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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깡통' 운운한 김지하의 쓴소리

도깨비-1 2012. 11. 20. 11:05


[특별기고] '깡통' 운운한 김지하의 쓴소리

이념·역사관·전술로 뭉친 세력
'부드러운 개량주의'가 깰 수 있나
汎좌파 휘두르려다 덫에 걸려…
3위가 2위 상대로 베팅한 형국
근본주의 이념 세력이 떠오르면
'산토끼 담당'이었다고 깨달을 것


   류근일 언론인/ 2012. 11. 20 조선일보

 

   김지하 시인은 왜 안철수 후보를 향해 "어린애 같다. 깡통이다" 했을까? 그 참뜻이 이제는 읽힌다. 안철수 후보는 '안철수의 생각'으로 '범(汎)좌파의 생각'을 능히 아우를 수 있다고 자신한 모양인데, 요즘 와서 보니 그게 영 '헛발질'처럼 보이기에 하는 말이다.
   그는 처음엔 범좌파보다 훨씬 잘나갔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그는 겉으로는 저들을 통제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실상 범좌파의 덫에 걸리고 있다. '가치와 철학의 공유(共有)'라는 말부터가 통일전선의 블랙홀이다.
   그렇다면 '안철수만의 생각' 같은 건 처음부터 신기루였다는 이야기다. 이미지였을 뿐 실체가 아니었다. 있다면 전략적 모호성뿐이었다. 그는 재래식 좌파처럼 모나게 나가진 않았지만, 크게는 그들이 하는 말을 '부드럽게' 각색하고 있었다. '한반도 평화체제'와 '안보'를 수사학적으로 얽어매는 식이다. 이 주식(主食)에 저 반찬을 곁들이는 것, 바로 작위적 모호성이었다. 그걸 사람들은 '안철수만의 길' '제3의 길'인 양 착시(錯視)했다.
   이 착시 현상 아래서 그는 전략을 짰다. '안철수의 속생각'이었다. '범좌파와 민주당 울타리 밖에 엇비슷한 별채 하나를 짓는다. 너희가 그것을 끌어안지 않으면 대선에서 진다는 인식을 심는다. 그 인식에 힘입어 단일화 샅바싸움의 고삐를 쥔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부산 대학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것이다. 게다가 문재인 후보 쪽이 세몰이를 했다. 발끈한 '안(安)의 엄포'가 있었고 이해찬 등이 물러났다. 그러나 그들의 사퇴는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운동가들은 들판으로 갈 때 오히려 더 왕성한 실력을 발휘한다. 그래서 그들 '떠나간 장고'는 '떠나는 척하는 장고'나 다를 게 없다.
   안철수 후보는 이걸 아는지 모르는지 협상을 재개하기로 했다. 그쯤에서 "낡은 것이 쇄신됐다"고 점수를 주기로 한 것 같다. 그러나 민주당 내에 '낡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누구누구,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그들을 찍어낸 원판 자체의 이념, 역사관, 전략전술, 체질, 문화의 틀(cultural pattern) 같은 것이다. 그 견과류 같은 알맹이가 까짓(?) '안철수의 생각' 정도의 '개량주의' 일격으로 하루아침에 깨졌다고 봤다면 그건 낙관적이다 못해 너무 어린 생각이다.
   '안철수의 생각' 자체가 애초부터 이념 세력의 1대1 협상 맞수가 되기엔 그 짜임새부터가 촘촘한 게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존경하는 운동권 갑(甲) 앞에 서면 "나는 왜 작아지나요?"라고 느끼는 을(乙)이었다. 그가 인생을 을 아닌 갑으로 살고 싶었다면 그는 자신에게 맞는 제3의 길을 넓혀 갔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굳이 이념 쪽 갑 사람들과 섞여 주도권 다툼을 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진한 물감과 옅은 물감이 섞이면 어떻게 되나? 프랑스 혁명기의 옅은 물감 지롱드당이 진한 물감 자코뱅당과 M&A를 해 대주주가 되는 일은 상상할 수 없다.
   안철수 후보는 더군다나 빌보드 차트 2위에서 3위로 밀렸다. 그런 3위가 2위를 향해 "내 말대로 안 하면…" 하고 베팅을 했다. 밑천보다 크게 부른 것이다. 그러나 이념 세력은 알면서도 순순히 져주었다. 아니 져주는 척하고 있다. 그쪽의 '대의(大義)'라는 기준에서 보면 조금도 이상할 게 없다. 문(文)이냐 안(安)이냐 하고 싸우다가도 될 사람이 되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문 후보가 되면 좋지만, 안 후보가 돼도 '보쌈'해오면 그뿐이기 때문이다.
   안 후보는 지금 이렇게 기분 좋아할지도 모른다. "한 방 되게 쳤더니…." 물론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설령 청와대행(行) 티켓을 딴다 해도 그에게 각계각층의 공직을 메울 자기 세력이 있을까? 결국은 1980년대 이래의 486, 노무현 키즈, 현장 운동가, 이념 폴리페서가 뻐꾸기처럼 밀고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선거 기간 잠잠하던 '진짜배기'들이 대망의 남북연합제를 향한 '2013년 체제'를 들고 나설 것이다. 그리고 '안철수를 넘어서' 갈 것이다.
   근본주의 이념 세력이 그렇게 '진짜 대주주'로 뜰 경우 그때의 안철수 공(公)은 이렇게 자문해 봄직하다. "나는 변혁 터줏대감들을 위한 '산토끼 담당'이었나?" 안철수 후보는 세상을 너무 쉽게 보는 건 아닌지? "어린애 같다"고 한 김지하 시인의 쓴소리는 그래서 그에겐 고마운 경구(警句)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