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쿠데타 50주년]“박정희 시대 산업화, 역사의 연속이지 신화 아니다”
http://newslink.media.daum.net/news/20110515221511051
http://newslink.media.daum.net/news/20110515221511051
출처 : [미디어다음] 사회
글쓴이 : 경향신문 원글보기
메모 :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왼쪽)와 박명림 연세대 교수(오른쪽)가 15일 경향신문 회의실에서 50주년을 맞는 5·16 쿠데타와 박정희 시대의 공과, 현재적 의미에 대해 대담을 나누고 있다. | 서성일 기자
'5·16 쿠데타'가 있은 지 반세기가 지났다. 2011년 현재, 5·16 쿠데타라는 역사적 사건을 드러내놓고 찬미하는 세력은 눈에 띄지는 않는다. 다만 쿠데타 주역이 주물렀던 18년이라는 시기를 '근대화혁명'으로 의미 부여하려는 시도가 보수 쪽 일각에서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이는 동시에 그 시기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점증하는 현실과 상승작용을 일으켰고, 냉정하게 그 시대를 되짚어보려는 반작용도 함께 낳고 있다. 경향신문은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사회학),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의 대담을 통해 5·16 쿠데타의 현재적 의미와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 대세론을 진단해봤다. 대담은 15일 오전 경향신문사에서 열렸다.
■ 5·16 쿠데타의 의미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이하 김동춘) = 5·16 쿠데타는 한국전쟁의 연속선상에서 볼 수 있다. 전쟁을 거치며 군부가 9만명에서 60만명으로 늘었고, 북한과의 대결 구도하에서 남한체제를 안정화시킬 세력이 필요했다는 점에서 당시 시점에서 남한 내에 군부를 대체할 세력이 없었다. 이승만 정부는 국가라고 하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국가성을 갖추지 못했고, 근대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밑으로부터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국가와 시민사회가 동시에 형성돼야 했다. 5·16은 4·19 혁명 이후 비등했던 민주화, 민족통일 요구에 대해 체제 자체의 위기를 느낀 보수세력의 방어적 쿠데타의 성격이 짙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이하 박명림) = 5·16은 합헌정부를 불법적으로 전복시켰다는 점에서 명백히 쿠데타이다. 이후의 변화가 근본적이었다고 해서 사건 자체를 혁명으로 볼 순 없다. 5·16의 원인을 장면 정부의 무능에서 찾는 해석도 근거가 없다. 장면 정부 9개월과 5·16 쿠데타 이후 9개월 또는 민정이양 이후 9개월을 비교하면 박정희 정부는 결코 더 유능하지 않았다. 박정희와 5·16을 둘러싼 지금의 논쟁은 박정희 시대의 빛과 그림자가 너무 대비되는 것에서 비롯된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국민결집을 통한 고속성장은 빛이지만, 그 그림자 역시 결정적이다. 공동체나 개인 삶에서 목적의 추구과정에서 준수돼야 할 인간적 도리, 수단의 중요성은 그 이후 무너졌다. 또 성공제일주의·성장주의·총량주의·돌진주의가 팽배하며 인간존중, 정신, 격조, 품위가 실종됐다.
김동춘 = 김종필은 5·16을 말하며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을 교과서로 했다고 하나, 나세르와 다른 점은 박정희가 국가건설 비전이나 민족적 이상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탈빈곤에 대한 대중의 열망을 집약한 측면이 있지만 그보다 반공국가의 물질적 토대를 갖추겠다는 게 더 강했다. 남한이 북한에 상대적으로 뒤진 상황에서 군부 내부개혁 차원에서 떠밀려서 한 쿠데타의 성격을 갖는다. 세계적 냉전구도하에서 독립운동가, 좌파엘리트들이 거의 제거됐고, 진정한 의미의 보수세력이 존재하지 않는 조건에서 장면의 기회주의 때문에 어이없이 성공한 쿠데타였다. 쿠데타를 사후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이런저런 구호를 나중에 내세웠다.
■ 산업화와 민주화
박명림 = 박정희 시기 산업화에 대해 인정한다. 다만 너무 신화화되고 과대평가됐다. 객관성을 위해 세 가지 비교준거를 들겠다. 먼저 박정희 시기와 유사한 초기 산업화를 이뤘던 나라들과 비교할 때 박정희 정부만 두드러지는 것은 아니다. 둘째 50년대 북한의 산업화와 비교해도 경제지표만으로는 박정희 시기가 특별히 우월하진 않다. 끝으로 87년 이후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부 역시 그 단계의 다른 나라들과 비교했을 때 박정희 정부 못지않은 경제적 성취를 보여줬다. 종전 및 한·미동맹으로 인한 전쟁재발 가능성 종식과 국가역량의 국내발전에 집중할 여건의 도래, 토지개혁 성공으로 인한 산업화 저항세력으로서의 지주계층 몰락, 학교·학생·언론의 폭발적 증가로 인한 교육기적과 국민교육 등 이른바 '산업화의 가능 조건들'은 전부 이승만 정부에서 이뤄졌다.
