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희영 칼럼] 미끼금리, 약탈금리, MB금리
사실상 안 갚아도 되는 대출… 신용 5등급이 1등급보다 유리한 대출 속속 등장
대통령이 서민용 값싼 돈 약속할 때 금융위기 시작… 값싼 돈은 반드시 복수한다
- 송희영 논설주간/ 2010. 08. 07 조선일보
대통령이 금리가 높다고 한마디하자 하나캐피탈이라는 회사가 하룻밤 사이 대출 이자를 7%포인트 낮추겠다고 발표했다. 단칼에 7%포인트를 싹둑 잘라냈다면 그동안 대출 이자를 너무 챙겼다는 고백이다. 2000만원 신용대출을 받은 고객에게 매달 11만원 이상 바가지 이자를 더 받아 미안하다고 할 줄 알았더니 그런 사과는 없었다. 원래 이자율 36%가 정당했고, 대통령과 감독 당국이 호들갑 떨어 강제 인하시킨 게 못마땅한 투다.
'약탈금리' 피해자는 신용등급이 낮은 하층민이다. 미국서도 흑인, 나 홀로 여성 가장(家長) 등이 고금리에 쥐꼬리만한 소득마저 빼앗기는 고통을 받는다고 여론이 들끓었다. 상당수 지역에서는 약탈성 대출을 하게 되면 사기죄로 기소하는 법을 만들었다. 약탈금리를 감시·고발하는 시민단체도 미국에는 적지 않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대통령이 그 역할을 맡고 감독 당국은 "그런 줄 몰랐다"고 시치미 뗐다.
금융회사의 탐욕이 창조한 것은 약탈금리뿐만 아니다. 미끼금리(teaser rate)는 처음 2년 동안 2% 이자만 받겠다고 유혹한 후, 3년 지나면 7%로 뛰는 변동(變動)금리를 적용해버린다. 갑자기 무거워진 이자에 놀라 앞당겨 갚겠다면 벌칙금을 부과한다.
서브 프라임(비우량 주택대출)사태도 머리 좋은 금융인들이 던진 미끼를 하층민들이 덥석 물었던 데서 출발했다. '담보물 가격의 105%까지 1.5%에 대출해드립니다.' 4년 전까지 이런 TV 광고가 미국에 넘쳤다. 10억원짜리 아파트를 사면 대출금이 10억5000만원이다. 잔금 치르고 남는 5000만원으로
부엌 고치고 냉장고, 소파까지 신형으로 바꿀 수 있는 손짓에 밑바닥층 사람들은 기꺼이 포섭되었다.
미끼금리로 포장한 달콤한 껍질이 녹고 나면 그것이 독약으로 변한다는 것을 버블이 붕괴된 후에야 깨달았다. 집은 은행이 챙겨가고 신용 불량자로 추락한 뒤 마약에서 깨어났다.
저소득층 대출을 늘리겠다며 지난주 정부가 내놓은 햇살론은 미끼상품이나 약탈상품으로 변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농·수협, 저축은행, 신용조합이 금리를 10~13%로 파격적으로 낮췄다. 저축은행은 평상시 받던 이자를 절반도 안 받겠다고 한다. 햇살같이 밝은 속삭임으로 들리지만 연체 이자율은 최저 25%에서 최고 42%다. 10%로 시작했다가 4배나 많은 덤터기를 쓸 수 있다.
정부는 서민용 미끼가 사약(賜藥)으로 돌변하지 않도록 안전장치를 만들었다. 햇살론을 쓰고서 못 갚으면 보증회사가 85%를 대신 갚아주고, 보증회사의 구멍 난 돈은 국민 세금으로 메워주겠다고 약속했다. 이 덕분에 햇살론 고객은 빚 독촉을 몇 년간 꾹 참고 끝까지 버티면 공짜 돈을 챙길 수 있다. 공짜 먹잇감에 저소득층 입맛은 더 당길 것이다.
공짜에 가까운 돈은 또 있다. 'MB 브랜드' 미소금융의 금리는 4.5%다. 거치기간 동안에는 이자를 안 받고 연체이자도 없다. 끝내 안 갚아도 신용등급이 하락할 일도 없다. 천국(天國)의 은행에서 취급하는 '천사의 대출금' 같지만 막상 내놓고 보니 줄 만한 사람이 드물다. 대형은행과 재벌들이 아무리 점포를 늘리고 대통령이 독촉해도 돈이 나가지 않는다.
결국 신용등급평가에서 '등외(等外)'로 분류된 계층에만 주겠다는 방침을 바꿔 앞으로는 5~6등급 고객에게도 미소금융을 주겠다고 발표했다. 앞으로 신용이 훨씬 낮은 5등급 이하 2300여만명의 고객들은 290여만명의 1등급 고객과 똑같거나 더 나은 대접을 받게 됐다. MB 금리의 위력이다. 대출금을 잘 상환하고 신용카드도 연체하지 않으면서 저축을 꼼꼼히 해왔던 우량 고객들에게는 맥 풀리는 얘기다.
흔히 약탈성 금리가 서민의 살점을 떼어간다고 분노한다. 그렇다고 저금리가 반드시 선(善)은 아니다. 고금리는 감당 못할 계층에게 가급적 돈을 빌려쓰지 말라는 경고이고, 빌리더라도 빨리 갚으라는 압박이다.
빈곤층에 시혜(施惠)를 베푸는 기부금으로 써야 할 돈을 은행에서 상품으로 취급하면 서민 부채만 늘어나고 금융시장은 뒤죽박죽 되고 만다. 갚을 능력이 없는 계층이 초(超)저금리에 취하면 버블이 금방 따라온다. 어느 시대나 권력자가 '어려운 계층에 값싼 돈을 주겠다'고 무턱대고 동정심에 치우친 정책을 펼 때 금융위기가 시작됐다. 이 정권의 '친서민'은 '값싼 돈은 반드시 복수한다'는 진리를 무시하고 있다. 알 만한 장관과 수석 비서관, 은행장들은 입을 닫고 청와대 지시에 순종할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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