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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배 비싼 와인의 맛은? 브랜드와 가격의 허실

도깨비-1 2012. 9. 13. 13:29


4배 비싼 와인의 맛은? 브랜드와 가격의 허실

 

[이명우 교수의 경영수필] 조선일보 2012. 09. 13.

- 몬다비와 몬다비 리저브
10년 전 美 유통업자들과 저녁
와인 블라인드 테이스팅
값싼 보통 몬다비 와인이 뽑혀
- 삼성과 소니
"값은 싸지만 수준 차 별로 없어"
삼성을 몬다비에 비유해 설득
후발 브랜드 알리는 데 성공

 

   '로버트 몬다비(Robert Mondavi)'.
   미국 캘리포니아주 나파밸리(Napa Valley)의 이 와인은 나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이름이다. 이 와인에는 과거 삼성전자가 후발 업체 시절 브랜드 인지도가 약해서 겪었던 애환, 그리고 거기서 벗어나려고 안간힘 썼던 필자의 깊은 고민이 배어 있다.
   10여 년 전 필자가 미국 시장에서 삼성의 새로운 유통 채널을 구축하려고 뛰어다니던 때의 이야기이다. 유독 시카고에 있는 한 대형 유통업체의 문이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아예 사람을 만나주지를 않았다. 인맥을 총동원해서야 간신히 저녁 약속을 잡았다. 가볍게 식사나 하자고 했는데, 그쪽 책임자가 5명이 나오겠다고 알려와 우리 측에서도 5명이 나갔다.
   그들의 관심을 끌어내기 위한 방안을 고민하던 중에 그쪽 책임자가 와인에 관심이 많고, 특히 '몬다비 리저브'라는 와인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같은 몬다비인데도 4배나 비싼 '몬다비 리저브'
   식당에서 자리를 잡자마자 모른 체하고 그쪽 책임자에게 적당한 와인을 골라 달라고 했더니, 펼쳐 보지도 않고 와인 리스트를 다시 돌려준다. 와인 리스트에는 그가 즐겨 마신다는 '몬다비 리저브'가 있었고, 이보다는 못하지만 같은 몬다비에서 나온 다른 와인도 있었는데 실은 그것도 꽤 괜찮은 와인이었다.
   원래 '리저브(reserve)'란 명칭은 이탈리아나 스페인에서 유래한 것으로 특별히 여러 해 숙성된 와인에만 붙일 수 있었다. 근래에는 마케팅 경쟁이 심화하면서 제품 차별화 전략의 수단으로 바뀌고 있다. 같은 와이너리에서 생산하는 와인 중에서도 최상급 포도를 쓰거나 특별히 숙성을 시킨 프리미엄 와인을 내놓으며 '리저브'란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다. 특히 몬다비의 리저브 와인은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으며, 같은 와이너리에서 나온 보통 와인 가격의 5배나 되었다. 식당에선 한 병에 300달러에 팔렸다.
   프리미엄 제품이 여러 면에서 품질이 좋다 하더라도 이렇게 큰 가격 차이를 정당화할 정도인지가 늘 궁금했었다. 순간 호기심이 발동한 필자가 그에게 말을 건넸다.
   "몬다비의 와인이 저는 좋던데 몬다비 좋아하세요?"
   "네, 아주 좋아합니다."
   "몬다비 좋아하신다니 평소에 궁금한 것이 하나 있어요. 몬다비 리저브와 보통 몬다비가 왜 이리 가격 차이가 나는지 모르겠어요. 정말 이렇게나 맛이 다른가요?"
   "당연히 리저브가 훨씬 더 좋겠지요"
   "얼마나 더 좋은데요?"
   "좋은 질문이네요. 글쎄…, 얼마나 더 좋을까?"
   "그럼, 우리 두 와인을 놓고 블라인드 테이스팅(blind tasting·브랜드를 보지않고 맛을 평가하는 것)을 해보면 어때요?"
   그는 재미있는 제안이라며 환영했고, 즉석에서 와인 시음이 벌어졌다. 먼저 따른 와인을 편의상 A, 나중 와인을 B라고 부르며 우리는 와인 테이스팅을 했다. '시카고의 심판'은 그렇게 시작됐다.
   ◇즉석에서 열린 와인 블라인드 테이스팅
