떡 좀 일으켜 세워주소, 이 화사한 봄날 꽃구경은 한번 하고 떠나게 해주소, 빌고 또 빌었다. 간병인들이야 줄곧 데면데면이지. 내 몸처럼 보살펴주는 사람 세상에 어디 있을라고. 산송장 같은 몸을 앉혔다 눕혔다 먹이고 씻기는 일이 좀 고달프더냐. 그래도 공으로 하는 일 아니니 식기 전에 밥 떠드리고, 말 한마디라도 다정히 건네주면 좋으련만. 그래서 다 쓰러져가는 판잣집이라도 자식새끼 종알거리는 집이 젤로 좋다는 거다. 세상 재미 암만 좋아도 조강지처 치마폭이 젤로 정겹고 따숩다는 거다. 내가 무르팍만 성해도 집으로 모셔올 터인데, 그 낯선 곳에 떼놓고 와서는 미안하고 죄스러워 밤에 잠이 안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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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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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씸하기야 이루 말할 수 없지. 자식은 셋이나 낳아놓고 농사일은 나 몰라라, 정치 한번 해보겠다며 허구한 날 서울로 부산으로 돌아쳤으니. 마누라는 또 얼마나 구박했누. 무식하다고, 밥상에 온통 군내나는 촌음식뿐이라고. 서울음식엔 금가루라도 뿌린다더냐. 영어 한마디 못하기는 지나 내나 매한가지. 툭하면 농고를 수석으로 나왔다고 자랑하더니 달포 전 장터에서 만난 쌀집 김만중씨가 "그런 일이 있었슈?" 하며 배시시 웃더라. 문자는 곧잘 썼지. 키는 땅딸막해도 반반한 이목구비에 청산유수라 여자들이 좀 끓었더냐. 당장에 달려가 요절을 내고 싶었지만 또 무식한 여편네 소리 들을까 참고 또 참았지. 유식한 서방님 지청구에 늘그막에 공부란 것도 하게 됐지. 고사성어 몇 개만 알면 오가는 말 알아듣겠다 싶어 나이 오십에 한자교실에 등록했지 뭐냐. 녹슨 머리로 당최 못 따라가겠더니 지성이면 감천이요 고진이면 감래라고, 수험생마냥 밤낮으로 외고 또 외웠더니 실력이 일취월장하여 아들 같은 선생님한테 칭찬도 받았지. 문리가 트이니 늦공부가 어찌나 재미지던지. '견리사의(見利思義)' 이익을 보면 의리에 맞는가를 먼저 생각하고, '과유불급(過猶不及)'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으며, '마부위침(磨斧爲針)' 도끼를 갈아 바늘 만들 듯 어떤 어려운 일도 끊임없이 노력하면 반드시 이룰 수 있다니 이보다 좋은 가르침이 있더냐. 우스개 고사성어도 몇 알려주랴? 인명(人命)은 재처(在妻)요, 순처자(順妻者)는 흥(興)하고 역처자(逆妻者)는 망(亡)하느니, 마누라한테 순종하면 복을 받고 거스르면 칼을 받는다는 뜻이란다. 너도 그리 생각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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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들어간 원이가 전화를 했더구나. 대뜸 "할머니, 개떡이 뭐예요?" 묻더라. "개떡은 뭣에 쓰려고?" 했더니 선생님이 "글씨를 개떡같이 쓰면 혼줄을 내주겠다" 했단다. 어린 애가 글씨 좀 개떡같이 쓰면 어때서. 개떡보다 못하고 봄날처럼 변덕스러운 게 우리네 인생인 것을. 병원엔 웬 사내들이 그리도 많은지. 이 악물고 살았든, 농땡이 치고 살았든 한 집안을 이끌었을 가장들이 넋놓고 누워 있으니 가엾고 딱해서 보기가 힘들구나. 어제는 40대 젊은이가 뇌 쇼크로 쓰러져 들어왔다. 스트레스가 얼마나 많았으면. 최서방한테 잘해라. 남자들은 어리숙해서 작은 충격에도 속절없이 무너지느니. 큰 잘못 아니거든 알아도 모른 척 져주며 살거라. 봄꽃이 처음부터 고왔겠누. 처음부터 달콤한 열매가 어디 있누. 비바람 맞고 나서 더욱 단단히 여무는 것을. 그래 그런가. 미우나 고우나 나는 저 양반 없으면 안 되니 어쩌면 좋으냐. 오늘 밤이라도 훌쩍 떠날까 자다가도 심장이 오그라드니 이를 어쩌냐. 무식한 여편네라 욕해도 좋으니 정신 한번 온전히 돌아와 주었으면. 라일락 향기는 이토록 황홀한데 나의 황혼은 왜 이리 서글픈지. 사랑이 저무니 봄마저 야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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