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이슈

[태평로] '저녁이 있는 삶'

도깨비-1 2012. 7. 31. 10:04


[태평로] '저녁이 있는 삶'

24시간 직장에
매달린 5060세대
나라 근대화 위해
'저녁 없는 삶' 감수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에 헛물켰고
경제 위기 한파에
여유 느끼지 못해


    김광일 논설위원/조선일보 2012. 07. 30

 

   대체로 저녁이 '없는' 삶이었다. 5060세대들은 그랬다. 거의 24시간 매달렸던 직장에서, 하숙집처럼 잠시 들르는 아파트 입구에서, 히틀러가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에 붙여 놓았던 슬로건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같은 생각만 꽉 들어차 있었다. 5060은 교양도 없고 취미도 없었다. 5060은 어쩌다 얻어걸린 필하모닉 티켓 덕분에 후줄근한 양복 차림으로 콘서트에 가서는 허겁지겁 집어넣은 저녁밥이 올라와 꺽꺽 몇 차례 트림을 하다가, 의자에서 점점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고, 흠칫 놀라 눈을 떴다가 다시 등받이에 뒤통수를 고이고 잠이 들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그때 코 골았던 사람이 바로 나다. 야근하는 동료들에게 미안해서 다른 거짓말로 둘러대고 식구랑 몰래 저녁 콘서트에 갔던 바로 나 5060이다. 주변에 말끔하게 차려입은 신사 숙녀들의 눈총을 받으며 나는 입가에 흘러내린 침을 닦았다.
   솔직히 우리는 '즐거운 저녁'을 알지 못했다. 항상 밤 9시 마감, 밤 11시 마감에 맞춘 일거리만 있었다. 우리는 바보가 아니다. 명령이 두려워 그랬던 건 아니다. 나라 살림의 수레바퀴를 밤낮으로 굴려야만 수십 년 수백 년 뒤처진 근대화의 간격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믿었다. 5060은 누구라 할 것 없이 그러한 믿음의 공감대를 갖고 있었다. 1948년 배 타고 한 달 걸려 참가했던 런던올림픽, 하복(夏服) 살 돈이 없어 동복(冬服) 입고 참가했던 그해 여름 런던올림픽 참가국 코리아를, 먼 훗날 금메달 10개에 10위권 달성이라는 '텐텐 목표'를 세우는 나라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절박함이었다. 민주주의가 '타는 목마름'으로 아득하기만 했던 시절, 5060은 국민교육헌장의 첫 문장인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를 무슨 운명처럼 외웠다.
   몇 년 전 광고 카피가 지금도 생각난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였다. 신용카드 소비를 부추기는 광고였다. 밤낮없이 365일 죽도록 일만 했으니 여름휴가만큼은 훌훌 떨치고 가서 마음껏 즐기라는 뜻이었다. 그때도 5060들은 두리번거렸다. 이게 혹시 나한테 하는 얘기인가, 아니면 조카나 아들뻘이 들으라는 말인가. 이제는 고백한다. 그 광고가 한창일 때 5060들은 자신에게 속삭이는 말인 줄 알고 혼자 설렛다. 자식들이 그 광고를 보고 아빠에게 훌훌 떠났다가 오시라고 권할 줄 알았다. 결과는 2030 배낭여행만 크게 붐을 이뤘고, 5060은 또 한 번 남몰래 쑥스러웠다. 2030들은 모른다. 가장(家長)이란 말이 어울릴 만큼 식솔을 여럿 거느린 나이가 되어, 회사에서 머리카락 빠지는 부장쯤 되는 위치에 올라섰을 때 남몰래 헛물을 켠다는 것이 얼마나 쑥스러운 노릇인지.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대선 슬로건이 자꾸 눈에 밟힌다. 얼마나 인기가 좋은지 같은 당 경쟁자가 농담 삼아 빌려달라고 했다 한다. 고맙다. 우리에게도 저녁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아침형 인간'이 되어 외국말 하나라도 더 익혀볼 요량만 했지, 초콜릿처럼 달콤쌉싸름하게 들리는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말이 귀를 간지럽히는 날이 오리라고는 정말 몰랐다.
   그런데 참 가엾기도 하지. 요즘 주요 뉴스는 '2분기 성장률 반 토막'이요, 한번 곤두박질치면 다시 치고 오르지 못하는 'L자형 장기불황 공포'에 끝을 모르는 '유럽 위기'다. 간당간당 집 한 채가 전 재산인데, 자식들 혼사는 코앞에 닥쳤고, 은퇴자가 절반 이상이다. 저녁 있는 삶은커녕 몇 푼 노후 자금마저 홀랑 까먹게 생겼다. 이제 최대 유권자 집단이 된 5060세대는 '저녁 있는 삶'이란 말이 쑥스럽다. 우리 몫이 아닌 것만 같아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