김동춘 = 한국의 근대화는 거시적으로 미국이 전후 동아시아 반공기지 구축에서 일본을 축으로 하고 한국을 하위 파트너로 편입시킨 플랜 속에서 가능했다. 미국이 한국의 수출품을 구매해주는 '초청에 의한 발전' 플랜 속에 들어있다. 그 플랜에 부응한 세력이 군부다. 70년대 중화학공업화 역시 냉전체제 변수, 북한 변수, 즉 안보 위기와도 연관돼 있다. 결국 북한·미국 변수를 빼곤 60년대 박정희의 근대화 전략을 설명하기 어렵다. 60년대는 세계사적으로 경제 활성에 좋은 조건이어서 많은 나라가 5% 이상 성장했다. 일본자본과 대기업을 축으로 하는 성장전략도 미국의 압력에 의한 것이었다.
박명림 = 남북경쟁은 세계냉전체제의 글로벌 경쟁의 압축이었다. 그 점에서 볼 때 소련·중국의 북한지원은 미국·일본의 남한지원에 비교될 수 없었다. 국제요인은 박정희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하였다. 그러나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게 내부요인이었다. 북한의 유일독재체제는 야당·학생·언론의 강력한 도전으로 인한 내부갈등이 초래하는 남한에서의 국가비전 길항, 업적경쟁, 힘의 폭발적인 분출을 감당할 수 없었다. 즉 산업화에 있어서 민주화 세력의 기여는 결정적이었다. 민주화세력과의 경쟁은 북한과의 체제대결에 더해 박정희 정부로 하여금 산업화에 생사를 걸도록 압박했다. 즉 한국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는 시차적으로 이뤄졌다기보다 상호 길항작용을 하며 거의 동시적으로 이뤄졌으며, 공과 역시 나눠 가져야 한다.
김동춘 = 한국 보수세력은 북한의 경쟁 압박, 친일, 민주화 콤플렉스 때문에 수동적으로 자기 혁신을 하지 않으면 안됐다. 또한 우리가 한국 근대화 성공 요인을 역사에서 찾는다면 구한말 한국에 왔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 등이 말했던 '학정만 제거되면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나라'라고 했던 전근대 사회에서의 문민주의 전통, 효율적 관료체제, 법체계 등 이미 아시아 다른 국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잠재력을 갖고 있었다. 일제 식민지와 한국전쟁으로 피폐해지긴 했지만 권력이 이용할 역사적 자원이라는 인프라가 있었다. 군부가 등장해 새로 창조한 게 아니라는 거다.
▲ "반공국가 물질적 토대 마련이 쿠데타의 가장 큰 목적,
북한·미국 변수를 빼곤 60년대 근대화 설명할 수 없어
해방정국 때 있던 지방정치 싹, 5·16 이후 제거되고
재구조화… 지금도 정당정치 뿌리 못 내려"
- 김동춘 교수
박명림 = 산업화는 5·16 이후 박정희 정부의 유일한 존재의 이유였다. 그것이 시대의제, 국민요구와 맞은 것이었다. 역사의 포르투나(운명)나 네체시타(시의) 같은 것이다. 당시 한국사회에서 정당과 학생이 배제된 가운데 군부·기업·언론·지식인 중에 군부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조직화한 의제 담지자' 역할을 수행하기 어려웠다. 군부의 정치개입, 국가담당은 결코 도덕적이지는 않았지만 현실 어디에도 저지할 세력이 없었다.
김동춘 = 해방 정국에서 한국사회에는 이념에 기초한 정치, 정당의 활성화, 지방자치, 주민참여 등 풀뿌리 민주주의의 싹이 있었다. 그런데 5·16 이후 중앙정부가 이를 억압하고 한국사회를 중앙 관료지배, 대통령지배의 중앙집권구조로 재구조화하기 시작했다. 그게 복원되지 않고 오늘에 이른다. 박정희 정권은 지방을 식민지화했고, 정당정치의 가능성을 억눌렀다. 그 이후 오늘까지 국민들이 자신을 진정으로 대표할 사람을 선출하는 게 아니라, 중앙에서 내려온 원하지 않는 후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만성적인 정치 불신, 정당의 이합집단, 정치적 책임성의 부재상황이 지속된다. 민주정부 시기에 그것을 살려보려 했지만 시기가 짧았고, 이명박 정부 들어 정치를 옛날로 되돌려 놓았다.
