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리퍼 신고 가도 지리산을 볼 수 있다
● 지리산 언저리 여행 - 지리산 언저리 마을 '산청 예담촌'
조선일보/ 김신영 기자 / 2009.09.03 09:17
산청·함양·하동(경상남도) 구례(전라남도) 남원(전라북도) 다섯 개 군에 걸쳐 있는 이 푸근한 산을 '종주'로만 즐기기는 아까운 일이지요. 지리산의 '옆모습'을 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걷기 전문가 세 명이 길과 지도를 정리한 책, '지리산 둘레길&언저리길 걷기여행'(황금시간·1만7000원)이 최근 출판됐습니다. 책에 소개된 29개 코스 중 초보자도 쉽게 걸을 수 있는, 경남 함양과 산청의 지리산 언저리길 세 개를 골라 소개합니다.
- ▲ 경남 함양과 산청은 지리산의 북쪽을 살포시 물고 있어 이 큰 산의 좋은 기운을 넉넉히 받는다. 함양 화림계곡 부근 논 위로 바람이 스친다.
"최씨 고가 열쇠 좀 줘요. 가방 앞주머니에 있어요." "던졌어요. 찾았어요?"
열쇠 하나가 담벼락을 넘더니 흙길에 툭 떨어졌다. 경남 산청군 단성면 성내리, 지리산 언저리 마을 예담촌을 안내하는 문화해설사 정구화(72)씨에겐 담 넘어 아내와 물건을 주고받는 게 일상인 모양이었다. 예담촌의 담은 집안이 들여다보이지 않을 정도로만 높아 아낙의 가는 팔로도 담 넘기기가 거뜬하다. 돌멩이와 진흙을 섞어 쌓은 소박한 담은 감시용 카메라와 창살로 무장한 서울의 높은 담과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게 억울할 듯했다.
담이 아름다운 예담촌엔 30채의 한옥이 터를 지키고 있다. 대부분 꽃 가꾸고 마루 닦으며 사람들이 생활하는, 살아있는 집이다. 정씨는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은 이씨 고가(古家)로 지은 지 약 400년이 흘렀다"며 "담벼락 중엔 200년 넘은 것도 있다"고 했다. 돌과 흙으로 만든 담은 물이 천적이라 담 위에 기와지붕을 얹어 비를 가렸단다.
- ▲ 산청 예담촌의 오래된 담벼락.
"양반집 주변 집들의 담은 좀 더 높은 편입니다. 양반들이 조랑말 타고 행차를 하니, 그들에게 집 안이 보일까 걱정해서지요."
천천히 돌면 한 시간 정도 걸리는 예담촌을 즐기는 덴 규칙이 따로 없다. 천천히 담 사이를 걷는 게 방법이라면 방법이다. 담 사이를 걷는 덴 제한이 없고 대문이 열려 있는 집은 들어가서 구경해도 된다. 단 이씨 고가, 최씨 고가, 사양정사(泗陽精舍) 등 규모가 큰 한옥은 정씨에게 하루 전쯤 미리 연락(011-789-0801)해야 속속들이 둘러볼 수 있다. "골동품 장사들이 하도 뭘 가져가서" 취한 조치란다.
이씨 고가 앞에 X자 모양으로 서 있는 두 그루의 회화나무는 담과 어우러진 모양새가 기이하다. "회화나무가 뿜는 산소가 유난히 머리를 맑게 해준답니다. 그래서 선비가 많은 고장엔 회화나무가 많다지요. 이사할 때 나무를 파서 함께 옮길 정도로 귀하게 여겼지요."
- ▲ 함양 화림계곡 탐방로.
