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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천석 칼럼] 당선인이 마주할 시간의 화살·시간의 쳇바퀴

도깨비-1 2012. 12. 22. 16:03


[강천석 칼럼] 당선인이 마주할 시간의 화살·시간의 쳇바퀴

당선자·낙선자 모습
보기 좋고 고마웠다
아끼는 사람
멀리해야 하는 당선인
고통 알지만…


 

강천석 주필 / 조선일보 2012. 12. 22.
 

   마음의 고삐를 놓쳐 혼자 기쁨에 겨워하면 옆 사람 상처를 덧나게 한다. 반대로 제 슬픔을 내키는 대로 쏟아내면 분위기가 꼬인다. 다 아는 이치여도 실천하긴 힘들다. 이런 뜻에선 당선인이 먼저 전화를 걸어 문 후보를 위로하고 '협력과 상생의 정치 약속'을 건넨 것도 보기 좋았고, 당선인을 축하하며 '정파를 넘어서 돕겠다'고 한 문 후보 응대(應對)도 훌륭했다. 만일 정반대로 움직였더라면 어찌 됐을까. 선거 결과를 제 일인 양 여기며 들뜬 국민 1577만3128명과 본인이 매를 맞은 듯 아파하는 국민 1469만2632명 사이의 감정이 몇 배 심하게 뒤엉켰을지 모른다. 두 후보 모두에 대해 뭔가 양이 차지 않아하던 이들도 이제 한시름 덜었을 법하다. "화해와 대탕평책(大蕩平策)으로 분열의 고리를 끊겠다"는 당선인의 다짐 실천이 더 절실해졌다.
   시간은 시위 떠난 화살처럼 혼자 달려나간다. 누구나 지나고 나면 '쏜살같다'는 말이 달리 생긴 게 아니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대통령 취임까지 65일, 대통령 임기 1826일도 그렇게 사라진다. 당선인은 머지않아 국민에게 약속한 일, 당선 확정 순간 혼자 다짐한 맹세를 떠올리면서 흔적없이 빠져나가는 시간 앞에 다급해질 것이다. 나라 곳간을 열어보면 메워야 할 우리 사회 여러 골의 깊고 넓음에 비해 메울 돈은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당장 확인할 터이니 답답하기도 할 것이다.
   시간의 흐름은 묘하다. 시간에 떠밀려 경황 없이 쫓기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면 어찌 된 영문인지 몇 년 전 출발했던 바로 그 자리 근처에서 서성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대통령비서실은 대통령의 태엽을 감는 곳이다. 대통령은 그들이 감아 놓은 태엽대로 보통 하루 15시간을 나라 안 사람, 나라 바깥 사람 만나고, 회의하고, 연설하고, 문서에 서명하고, 때로는 가족이 아닌 사람과 조찬·오찬·만찬 세 끼를 함께해야 한다.
   하고 싶어 시작한 일이 아니라면 몇 달도 감당 못하고 손들었을 것이다. 산을 옮기고 골짜기를 메워 국민을 편안하게 잘살도록 하고, 경영자와 근로자의 등을 두드려 세계를 상대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들어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겠다는 '욕심 아닌 욕심'에 기대서 버티는 자리다. 그렇게 5년을 얼추 보낸 다음 나라를 다시 살피면 반드시 옮기겠다고 마음먹었던 산은 옛날 그대로 버티고 있고, 평평하게 만들리라 작심(作心)했던 곳곳의 웅덩이와 골짜기는 별반 달라진 게 없다. 임기 말의 대통령은 이런 허망함에 더 피로하다.
   이명박 대통령은 아침 5시 반에 기상(起床)해 7시 반이면 어김없이 집무실에 들어선다고 한다. 오늘까지 1762일을 태엽 감긴 인형처럼 분(分) 단위, 시간 단위로 쪼갠 일정을 소화해왔다. 그의 재임 기간 한국은 미국발(發) 금융 위기, 유럽발 재정 위기를 어느 나라보다 빨리 헤쳐 나왔다. 국민총생산·1인당 GDP·수출·무역량도 과거 기록을 깨뜨렸다. 덕분에 한국은 인구 5000만명, 국민소득 2만달러 이상 나라를 일컫는 '2050클럽'에 세계 7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얼개를 짜논 한·미 FTA를 노무현 지지 세력이 발목을 잡는데도 홍역을 치르며 매듭지었다. 집념인지 집착인지 모를 만큼 밀고 간 4대강 사업의 공과(功過)도 한 10년 지나면 확실히 드러날 터이다. 영산강·금강 언저리를 걷다 보면 허술한 곳 손봐야 할 곳이 여기저기 눈에 띄지만 시간이 반드시 4대강 비판론자의 편이 아닐지 모른다는 느낌이 든다.
   대통령 임기가 65일 남았다. 경제적 양극화 심화, 늘어난 청년 실업과 좀체 늘지 않는 일자리, 편 가르기 인연(因緣) 인사, 출산율 저하와 육아(育兒) 복지 악화, 불안한 노후(老後), 국민과의 불통(不通), 행복하지 않은 인생 등 온갖 책임 추궁이 대통령을 향하고 있다. 영어(囹圄)의 처지인 팔순(八旬)을 바라보는 형님, 재판을 기다리는 아들을 둔 가족적 번민(煩悶)도 어깨를 내리누른다. 묻지 않아도 그의 가슴을 보람보다 비감(悲感) 서린 바람이 휩쓸어가고 있을 것이다.
   서양에선 쏜살같이 달려가는 듯하다 어느 새 제자리로 되돌아오는 시간의 두 얼굴을 '시간의 화살, 시간의 쳇바퀴(Time's Arrow, Time's Cycle)'라 한다. 당선인은 어린 시절부터 '대통령의 하루'와 '대통령의 일생'을 피붙이로 지켜보며 자랐다. 대통령이 맞아야 하는 '시간의 화살'과 대통령이 갇히고 마는 '시간의 쳇바퀴'란 역설(逆說)을 뼈아프게 느꼈을 것이다. 그런 당선인에게 이런저런 군더더기 충고는 부질없다.
   딱 하나 '당선인이 가장 아끼는 사람을 보호하려면 그들을 멀리해야 한다'는 주문을 덧붙여야 하는 우리 처지가 서글프다. 권력·돈·명예에 눈먼 이 나라 승냥이들은 역대 대통령이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덮쳤다. 고단(孤單)한 당선인에게 이 말을 건네는 게 너무 무정한 처사인 줄 알지만 우리 현실이 그런 걸 어떡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