박명림 = 5·16과 박정희 시기의 유산 중 가장 먼저 극복되어야 할 것은 정치와 대표성의 회복을 통한 참된 의회민주주의·대의민주주의의 복원이다. 현재 OECD 국가들의 평균 인구 대비 국회의원 수는 8만명당 1명꼴이다. 우리는 16만명당 1명이다. 건국헌법에서의 의원수는 10만명당 1명으로 현재의 OECD 수준에 근접했다. 그게 5·16 쿠데타 때 20만명당 1명으로 축소되었다. 한국은 국회의원 수를 600~900명으로 늘려야 한다. 대표성 제고는 선진민주국들에서 보듯 참여·민주성·투명성·공공성의 제고를 통한 삶의 안정성과 복지성의 제고로 나타난다. 지금도 의회의 허약과 대통령 독주로 인해 숱한 문제가 야기된다는 점에서 박정희 시대의 의회축소와 대표구조 왜곡은 꼭 교정돼야 한다.
■ 박정희 향수와 착시
김동춘 = 한국전쟁으로 좌익만 제거된 게 아니라 공익에 대한 열정과 감각을 지닌 엘리트들도 동시에 제거됐다. 5·16 쿠데타 세력 중 진정 국민으로부터 존경받을 만한, 권력의지와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열정을 함께 지닌 정치인은 찾아보기 어렵다. 비전과 식견, 도덕성을 갖춘 사람들이 정치부대에서 버틸 수 없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끊임없이 기성 권력구조에 편승하고 중앙정보부의 폭력에 공포감을 갖도록 유도했을 뿐이다. 박정희 역시 대세에 편승한 사람이다. 식민지 시기 교사를 하다가 일본군에 입대한 것은 본인 표현대로 '칼을 차고 싶어서'였다. 식민지 상황을 극복하려는 민족주의 열정보다는 그 체제 속에서 지위와 권력을 가지려는 생각이 압도했다. 해방 후 좌익에 기울었던 것도 좌익이 당시 대세였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죽기 직전에 전향해 동료들을 밀고하고 살아남았다. 청렴하고 부지런하고 조직적인 군인이었다는 점은 평가할 만하지만 국가건설의 이상이나 이념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고, 대세를 추종한 사람으로 본다.
박명림 = 박정희는 교사와 군 지휘관의 경험에 바탕해 자원을 동원·결집해서 국가목적을 달성하는 데 상당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는 국가를 학급이나 사단처럼 운영했는데 학급담임·군사단장·국가대통령은 그에게 거의 동일한 것이었다. 모두 훈육, 훈시, 명령의 위치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 과정에서 박정희는 한국의 가장 중요한 전통인 문민주의 및 사회민주주의 사유양식과 행동체계를 군사주의와 시장주의·신중상주의로 완전히 뒤집었다. 이 두 가지가 사회주의 몰락 및 북한탈락 이후 신자유주의와 만나면서 시장전체주의로 나아갔다.
▲ "정통성 결여된 박정희 군부, 국민 먹여살리는 데
더 집착… 경제업적 착시효과 너무 심해
교사·군인 출신의 박정희, 리더로서 결집력은 있었다
박근혜는 민주·복지 결합으로 자신의 존재 증명해야"
- 박명림 교수
김동춘 = 18년 동안 한 지도자가 운영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18년 국가 운영은 상당한 지속성과 안정성이 있다. 그 이후 어느 누구도 그걸 대신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박정희가 18년 동안 연속성을 갖고 통치했다는 것을 감안하지 않은 채 5년 임기의 대통령을 두고서 왜 박정희처럼 못하느냐고 말한다. 또한 60~70년대에는 재벌이 이끌면 적하효과를 나타낼 수 있었다. 노동자, 농민들이 힘들긴 했지만 가시적 변화가 흘러내려왔다. 그런데 90년대 이후에는 서비스 산업으로 구조가 바뀌었고, 과거처럼 재벌이 이끈다고 중소기업과 노동자·농민에까지 흘려내려오는 효과가 나타날 수 없다. 박정희 때는 됐는데, 지금은 왜 안되느냐고 하는 것은 여전히 60~70년대처럼 경제가 될 수 있다는 착각에서 나오는 말이다.
박명림 = 적어도 경제지표상 박정희 10년과 김대중·노무현 10년을 비교하면 후자가 결코 못지않다. 게다가 박정희 시기는 미국·일본으로부터 일방적 원조를 받던 경제였고, 김대중·노무현 때는 그들과 경쟁해야 하는 시대였다. 또 전자는 위로부터의 강제적 자원 동원이 가능했지만, 후자는 그것이 불가능한 다원적 사회였다. 박정희의 업적은 과대평가를 넘어 착시효과가 너무 심하다. '장기독재' 18년 업적 전체를 평가하려면, 노태우에서 노무현까지의 '단임 민주정부들' 18년과 함께 평가해야 한다.