고목(古木) 아래서 심호흡을 하며 선비 흉내를 낸 다음엔 이 마을에서 20번 국도를 따라 3.5㎞ 정도 떨어진 '목면시배유지'(木棉始培遺址·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106-1)에서 '고려 선비' 문익점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1363년 붓 통 속에 몰래 넣어 가져온 목화씨를 처음 뿌려 재배했던 목화밭 주변에 1997년 전시관(입장료 1000원)이 세워졌다. 문익점의 일대기를 설명한 영상물과 목화의 재배 과정을 풀어내는 3차원 입체 영상 등 목화에 대한 상식을 배우는 재미가 쏠쏠하다. 전시관 한 바퀴 둘러보고 나면 매표소에서 파는 솜털 보송보송한 목화씨(한 봉지 1000원)를 사서 커다란 화분에 심어 보고픈 욕심이 밀려온다.
≫더 걷고 싶다면(거리·시간: 약 6.5㎞·2시간)
예담촌 뒤, 마을을 휘감아 도는 남사천 옆 붉은색 산책로까지 간다. 개천을 왼쪽에 두고 걷다가 '초포동교'를 건너 왼쪽 길을 따라 뒷산으로 들어선다. 왼쪽 길이 약간 오르막인 Y자 갈림길을 만나면 왼편으로 가고 바로 다음 갈림길에서도 왼쪽으로 간다. 다랑이 논을 내려다보며 조금 더 걸으면 운동장이 나온다. 운동장을 통과해 정면의 길로 쭉 가면 덕산골 마을이다. 콘크리트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가다 넓은 아스팔트 도로를 만나면 오른쪽으로 간다. 오르막 하나 넘어 새터마을로 들어서서 오른쪽에 '드림모텔' 보이는 사거리를 만나면 왼쪽 비닐하우스와 논 샛길로 가서 굴다리를 지난다. 배양상회 지나 오른쪽으로 꺾으면 목면시배유지다.
◆가는 길
●자가용으로: 대전-통영고속도로 단성 나들목으로 나와 우회전→중산리·시천 방면 20번 국도→남사사거리→예담촌
●대중교통으로: 산청군 신안면 '원지터미널'에서 '중산리·대원사행' 버스를 탄다. 오전 6시30분~오후 9시30분, 약 30분 간격으로 버스가 출발한다.
마냥 걷고싶다… 신라가 만든 最古의 인공숲
● 지리산 언저리 마을 '함양 상림'
남서쪽으로 멀리 내다보이는 지리산 능선이 넉넉하고 포근하다. 경남 함양군 함양읍, 한국 최초의 인공 숲인 상림(上林·사진)을 느릿느릿 걷다 보면 천왕봉의 그 멋있다는 일출도 아무려면 어쩌나 하는 느긋한 마음을 품게 된다. 지리산과 백암산에 폭 안긴 상림의 조성자는 신라 시대 함양 태수(太守)로 온 최치원이다. 함양읍 가운데를 흐르던 위천이 자주 넘치자 물길을 돌리고 둑을 쌓은 다음 그 위에 길이 6㎞짜리 숲을 만들었다. 세월이 흘러 숲은 상림과 하림으로 나뉘었다가 하림에 군부대가 들어서면서 이제는 상림만 남았다. 느티나무와 개서어나무가 완전히 합쳐서 하나가 된 연리목이 입구에서 인사를 하고 꽃이 거의 진 연꽃 길은 넓은 잎만으로도 화려하다. 가을이면 한창 빨갛게 숲을 수놓을 꽃무릇도 벌써 피어나기 시작했다. 길게 뻗은 모양의 산책로는 편도 1.6㎞. 곳곳에 약수와 정자와 벤치가 있어 쉬엄쉬엄 놀며 산책하기 좋다.
▲ 한국 최초의 인공 숲인 상림. /조선영상미디어 김승완 기자 wanfoto@chosun.com
>> 더 걷고 싶다면
지리산 능선을 조금 더 감상하고 싶다면 상림 남쪽 끝에서 이어지는 필봉산에 들렀다 와도 좋겠다. 상림 한쪽 끝에 있는 물레방앗간으로 간다. 물레방앗간 뒤 차도를 건너 맞은편 마을 길로 직진한다. 작은 고개 하나 넘어 아담한 저수지를 만나면 오른쪽으로 간다. 100m쯤 걸으면 필봉산 산책로 입구다. 필봉산 정상에 올랐다가 돌아오는 길은 4㎞로 한 시간 정도 걸린다. 중간에 나오는 '한남군 묘역'에서 상림 쪽으로 가로질러 내려와도 된다.
