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이야기

[ESSAY] 여행 떠나지 않으시렵니까? - 조선일보

도깨비-1 2009. 11. 12. 11:52

[ESSAY] 여행 떠나지 않으시렵니까?

 

   승효상 / 건축가 / 조선일보 - 2009년 11월 12일

 

   여행을 왜 할까요? 알랭 드 보통이 쓴 '여행의 기술'이란 책에 보면 여행하는 이유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도시의 '떠들썩한 세상'의 차량들 한가운데서 마음이 헛헛해지거나 수심에 잠기게 될 때, 우리 역시 자연을 여행할 때 만났던 이미지들, 냇가의 나무들이나 호숫가에 펼쳐진 수선화들에 의지하며, 그 덕분에 '노여움과 천박한 욕망'의 힘들을 약간은 무디게 할 수 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세상살이가 힘겨울 때, 아름다운 추억에 기대어 그 노고를 잠시 잊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런 목적으로 여행을 하는 것은 순간적 일탈일 뿐입니다.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그런 일탈은 '노여움과 천박한 욕망'으로 사로잡힌 우리의 현실을 증오로 모는 방편이 되어 건전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오히려 여행은 일상의 삶 때문에 고갈된 에너지를 재충전하기 위해, 즉 새로운 양식을 찾기 위한 동물들의 본능적 행위라는 사전적 정의가 더욱 건전하지요. 다시 말하면 현실로 다시 돌아오기 위해 우리는 여행을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어떤 환상 속에 살고 계십니까?
   우리의 실체를 알고 싶지 않으십니까?
   이 맑고 푸른 가을날이 다 가기 전에,
   우리가 움켜쥔 허약한 환상을 그냥 내려놓고,
   여행 떠나시지요.
   
   저는 직업을 핑계로 여행을 자주 하는 편에 속합니다. 핑계라고 말했지만, 건축설계라는 일이 다른 사람의 삶을 조직하는 일이고 보면,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 평소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어렵지요. 흔히들 건축 공부라는 것이 보통 예술이나 기술에 대한 공부로 알고 있지만, 진정한 건축 공부는 우리 삶의 진정성에 기반을 두는 인문학적 탐구이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즉, 문학을 통해 우리의 다른 삶들이 어떠한지를 끊임없이 살펴야 하고, 우리의 삶이 어떠했는가를 알기 위해 역사를 공부하지 않을 도리가 없으며, 나아가 근본적으로 우리의 삶이 무엇인가를 따지기 위해 철학을 놓을 수가 없는 게, 건축 공부이며 건축이 지향하는 바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자를 통해 우리의 삶을 살피는 일은 이내 환상을 가져다주기 마련입니다. 때때로 사진도 있고 그림도 있어 문자 속의 삶을 구체적 이미지로 전환시키기도 하지만, 그런 그림과 사진도 사실 누군가에 의해 전달된 '현실적 환상'이고 보면, 어쩌면 순수한 환상보다 더 실체를 왜곡할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
   시대는 바야흐로 고도의 정보시대여서, 여행에 소요되는 수고를 절약하기 위해 인터넷이나 네트워크를 이용해 다른 현실에 접근하는 일이 완벽하다고도 믿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환상일 뿐이지요. 현실의 배경이 되는 '장소'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사회적 컨텍스트는 너무도 큽니다. 공간적으로 무한히 연결된 장소는 아무리 장대한 화면으로도 담을 수 없는 크기이며, 수만 년의 시간적 축적을 가진 그 장소를 대단한 길이의 다큐멘터리로 담는다 하더라도, 족탈불급이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대단히 놀라운 정보통신으로 현실의 장소를 재현해도, 그것은 파편일 뿐이며, 그 화면으로 우리의 뇌리에 남는 이미지는 결국 환상이지요.
   진실은 항상 현장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믿습니다. 특히 땅 위에 서야 하는 건축은 더욱 그렇습니다. 따라서 나는 그 진실을 보기 위해 현장으로 여행하는 것입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건축가인 르 코르뷔지에가 사유의 혁명적 전환을 이룬 것은, 젊은 시절 가진 동방여행의 현장에 존재한 역사적 건축의 진정성을 목도한 결과였습니다. 우울한 날씨의 에스토니아 출신인 루이스 칸이, 빛과 공간이라는 주제어로 영감적 건축가로 등장하게 된 계기도 지중해변의 장소를 여행한 결과였습니다. 또한 20세기 초 모더니즘의 실마리를 끄집어낸 아돌프 로스는, 신(新)문명의 미국 땅을 보고 '장식은 죄악이다'라고 외치며 허무에 뒤덮인 세기말의 위기를 구하게 된 바 있습니다. 근래만 하더라도 옆 나라의 안도 다다오가, 정규 건축교육이라고는 전혀 받지 않고도 오늘날 세계 최고의 건축가가 되고, 급기야 동경대학의 정교수가 되어 동경대학으로 하여금 그들 교육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하게 한 것이, 그의 젊은 시절 떠난 여행에서 배우고 깨달은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여행의 가치는, 적어도 건축에서는 어떠한 교육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저도 건축에서 근본적인 깨달음을 받은 것이 사실은 여행을 통해서입니다. 오랫동안 김수근 선생의 건축에 함몰되었던 제가, 선생께서 돌아가신 후 제 스스로의 건축을 찾기 위해 헤매고 있을 무렵, 마치 흐린 날 밤바다의 선원처럼 방향을 전혀 알고 있지 못하고 있을 때, 제가 찾아 나선 세계 속 건축의 현장들은 그 밤바다 위를 비추는 선명한 별이었고 제가 쫓아가야 할 진실이었습니다. 그전에 이미 20년간을 건축에 필요한 기술과 지식을 훈련하고 익혔었지만, 그 축적은 근육과 살점이었을 뿐 생명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지요. 여행을 통해 비로소 저의 실체를 조우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행은 실체를 만나게 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가지게 되는 환상이 얼마나 많습니까? 환상은 기만이며 사기라고 루카치가 말했던가요? 환상은 한낱 주관적일 뿐이며 자신의 균열되고 불구적인 인격의 무가치성 때문에 결국 스스로를 기만하게 하는 방편일 따름입니다. 그래서 실체를 만나는 여행은 우리를 둘러싼 허무한 환상을 깨고 힘있는 오리지널리티에 접근하게 하게 하는 것이지요. 거기서, 현실의 삶을 다시 시작할 힘을 얻습니다.
   요즘 어떤 환상 속에 살고 계십니까? 우리의 실체를 알고 싶지 않으십니까? 이 맑고 푸른 가을날이 다 가기 전에, 우리가 움켜쥔 허약한 환상을 그냥 내려놓고, 여행 떠나시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