김동춘 = 박정희 시기는 워낙 바닥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국민들은 계층 상승의 기회가 열려 있었다. 90년대 이후 계층 구조가 고정화됐는데, 그런 기회가 계속되리라고 사람들이 착각하는 측면이 있다. 스페인에서도 독재자 프랑코 신드롬이 나타난 것도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 스페인은 유럽국들 중 지금 경제가 가장 좋지 않은 나라들 중 하나다. 비정규직 인구 비율이 한국 못지않게 높다는 점이 시사적이다.
■ 박근혜, 민주·진보 진영의 과제
박명림 = 박근혜 전 대표가 복지를 말하지만 반면교사는 이명박 정부다. 민주주의가 관건이다. 경제제일주의를 내건 MB 정부에서 서민경제가 몰락하는 것을 보고 박근혜가 배우길 바란다. 그는 대화와 소통보다는 선언이나 성명을 통해 정치를 한다. 그건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다. 그런 태도로 복지를 하면, MB경제처럼 성공하기 어렵다. 이제 한국의 진보·보수세력은 박정희를 넘어서야 한다. 박정희의 신중상주의와 전두환 이래의 신자유주의를 넘어서 근대 한국의 핵심전통인 공공성과 사회민주성을 어떻게 되살리느냐가 복지국가건설의 관건이다. 공공성과 사회민주성을 골간으로 삼은 세 가지 역사적 자원을 말하고 싶다. 먼저 근대의 여명을 열었던 다산 정약용 이래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법이다. 둘째는 해방 시점의 이승만·김구·여운형·송진우를 포함해 공산주의를 제외한 모든 세력들의 합의이다. 우파의 대표인 한국민주당조차 초기엔 철저한 사민주의 노선이었다. 셋째는 건국헌법과 건국정신이다. 50년대 조봉암과 진보당은 말할 필요도 없다. 5·16 50주년을 맞아 우리는 5·16으로 소멸된 이 자원을 복원해내는 게 가장 중요하다.
김동춘 = 박정희의 경제성장 성과를 인정하더라도 사회의 정의와 법치 도덕을 형편없이 무너뜨린 게 가장 나쁘다. 법이 정치에 시녀화되고 약육강식 체제를 만들어냈다. 박근혜가 보여주는 긍정적 이미지는 질서, 원칙, 안정, 일관성 등이다. MB 정부에서 보여주는 극악한 것 중 하나가 구 비리재단에 사학을 돌려주는 식의 천민자본주의다. 탈취한 재산이라도 어쨌든 거기에 소유권이 있다는 거다. 이렇게 정의를 묵살하고 힘과 돈이 있으면 정의라고 강변하는 사회에서 박근혜가 그걸 교정할 수가 있겠는가. 그걸 하자면 기득권과 싸워야 한다. 박근혜가 지금까지 긍정적 이미지가 있지만 아버지가 남긴 약육강식, 정의훼손이라는 유산을 넘어서야 한다. 그러자면 박근혜는 박정희 정권 때 수난 당한 사람들에게 우선 사과하고, 위로하고, 그들을 포용해야 한다. 박정희의 부정적 유산을 바로잡지 못하면 또 다른 MB 정부가 될 것이다.
박명림 = 시대의제에 비춰 박정희는 산업화를 통해 자기존재를 증명했다면 박근혜는 민주화와 복지를 결합하면서 자기존재를 증명해야 한다. 그러자면 아버지를 부정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박근혜는 시대의제를 성취할 수가 없다. 오히려 민주화 세력은 박정희를 인정할 수도 있지만 박근혜는 아버지를 긍정하면 할수록 현재과제와 멀어지는 역설에 직면할 것이다. 한국은 안보국가, 발전국가, 민주국가를 거쳐 다음단계는 복지국가로 가야 했다. 그러나 다시 발전국가로 후퇴한 지금 상황에서 박정희의 긍·부정의 유산은 진보·보수 모두에게 서로 반대방향에서 극복 또는 계승해야 할 과제다.
김동춘 = 인권과 민주주의의 가치가 경제성장과 배치되는 게 아니다. 일본은 민주주의가 결여되면서 경제는 물론 정치사회 자체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원전사태 처리 과정에서 드러나지만 민주당이 집권해도 관료들에게 휘둘리고, 신자유주의 광풍 속에서 격차사회가 심화되면서 사회 자체가 망가지고 있다. 민주주의와 인권에 의해 지탱되지 않는 사회는 성장도 어렵다. 우리 역시 비정규직 800만명이 있고,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이고, 삼성반도체 백혈병으로 10여명이 죽어도 사람들의 공감 능력이 약해지고 있다. 발전국가로 되돌아가는 것은 우리 사회의 미래가 없다는 점을 보여줄 뿐이다.
◇ 김동춘 교수는 =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한국 노동자의 사회적 고립'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성공회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참여정부 시절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있으며 한국전쟁을 전후한 민간인 학살사건에 대한 조사를 책임졌다. < 1997년 이후 한국사회의 성찰: 기업사회로의 변환과 과제 > 등의 저서가 있다.