선비들 앉아 놀던 정자만 7개… 시 한수 읊어보게
● 지리산 언저리 마을 '함양 화림계곡'
구불구불하고 깊은 화림계곡은 지리산 북쪽의 정중앙을 물고 있는 경남 함양군 북부를 가로지른다. 이 계곡은 옛 선비들에게 술 한 잔, 노래 한 가락 읊는 '정자 명소'였나보다. 거연정(사진) 영귀정 군자정 동호정 경모정 람천정 농월정…. 약 6.5㎞ 길이의 '선비문화탐방로'지도엔 옛사람들이 놀던 정자가 7개나 그려져 있다.
거연정 휴게소에서 계곡 따라 농월정에 이르는 길은 잘 정비된 탐방로 덕분에 걷기 편하다. 나무 데크가 잠시 끊어지면 벼가 넘실대는 논길이 이어진다. 허벅지 높이만큼 자란 벼 위로 부는 바람은 이리 오라며 손짓하는 듯 생기가 넘친다.
탐방로 마지막 지점인 농월정 터는 여유로이 계곡 풍경 즐기고 싶은 이들에게 제격이다. 도로와 멀리 떨어져 있어 한갓지고 조용하다. 정자 이름 '농월'(弄月)은 '한 잔 술로 달을 희롱한다'는 멋스러운 뜻을 지녔다. 술 한잔 기울이고 싶은 넓은 너럭바위가 계곡과 어우러져 근사한 풍경을 빚어낸다. 농월정은 조선 중기 학자 지족당(知足堂) 박명부가 광해군 때 영창대군의 죽음과 인목대비의 유배에 대한 부당함을 지목하다 고향 함양으로 유배 왔을 때 지은 정자로 지난해 화재로 쓰러져 복원 중이다. 바로 앞 바위에 새겨진 '지족당장구지소(知足堂杖屨之所)'란 글자는 '지족당 선생이 지팡이 짚고 놀던 곳'이란 뜻이다. 문의 함양군청 문화관광과 (055)960-5163
▲ 조선영상미디어 김승완 기자 wanfoto@chosun.com
지리산도 식후경 '경남 함양 맛집'
함양/ 김성윤 기자 / 조선일보 09. 09. 03
점잖은 갈비맛… 역시 양반음식
■ 안의 갈비
'안의원조갈비집'을 찾았을 때 주인 김대영(42)씨는 부엌 옆 작업실에서 쇠갈비를 다듬고 있었다. "최대한 지방을 잘 제거해야 합니다. 하루 종일 갈비에서 지방 발라내는 작업을 하지요. 이 작업이 (식당) 장사하는 것보다 힘들어요."
함양군 안의면(安義面)은 갈비찜으로 이름난 고장이다. 갈비찜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 일곱 집이나 된다. 이 한적한 마을에 갈비찜을 하는 식당이 왜 이렇게 많은 걸까. "안의가 지금은 함양군 안에 있는 면 중 하나지만, 예전에는 안의현(安義縣)이었지요. 안의현 안에 거창도 있고 함양도 있었어요. 현감이 여기 살았고, 그래서 정자며 기와집 같은 고택이 많아요. 양반들도 많이 살았죠. 양반들이 자시던 게 안의갈비라고 합니다. 또 예전에 이곳에서 큰 우시장이 열렸어요. 갈비탕이 더 유명했는데, 요즘은 갈비찜으로 알려졌죠."
일주일에 서너 번 갈비 여덟 짝이 들어온다. 갈비를 일단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낸 다음 지방을 발라낸다.
갈비를 찬물에 담가 핏물을 뺀 다음 삶는다. 남아있던 피와 지방이 우러난 물은 버린다. 찬물을 붓고 다시 끓인다. 센 불에 30분 끓여 냄새를 없앤 다음 갖은 양념을 더해 서서히 달인다. "옛날과 똑같은 방식으로 하고 있어요. 음식들이 조금 촌스럽지요."
