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羊(양)의 해를 위한 기도 - 김주영

도깨비-1 2015. 1. 1.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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羊(양)의 해를 위한 기도

입력 : 2015.01.01 03:03 / 조선일보

牧羊犬에게 쫓겨 살면서도 유유자적하는 양들을 보라
타인의 기뻐함에 감격하고 삶이 살벌해도 낭만에 젖고
사소한 것에도 시선을 주고 일상에서 희망과 은혜 찾길


김주영 소설가
김주영 소설가



일제 말기에 태어나서 머리가 허옇게 센 늙은 얼간이로 살아온 지금까지 세월이 더디게 지나가서 따분하다거나 지루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무슨 곡절 때문인지 하루가 멀다 하고 또다시 세상이 들썩하는 대형 사고나 전쟁이 터질까 조마조마했었고, 걸핏하면 이 아름다운 나라를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협박과 조롱을 일삼는 북한 사람들 등쌀에 자나 깨나 물매가 가파른 지붕 추녀 끝에 서 있는 듯한 두려움과 공포심 때문에 비틀비틀 부박한 삶을 살아왔다. 심지어 다른 나라에선 주전부리나 심심풀이에 불과한 견과류 한 봉지가 우리나라에 상륙했다 하면 대형 사건으로 둔갑하는 이상한 나라에 나 또한 살고 있다. 이토록 시끄럽고, 날마다 데모하고, 뭔가를 굳세게 부르짖으며 분탕질이 끊이지 않는 이 나라가 어떻게 세계가 깜짝 놀랄 만한 교육적 성과와 경제성장을 이루어 냈는지 그 또한 놀랍고 신기하지 않은가.

악몽(惡夢)에 쫓기고, 넘어지고, 비틀거리는 삶을 살면서 우리에게 어느덧 잊힌 것이 바로 전쟁 때도 있었던 낭만이었다. 삶의 무게에 도사린 긴장감 때문에 한눈팔 겨를도 없고 마름쇠가 뿌려진 골목길을 두려운 발걸음으로 걷고 있는 지금, 낭만은 단어 자체도 사치라 할 만하다. 그러나 너무나 척박한 삶을 탓하며 희망조차 바랄 수 없게 된다면 저절로 얻어졌던 행복이나 은혜마저 놓치고 사는 불행을 겪게 된다. 양광모 시인은 '무료'라는 시(詩)에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무료의 은혜를 무료로 가르쳐 준다. '따뜻한 햇볕 무료/ 시원한 바람 무료/ 아침 일출 무료/ 저녁 노을 무료/ 붉은 장미 무료/ 흰 눈 무료/ 어머니 사랑 무료/ 아이들 웃음 무료/ 무얼 더 바래/ 욕심 없는 삶 무료/ 밝은 미소 무료/ 좋은 생각도 무료/ 오늘 이 시 읽는 것도 무료/' 이 시를 읽으면 우리는 평소 하잘것없고 사소하다고 생각하던 것들의 드높은 가치와 은혜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불현듯 깨닫게 된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낭만만이 아니다. 더불어 가슴을 뜨겁게 덥혀주는 감동이 없는 사회를 살고 있다. 때로는 온 나라가 감동으로 들떠 있을 때도 있어야 신바람이 날 텐데 우리에겐 그런 경험을 한 기억이 별로 없다. 심금을 울리는 언어조차 들어본 적이 없다. 넘쳐났던 유머도 온데간데없어지고 말았다. 바늘 쌈지를 입에 물고 있는 것처럼 상대방의 가슴을 향해 폭뢰처럼 발사되는 냉혹하고 살벌한 언어만 우리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언제부턴가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언어에 길들여졌고, 그래서 우리는 범죄 영화에서처럼 보복할 상대를 찾아 부라린 두 눈에 식칼을 가슴에 품고 어두운 골목길을 배회하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다. 비틀어 물지 않으면 정치가 안 되고, 걷어차고 엇박자 놓고 삿대질에 멱살잡이하고 법은 안중에도 없을 뿐 아니라 허접쓰레기처럼 여기고 이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고 협박하는 자들만 거리를 메운다. 언어는 그 사람이나 나라의 품격과 줏대와 명예를 품고 있어야 한다. 그런 고귀한 언어를 우리는 언제부턴가 퇴행적 막말과 욕설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국경없는의사회' 소속의 건축가 위그 로베르는 진료소를 짓기 위해 에볼라가 창궐하는 서아프리카로 뛰어들었다. 그가 기자와의 일문일답에서 남긴 한마디는 지난해에 들었던 가장 위대한 언어 중 하나였다. 그는 생명을 담보해야 하는 에볼라 위험국인 서아프리카에 왜 가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곳에 가면 엄청난 보상이 기다리고 있다"고 답한다. 기자가 그 보상이 무엇이냐고 다시 묻자 그는 "사람을 살릴 수 있지 않나"라고 대답한다.

또한 베스트셀러 '깨진 유리창 법칙'의 저자 마이클 레빈의 지적을 떠올리게 된다. 우리들의 일상에서 한 장의 깨진 유리창을 사소한 일로 방치할 때 그것을 통해 치명적인 위험과 재앙이 흘러들게 된다는 것이다. 잘못된 것에 익숙해지다 보면 문제를 찾아내기 어렵게 되거나 회복하기가 어렵게 되는 경우가 반드시 온다. 사소한 것의 방치가 결국엔 한 기업을 쓰러뜨리는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깨진 유리창이 왜 발생하였는지, 어떻게 수리해야 하는지, 수리하고 나면 어떤 보상이 따르는지 면밀하게 따져서 시기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다른 사람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 좋아하는 사람은 가치관이 뚜렷하게 확립된 사람이고 인간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의 말과 행동은 언제나 감동을 준다. 새해는 양(羊)의 해다. 죽을 때까지 목양견(牧羊犬)에게 쫓기고 조롱당하면서도 초원을 유유자적하는 양 떼처럼 어려운 가운데 살벌하게 살아가지만 때로는 낭만에 젖어보고 감동받을 일을 찾아보며 사소한 것에도 시선을 돌려 고쳐나갈 줄 아는 혜안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은혜의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한다. 우리들 일상에 스스럼없이 진열되어 있는 희망과 은혜를 찾아내자.

김주영 소설가 |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