◇ 박명림 교수는 =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으로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실장 등을 거쳐 현재 연세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최근 에즈라 보겔 하버드대 명예교수 등과 공동저작한 '박정희 시대'의 영문판을 하버드대 출판부에서 냈으며, 이 책의 출판기념회엔 박근혜 전 대표가 참석하기도 했다.
< 정리 | 손제민 기자 >
경향신문 '오늘의 핫뉴스'
■ 5·16 쿠데타의 의미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이하 김동춘) = 5·16 쿠데타는 한국전쟁의 연속선상에서 볼 수 있다. 전쟁을 거치며 군부가 9만명에서 60만명으로 늘었고, 북한과의 대결 구도하에서 남한체제를 안정화시킬 세력이 필요했다는 점에서 당시 시점에서 남한 내에 군부를 대체할 세력이 없었다. 이승만 정부는 국가라고 하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국가성을 갖추지 못했고, 근대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밑으로부터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국가와 시민사회가 동시에 형성돼야 했다. 5·16은 4·19 혁명 이후 비등했던 민주화, 민족통일 요구에 대해 체제 자체의 위기를 느낀 보수세력의 방어적 쿠데타의 성격이 짙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이하 박명림) = 5·16은 합헌정부를 불법적으로 전복시켰다는 점에서 명백히 쿠데타이다. 이후의 변화가 근본적이었다고 해서 사건 자체를 혁명으로 볼 순 없다. 5·16의 원인을 장면 정부의 무능에서 찾는 해석도 근거가 없다. 장면 정부 9개월과 5·16 쿠데타 이후 9개월 또는 민정이양 이후 9개월을 비교하면 박정희 정부는 결코 더 유능하지 않았다. 박정희와 5·16을 둘러싼 지금의 논쟁은 박정희 시대의 빛과 그림자가 너무 대비되는 것에서 비롯된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국민결집을 통한 고속성장은 빛이지만, 그 그림자 역시 결정적이다. 공동체나 개인 삶에서 목적의 추구과정에서 준수돼야 할 인간적 도리, 수단의 중요성은 그 이후 무너졌다. 또 성공제일주의·성장주의·총량주의·돌진주의가 팽배하며 인간존중, 정신, 격조, 품위가 실종됐다.
김동춘 = 김종필은 5·16을 말하며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을 교과서로 했다고 하나, 나세르와 다른 점은 박정희가 국가건설 비전이나 민족적 이상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탈빈곤에 대한 대중의 열망을 집약한 측면이 있지만 그보다 반공국가의 물질적 토대를 갖추겠다는 게 더 강했다. 남한이 북한에 상대적으로 뒤진 상황에서 군부 내부개혁 차원에서 떠밀려서 한 쿠데타의 성격을 갖는다. 세계적 냉전구도하에서 독립운동가, 좌파엘리트들이 거의 제거됐고, 진정한 의미의 보수세력이 존재하지 않는 조건에서 장면의 기회주의 때문에 어이없이 성공한 쿠데타였다. 쿠데타를 사후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이런저런 구호를 나중에 내세웠다.
■ 산업화와 민주화
박명림 = 박정희 시기 산업화에 대해 인정한다. 다만 너무 신화화되고 과대평가됐다. 객관성을 위해 세 가지 비교준거를 들겠다. 먼저 박정희 시기와 유사한 초기 산업화를 이뤘던 나라들과 비교할 때 박정희 정부만 두드러지는 것은 아니다. 둘째 50년대 북한의 산업화와 비교해도 경제지표만으로는 박정희 시기가 특별히 우월하진 않다. 끝으로 87년 이후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부 역시 그 단계의 다른 나라들과 비교했을 때 박정희 정부 못지않은 경제적 성취를 보여줬다. 종전 및 한·미동맹으로 인한 전쟁재발 가능성 종식과 국가역량의 국내발전에 집중할 여건의 도래, 토지개혁 성공으로 인한 산업화 저항세력으로서의 지주계층 몰락, 학교·학생·언론의 폭발적 증가로 인한 교육기적과 국민교육 등 이른바 '산업화의 가능 조건들'은 전부 이승만 정부에서 이뤄졌다.
김동춘 = 한국의 근대화는 거시적으로 미국이 전후 동아시아 반공기지 구축에서 일본을 축으로 하고 한국을 하위 파트너로 편입시킨 플랜 속에서 가능했다. 미국이 한국의 수출품을 구매해주는 '초청에 의한 발전' 플랜 속에 들어있다. 그 플랜에 부응한 세력이 군부다. 70년대 중화학공업화 역시 냉전체제 변수, 북한 변수, 즉 안보 위기와도 연관돼 있다. 결국 북한·미국 변수를 빼곤 60년대 박정희의 근대화 전략을 설명하기 어렵다. 60년대는 세계사적으로 경제 활성에 좋은 조건이어서 많은 나라가 5% 이상 성장했다. 일본자본과 대기업을 축으로 하는 성장전략도 미국의 압력에 의한 것이었다.