   맨 처음 시음한 사람은 그 회사 와인 동호회 모임을 이끌고 있다는 존(John)으로 모두 그의 평가 결과를 주시했다. 신중하게 A와 B를 음미한 존은 "A의 맛이 좋다"며, "A가 리저브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럴 때 첫 단추가 참 중요하다. 다음 시음자는 주저 없이 동호회 회장을 따라 A를 택했다. 다음은 책임자 찰스(Charles)의 차례였다. 한참 두 와인의 맛을 비교하던 그는 "나는 중립을 지키겠다"며 선택을 포기했다. 그 이유인즉 본인 취향으로는 B의 맛이 좀 더 나아 리저브인 것 같은데, 와인 동호회 회장인 존의 의견에 정면 도전할 만큼 B가 A보다 나은 것은 아니어서 자기는 차라리 중립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찰스가 와인도 잘 알지만 참 좋은 리더의 자질을 갖추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니 상대방의 나머지 두 사람이나 우리 쪽의 참석자들도 자의든 타의든 A를 택하게 되었다.
   필자는 답을 알고 있었다. A는 보통 몬다비였고 B가 몬다비 리저브였다. 필자는 그 사실을 밝히면서 이런 이야기를 덧붙였다.
   "여러분의 평가를 들어보니, 리저브가 소니(Sony)라면 보통 몬다비는 삼성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찰스는 리저브를 실제로 알아맞혔지만, 우리 대부분은 오히려 보통 와인이 더 좋다고 할 만큼 두 와인의 수준 차이는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도 가격은 리저브가 훨씬 높지 않습니까? 삼성과 소니의 제품을 함축적으로 보여준 의미 있는 테스트가 된 것 같습니다."
   순간 일제히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와인을 마실 시간이 되자 너나 할 것 없이 웨이터에게 "삼성을 달라"고 주문했다. 당황하는 웨이터에게 '삼성=보통 몬다비'라는 설명을 덧붙여야 했지만 말이다. 그날 우리는 더 이상 비즈니스 얘기를 꺼내지 않고 즐겁게 대화를 나누며 '삼성'을 무려 10병이나 마셨다.
   ◇4배나 더 받을 수 있는 힘은 브랜드, 그러나…
   그날의 수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비용을 적게 들이면서 상대가 흡족한 대접을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당시 삼성 제품이 소비자들이 느끼는 가치(perceived value) 측면에서는 경쟁사에 떨어지지만, 제품의 실질 가치(real value)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는 점을 효과적으로 소통한 것이다.
   바로 다음 날 실무자들 간에 본격적인 상담이 이뤄졌고, 새로운 거래가 시작됐다. 당시 삼성의 제품 수준은 소니에 뒤지지 않았음에도 브랜드 이미지에서 밀려, 시장 진입에 어려움을 겪었고 제값 받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날은 운이 좋아 삼성 제품의 실질 가치를 비유적으로 잘 설명해 새로운 유통시장 진입의 물꼬를 틀 수 있었지만, 낮은 브랜드 이미지는 후발 업체가 극복해야 할 과제임을 역설적으로 깨닫게 해 준 소중한 경험이었다.
   브랜드는 소비자들이 느끼는 가치를 높여 주고 시장에서 제값을 받게 해주는 중요한 자산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브랜드는 브랜드를 높이려는 전술과 투자만으로 결코 만들어지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다. 아무리 브랜드 전략을 성공적으로 수행해도 제품의 품질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지속 가능한 브랜드를 가질 수 없다. 최근 브랜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제품의 품질을 높이려는 본질적인 노력보다 단순히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는 전술에 주력하는 업체가 늘고 있다. 후발 업체일수록 효과적인 시장 진입을 위해 본질에 더욱 충실하여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