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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논단] 從北의 근저에 도사린 '잘못된 민족주의'

도깨비-1 2012. 6. 25. 15:57


[아침논단] 從北의 근저에 도사린 '잘못된 민족주의'

 

북한 핵 개발, 3대 세습 옹호
민족지상주의에서 비롯돼
19세기식 민족주의 사라졌는데
한반도에서만 호황 누려
파편화된 개인주의가 문제라면
'자유와 번영' 가치로 해결해야


  박지향/ 서울대 서양사학과교수 /조선일보 2012. 06. 25

 

   이석기·김재연·임수경 같은 인물들이 야기한 아수라장은 일반적으로 좌파 이념의 틀로 해석되지만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 그 근저에는 '잘못된 민족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요즘 세상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엽기적 현상이 NL(민족해방)파의 종북(從北)주의일 것이다. 종북주의는 광복 후 남한이 아니라 북한이 정통성을 이어받았다고 믿는 잘못된 인식에 기인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민족을 지고(至高)의 가치로 숭상하는 집착에서 나온다.
   최근 좌파 진영에서 벌어진 말싸움은 민족지상주의의 폐해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깨닫게 해준다. PD 측이 북한의 핵 개발과 3대 세습을 말도 안 되는 짓이라고 비판하자 민족지상주의 측은 그런 말이 말도 안 된다며 공격하고 나섰다. 이들이 민족 공동체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이유는 개인의 파편화를 극복해야 하기 때문이란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궤변이지만 다시 거론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런 궤변이 젊은이들에게 먹혀들기 때문이다. 특히 자신이 파편화된 사회의 희생물이라고 믿는 젊은이들에게 그렇다.
   파편화된 개인주의가 문제라면 건전한 시민 공동체를 만들어 해결해야지 한물간 낡은 민족주의를 붙들고 늘어질 일이 아니다. 민족주의에는 순기능과 역기능이 있는데 요즘에는 오히려 역기능이 더 많아지는 것 같아 걱정이다. 민족이 한데 뭉쳐 이방인의 침략이나 식민 세력을 몰아내는 것은 민족주의의 순기능이다. 그러나 같은 민족이라는 믿음만으로 북한의 김씨 왕조를 감싸고 도는 것은 민족주의의 대표적인 역기능이다. 국민의 모든 자유를 박탈하는 것도 모자라서 수백만명을 굶겨 죽이고 전제 왕조와 같이 군림하는 정권은 감히 민족을 운운할 자격도 없다.
   우리는 식민지 경험과 분단 상황 때문에 과잉이라고 할 정도로 민족주의적인 교육을 받아왔다. 그런 교육에 의해 민족을 태고(太古)부터 존재한 영구불변의 것으로 믿게 되고, 민족주의를 태어날 때부터 갖게 되는 원초적인 본능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여러 번 강조했듯이 민족과 민족주의는 지극히 근대적인 산물이다. 민족은 한 인간이 자연스레 접하게 되는 범위를 한참 넘어선 거대 개념이다. 그래서 베네딕트 앤더슨은 민족을 '상상된 공동체'라고 표현했다. 민족주의는 특히 19세기에 두각을 나타낸 이념으로, '잘못된 민족주의' 때문에 벌어진 사단은 역사적으로 부지기수다. 제국주의와 나치즘, 1차·2차 세계대전이 모두 따지고 보면 잘못된 민족주의가 분출한 결과였다. 이제 세상 거의 모든 곳에서 19세기식 민족주의는 사라졌는데 한반도에서만 호황을 누리고 있다.
   민족주의의 역기능 가운데 가장 우려할 것은 민족이라는 거대 개념이 압도하는 사회에서는 개인이 기를 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전체의 이름으로 개인의 희생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잘못된 민족주의는 공산주의나 파시즘과 유사하다. 그러나 개인이 자유롭게 역량과 창의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사회만이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해주는 사실이다. 만약 그런 사회가 파편화된 사회여서 걱정스럽다면 '공통된 가치와 비전'으로 보완하여 단결된 공동체로 나아가도록 노력하는 게 옳은 길이다.
   근대 서양에서 혈통이 아니라 가치에 기반을 둔 국민 공동체를 가장 먼저 만들어낸 나라는 영국이다. 영국은 원래 다민족 국가지만 '자유'라는 가치를 중심으로 시민 공동체를 발전시켰다. 17세기 중엽에 나타난 '자유롭게 태어난 영국인'이라는 개념은 영국이 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고 경제 대국으로 발전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자유와 더 나은 기회를 찾아 바다를 건너온 망명자와 이주민들도 영국인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나라의 발전을 도왔다. 헨델, 로스차일드 등 역사에 빛나는 이름이 그들이다.
   진정한 민족 공동체는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닥치고 통일'식 통일지상주의는 민족주의 역기능의 가장 심각한 현상이다. 민족은 인권이나 자유보다 상위 개념이 아니다. 민족을 내세우며 북한 문제에 침묵하는 사람들은 종북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비(非)인도적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비록 암울한 시기를 겪기도 했지만 '자유와 번영'이라는 확실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데도 우리는 그 소중한 가치를 등한시해왔다. 이제 교육을 통해 국민 모두가 '자유와 번영'의 가치를 확신하게 하고, 정책을 통해 그 가치를 실현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가 그런 단결된 모습으로 태어날 때 북한 동포들을 통일된 민족 공동체로 끌어들이는 과업도 한결 쉬워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