박명림 = 남북경쟁은 세계냉전체제의 글로벌 경쟁의 압축이었다. 그 점에서 볼 때 소련·중국의 북한지원은 미국·일본의 남한지원에 비교될 수 없었다. 국제요인은 박정희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하였다. 그러나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게 내부요인이었다. 북한의 유일독재체제는 야당·학생·언론의 강력한 도전으로 인한 내부갈등이 초래하는 남한에서의 국가비전 길항, 업적경쟁, 힘의 폭발적인 분출을 감당할 수 없었다. 즉 산업화에 있어서 민주화 세력의 기여는 결정적이었다. 민주화세력과의 경쟁은 북한과의 체제대결에 더해 박정희 정부로 하여금 산업화에 생사를 걸도록 압박했다. 즉 한국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는 시차적으로 이뤄졌다기보다 상호 길항작용을 하며 거의 동시적으로 이뤄졌으며, 공과 역시 나눠 가져야 한다.
김동춘 = 한국 보수세력은 북한의 경쟁 압박, 친일, 민주화 콤플렉스 때문에 수동적으로 자기 혁신을 하지 않으면 안됐다. 또한 우리가 한국 근대화 성공 요인을 역사에서 찾는다면 구한말 한국에 왔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 등이 말했던 '학정만 제거되면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나라'라고 했던 전근대 사회에서의 문민주의 전통, 효율적 관료체제, 법체계 등 이미 아시아 다른 국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잠재력을 갖고 있었다. 일제 식민지와 한국전쟁으로 피폐해지긴 했지만 권력이 이용할 역사적 자원이라는 인프라가 있었다. 군부가 등장해 새로 창조한 게 아니라는 거다.
북한·미국 변수를 빼곤 60년대 근대화 설명할 수 없어
해방정국 때 있던 지방정치 싹, 5·16 이후 제거되고
재구조화… 지금도 정당정치 뿌리 못 내려"
- 김동춘 교수
박명림 = 산업화는 5·16 이후 박정희 정부의 유일한 존재의 이유였다. 그것이 시대의제, 국민요구와 맞은 것이었다. 역사의 포르투나(운명)나 네체시타(시의) 같은 것이다. 당시 한국사회에서 정당과 학생이 배제된 가운데 군부·기업·언론·지식인 중에 군부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조직화한 의제 담지자' 역할을 수행하기 어려웠다. 군부의 정치개입, 국가담당은 결코 도덕적이지는 않았지만 현실 어디에도 저지할 세력이 없었다.
김동춘 = 해방 정국에서 한국사회에는 이념에 기초한 정치, 정당의 활성화, 지방자치, 주민참여 등 풀뿌리 민주주의의 싹이 있었다. 그런데 5·16 이후 중앙정부가 이를 억압하고 한국사회를 중앙 관료지배, 대통령지배의 중앙집권구조로 재구조화하기 시작했다. 그게 복원되지 않고 오늘에 이른다. 박정희 정권은 지방을 식민지화했고, 정당정치의 가능성을 억눌렀다. 그 이후 오늘까지 국민들이 자신을 진정으로 대표할 사람을 선출하는 게 아니라, 중앙에서 내려온 원하지 않는 후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만성적인 정치 불신, 정당의 이합집단, 정치적 책임성의 부재상황이 지속된다. 민주정부 시기에 그것을 살려보려 했지만 시기가 짧았고, 이명박 정부 들어 정치를 옛날로 되돌려 놓았다.
박명림 = 5·16과 박정희 시기의 유산 중 가장 먼저 극복되어야 할 것은 정치와 대표성의 회복을 통한 참된 의회민주주의·대의민주주의의 복원이다. 현재 OECD 국가들의 평균 인구 대비 국회의원 수는 8만명당 1명꼴이다. 우리는 16만명당 1명이다. 건국헌법에서의 의원수는 10만명당 1명으로 현재의 OECD 수준에 근접했다. 그게 5·16 쿠데타 때 20만명당 1명으로 축소되었다. 한국은 국회의원 수를 600~900명으로 늘려야 한다. 대표성 제고는 선진민주국들에서 보듯 참여·민주성·투명성·공공성의 제고를 통한 삶의 안정성과 복지성의 제고로 나타난다. 지금도 의회의 허약과 대통령 독주로 인해 숱한 문제가 야기된다는 점에서 박정희 시대의 의회축소와 대표구조 왜곡은 꼭 교정돼야 한다.