김대영씨 말처럼 안의갈비찜은 세련되진 않지만, 대신 옛맛을 지키고 있다. 갈비답게 뜯는 맛이 있다. 심심하면서 달착지근한데, 간장 짠맛이 아래 깔려 있다. 기름지지 않고 깨끗하다. 1960년대 음식 같기도 하고, 북한 음식 같기도 하다.
갈비찜도 갈비찜이지만 갈비탕이 아주 훌륭하다. 갈비탕 맞나 싶을 정도로 기름기 없이 투명하고 시원하다. 무미(無味)하다 싶지만, 소금으로 간을 맞추면 감칠맛이 확 올라온다. 잡내나 잡미가 거의 없이 후추의 후끈한 매운맛만 느껴진다.
갈비찜 3만5000·4만5000원, 갈비탕 8000원. 공깃밥(1000원)을 시키면 갈비탕 국물이 딸려나온다.
●안의원조갈비집: 경남 함양군 안의면 당본리 12-1 (055)962-0666
생선국과 만난 소면… 그냥 넘어간다
■ 어탕국수
식당 이름이 '조샌집'이다. 시어머니 임명자씨에 이어 주방을 맡고 있는 김윤점씨가 이름의 유래를 설명해줬다. "시아버님(조인혁)이 생원이셨어요. 우리 지역에선 생원이 스스로를 낮춰 '샌'이라고 불렀대요. 시어머니가 식당을 관청에 등록하러 갔는데, '조샌이 하는 식당이니 조샌집이라고 하라' 해서 했다네요."
어탕국수는 함양과 산청에서 즐기는 음식이다. 민물고기를 잡아다 끓인 다음, 체에 뼈를 발라내고 살은 잘게 부수어 국물과 섞고 고춧가루로 슬쩍 간 한다. 시래기를 넣고 푹 끓이다가 소면을 넣고 익히면 끝.
불그스름한 갈색 국물이 의외로 맑고 구수하다. 생선 비린내가 살짝 나는데, 거북하다기보다 오히려 매력적이다. 제피가루(초피나무 열매의 가루)와 방아잎으로 생선 냄새를 잡는다. 추어탕은 민물고기와 함께 미꾸라지가 들어간다. 더 짙은 갈색이고 국물도 더 진하다.
"우리 가게를 소개한 기사를 붙여놓지 않아요. 시어머니가 그러시대요. '손님 입에 맞지 않으면 어쩔 거냐'고." 참 '갱상도'다운 마음가짐이다. 어탕국수 5000원, 추어탕 6000원, 민물고기조림 2만5000원.
●조샌집: 경남 함양군 함양읍 운림리 35-5 (055)963-9860
곰국에 빠진 콩잎… 푸근함이 입안을 감싸네
■ 콩잎곰국
콩잎은 경상도에서 즐겨 먹는 재료다. 함양에서는 콩잎을 곰국에도 넣는다. '청학산' 주인은 "콩잎곰국을 옛날부터 보양식으로 드셨다"고 한다. "부잣집에서는 사골을 고아서 넣어 드셨고요, 서민들은 들깻가루에 넣어 드셨어요."
봄철 여린 콩잎을 따 말려서 저장해두고 일년 내내 쓴다. 뽀얗게 우린 곰국 국물에 콩잎을 넣고 삶은 쇠고기를 쪽쪽 찢어서 얹으면 요리 끝이다. 콩잎에서 물이 우러나 뽀얀 국물이 푸르스름한 빛을 띤다. 푸른 이파리가 잔뜩 들어 있는 게 미역국 같기도 하다. 밥과 함께 국물을 푹 떠서 입에 넣는다. 살짝 씁쓸하면서도 구수한 콩잎이 곰국과 썩 어울린다. 콩잎곰국과 함께 나오는 반찬도 조신하다. 콩잎곰국 8000원, 콩잎곰국정식 1만3000원, 청국장 6000원, 시래깃국·된장국 5000원.
●청학산: 경남 함양군 함양읍 구룡리 641 (055)962-41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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