■ 박정희 향수와 착시
김동춘 = 한국전쟁으로 좌익만 제거된 게 아니라 공익에 대한 열정과 감각을 지닌 엘리트들도 동시에 제거됐다. 5·16 쿠데타 세력 중 진정 국민으로부터 존경받을 만한, 권력의지와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열정을 함께 지닌 정치인은 찾아보기 어렵다. 비전과 식견, 도덕성을 갖춘 사람들이 정치부대에서 버틸 수 없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끊임없이 기성 권력구조에 편승하고 중앙정보부의 폭력에 공포감을 갖도록 유도했을 뿐이다. 박정희 역시 대세에 편승한 사람이다. 식민지 시기 교사를 하다가 일본군에 입대한 것은 본인 표현대로 '칼을 차고 싶어서'였다. 식민지 상황을 극복하려는 민족주의 열정보다는 그 체제 속에서 지위와 권력을 가지려는 생각이 압도했다. 해방 후 좌익에 기울었던 것도 좌익이 당시 대세였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죽기 직전에 전향해 동료들을 밀고하고 살아남았다. 청렴하고 부지런하고 조직적인 군인이었다는 점은 평가할 만하지만 국가건설의 이상이나 이념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고, 대세를 추종한 사람으로 본다.
박명림 = 박정희는 교사와 군 지휘관의 경험에 바탕해 자원을 동원·결집해서 국가목적을 달성하는 데 상당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는 국가를 학급이나 사단처럼 운영했는데 학급담임·군사단장·국가대통령은 그에게 거의 동일한 것이었다. 모두 훈육, 훈시, 명령의 위치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 과정에서 박정희는 한국의 가장 중요한 전통인 문민주의 및 사회민주주의 사유양식과 행동체계를 군사주의와 시장주의·신중상주의로 완전히 뒤집었다. 이 두 가지가 사회주의 몰락 및 북한탈락 이후 신자유주의와 만나면서 시장전체주의로 나아갔다.
더 집착… 경제업적 착시효과 너무 심해
교사·군인 출신의 박정희, 리더로서 결집력은 있었다
박근혜는 민주·복지 결합으로 자신의 존재 증명해야"
- 박명림 교수
김동춘 = 18년 동안 한 지도자가 운영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18년 국가 운영은 상당한 지속성과 안정성이 있다. 그 이후 어느 누구도 그걸 대신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박정희가 18년 동안 연속성을 갖고 통치했다는 것을 감안하지 않은 채 5년 임기의 대통령을 두고서 왜 박정희처럼 못하느냐고 말한다. 또한 60~70년대에는 재벌이 이끌면 적하효과를 나타낼 수 있었다. 노동자, 농민들이 힘들긴 했지만 가시적 변화가 흘러내려왔다. 그런데 90년대 이후에는 서비스 산업으로 구조가 바뀌었고, 과거처럼 재벌이 이끈다고 중소기업과 노동자·농민에까지 흘려내려오는 효과가 나타날 수 없다. 박정희 때는 됐는데, 지금은 왜 안되느냐고 하는 것은 여전히 60~70년대처럼 경제가 될 수 있다는 착각에서 나오는 말이다.
박명림 = 적어도 경제지표상 박정희 10년과 김대중·노무현 10년을 비교하면 후자가 결코 못지않다. 게다가 박정희 시기는 미국·일본으로부터 일방적 원조를 받던 경제였고, 김대중·노무현 때는 그들과 경쟁해야 하는 시대였다. 또 전자는 위로부터의 강제적 자원 동원이 가능했지만, 후자는 그것이 불가능한 다원적 사회였다. 박정희의 업적은 과대평가를 넘어 착시효과가 너무 심하다. '장기독재' 18년 업적 전체를 평가하려면, 노태우에서 노무현까지의 '단임 민주정부들' 18년과 함께 평가해야 한다.
김동춘 = 박정희 시기는 워낙 바닥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국민들은 계층 상승의 기회가 열려 있었다. 90년대 이후 계층 구조가 고정화됐는데, 그런 기회가 계속되리라고 사람들이 착각하는 측면이 있다. 스페인에서도 독재자 프랑코 신드롬이 나타난 것도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 스페인은 유럽국들 중 지금 경제가 가장 좋지 않은 나라들 중 하나다. 비정규직 인구 비율이 한국 못지않게 높다는 점이 시사적이다.
■ 박근혜, 민주·진보 진영의 과제
박명림 = 박근혜 전 대표가 복지를 말하지만 반면교사는 이명박 정부다. 민주주의가 관건이다. 경제제일주의를 내건 MB 정부에서 서민경제가 몰락하는 것을 보고 박근혜가 배우길 바란다. 그는 대화와 소통보다는 선언이나 성명을 통해 정치를 한다. 그건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다. 그런 태도로 복지를 하면, MB경제처럼 성공하기 어렵다. 이제 한국의 진보·보수세력은 박정희를 넘어서야 한다. 박정희의 신중상주의와 전두환 이래의 신자유주의를 넘어서 근대 한국의 핵심전통인 공공성과 사회민주성을 어떻게 되살리느냐가 복지국가건설의 관건이다. 공공성과 사회민주성을 골간으로 삼은 세 가지 역사적 자원을 말하고 싶다. 먼저 근대의 여명을 열었던 다산 정약용 이래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법이다. 둘째는 해방 시점의 이승만·김구·여운형·송진우를 포함해 공산주의를 제외한 모든 세력들의 합의이다. 우파의 대표인 한국민주당조차 초기엔 철저한 사민주의 노선이었다. 셋째는 건국헌법과 건국정신이다. 50년대 조봉암과 진보당은 말할 필요도 없다. 5·16 50주년을 맞아 우리는 5·16으로 소멸된 이 자원을 복원해내는 게 가장 중요하다.
김동춘 = 박정희의 경제성장 성과를 인정하더라도 사회의 정의와 법치 도덕을 형편없이 무너뜨린 게 가장 나쁘다. 법이 정치에 시녀화되고 약육강식 체제를 만들어냈다. 박근혜가 보여주는 긍정적 이미지는 질서, 원칙, 안정, 일관성 등이다. MB 정부에서 보여주는 극악한 것 중 하나가 구 비리재단에 사학을 돌려주는 식의 천민자본주의다. 탈취한 재산이라도 어쨌든 거기에 소유권이 있다는 거다. 이렇게 정의를 묵살하고 힘과 돈이 있으면 정의라고 강변하는 사회에서 박근혜가 그걸 교정할 수가 있겠는가. 그걸 하자면 기득권과 싸워야 한다. 박근혜가 지금까지 긍정적 이미지가 있지만 아버지가 남긴 약육강식, 정의훼손이라는 유산을 넘어서야 한다. 그러자면 박근혜는 박정희 정권 때 수난 당한 사람들에게 우선 사과하고, 위로하고, 그들을 포용해야 한다. 박정희의 부정적 유산을 바로잡지 못하면 또 다른 MB 정부가 될 것이다.
박명림 = 시대의제에 비춰 박정희는 산업화를 통해 자기존재를 증명했다면 박근혜는 민주화와 복지를 결합하면서 자기존재를 증명해야 한다. 그러자면 아버지를 부정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박근혜는 시대의제를 성취할 수가 없다. 오히려 민주화 세력은 박정희를 인정할 수도 있지만 박근혜는 아버지를 긍정하면 할수록 현재과제와 멀어지는 역설에 직면할 것이다. 한국은 안보국가, 발전국가, 민주국가를 거쳐 다음단계는 복지국가로 가야 했다. 그러나 다시 발전국가로 후퇴한 지금 상황에서 박정희의 긍·부정의 유산은 진보·보수 모두에게 서로 반대방향에서 극복 또는 계승해야 할 과제다.
김동춘 = 인권과 민주주의의 가치가 경제성장과 배치되는 게 아니다. 일본은 민주주의가 결여되면서 경제는 물론 정치사회 자체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원전사태 처리 과정에서 드러나지만 민주당이 집권해도 관료들에게 휘둘리고, 신자유주의 광풍 속에서 격차사회가 심화되면서 사회 자체가 망가지고 있다. 민주주의와 인권에 의해 지탱되지 않는 사회는 성장도 어렵다. 우리 역시 비정규직 800만명이 있고,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이고, 삼성반도체 백혈병으로 10여명이 죽어도 사람들의 공감 능력이 약해지고 있다. 발전국가로 되돌아가는 것은 우리 사회의 미래가 없다는 점을 보여줄 뿐이다.
◇ 김동춘 교수는 =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한국 노동자의 사회적 고립'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성공회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참여정부 시절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있으며 한국전쟁을 전후한 민간인 학살사건에 대한 조사를 책임졌다. < 1997년 이후 한국사회의 성찰: 기업사회로의 변환과 과제 > 등의 저서가 있다.
◇ 박명림 교수는 =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으로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실장 등을 거쳐 현재 연세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최근 에즈라 보겔 하버드대 명예교수 등과 공동저작한 '박정희 시대'의 영문판을 하버드대 출판부에서 냈으며, 이 책의 출판기념회엔 박근혜 전 대표가 참석하기도 했다.
< 정리 | 손제민 기자 >
경향신문 '오늘의 핫뉴스'
'스크랩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5·18민주화운동 31주년] 5·18 왜곡 활동에 국민혈세가 줄줄? (0) | 2011.05.18 |
---|---|
[특파원 칼럼] 일본 실패 답습하는 한국 (0) | 2011.05.17 |
[스크랩] 집 안에 숲을 들이는 쉬운 아이디어 6 (0) | 2011.05.12 |
[스크랩] 한글 국가도메인 `.한국` 25일 등록 개시 (0) | 2011.05.03 |
[스크랩] [테마특집ㅣ디지털카메라] 4 디카 촬영법 노출과 초점 (0) | 2011.04.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