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이슈

[아침논단] 6월, 무거운 마음으로 자문한다

도깨비-1 2009. 6. 4. 13:02


[아침논단] 6월, 무거운 마음으로 자문한다

자식을 군대에 보낸 요즘 부모 마음을 아는가
핵실험하고 미사일 쏘는 북한만 미운 게 아니다
분향소에 줄 선 사람까지 섭섭하게 느껴진다.

 

 한경구/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문화인류학                 2009년 6월 3일 조선일보
 

   군대에 다시 가야 한다고? 아니, 전에 갔다 왔는데 또 가야 하다니! 맙소사! 대한민국 남자들 중 상당수가 그런 끔찍한 꿈을 꾼다. '국제신사'라는 해군장교로 복무했던 나도 그러니, 군 생활 중 험한 꼴 당하거나 트라우마를 가진 경우야 오죽하랴. 간혹 군에 대한 이야기 나누다가 눈을 부릅뜬 친구나 후배에게 무안을 당한 적도 여러 번이다. "아무리 어째도 장교로 갔다 온 놈은 할 수 없구나"라든가 "선배는 '가슴 빠따'가 뭔지 알아요?" 그럴 때면 나도 속으로 중얼거린다. '우리 동기 중엔 국립묘지 간 사람들도 있는데….'
   대한민국의 국군. 태어나자마자 외적과의 싸움이 아니라 참혹한 동족상잔으로 이어진 기습남침으로 '불의 세례'를 받는 비극을 겪어야 했다. 휴전 협정 이후 북한과 대치하려니, 나라 살림이나 인구 규모에 걸맞지 않게 엄청난 덩치를 유지해야 했고 그러다 보니 모든 것이 아쉽고 모자라고 무리가 많을 수밖에. 게다가 정권 장악과 유지 과정에 동원되는 바람에 비록 경제는 발전했다지만 군은 큰 상처를 입었다. 일부 군인들이 국방과 애국심을 독점한 특권층처럼 행동한 것 또한 군에 대한 감정은 물론 국방에 대한 균형감각을 왜곡시키는 데 기여했던 것 같다.
   몇 년 전 앞 정권 때의 일이다. 큰아이가 고등학교 다닐 때였나? 슬슬 군대 갈 일이 걱정되기 시작했던지, 남북관계의 진전 내용을 TV로 보다가 물었다. "아빠… 저거 잘 되면, 음… 나 때는 군대 안 가도 되겠네?" 내가 천천히 중얼거렸다. "음… 통일이 되면 말이다… 압록강과 두만강변에서 근무를 하게 될 텐데… 중강진은 영하 43도… 강원도에 있는 향로봉도 영하 20도… 빨리 다녀오는 게 좋을걸?" 큰아이는 뒤통수를 맞은 듯 "아빠 맞아?" 하며 어쩌고저쩌고 투덜댔는데, 아무튼 대학 재학 중에 군대를 다녀왔다.
   지난 주말, 학회에서 만났던 어느 교수님, 근심이 태산 같다. 아드님이 모 사단에서 복무 중인데 유사시에 북한군의 주요 공격로로 예상되는 곳이란다. 하필이면 이런 때 핵실험을 하고 미사일을 쏘고 있는 북한당국만 미운 것이 아니다. 수퍼마켓 앞에 생필품 사려고 몰려들기는커녕 덕수궁 분향소 앞에 길게 줄을 선 사람들까지도 무언가 서운하게 느껴지는 것이 부모 마음이다. 자식을 군대에 보낸 부모는 이렇게 마음이 한참 춥다. 별일 없어도 조마조마한 판인데, 뭐 정전협정에 구속되지 않는다고?
   집에 돌아오니 아버님 생전에 가깝게 지내시던 예비역 장군님 전화가 기다린다. 6·25에 대한 책이 번역이 나온 것이 있는데 북한 측은 "인민군"으로, 우리는 "남한군"으로 표기가 되어 있다나? "인민군"이면 "국군"이라고 하고, "남한군"이면 "북한군"이라 해야지, 편파적 번역으로 좋은 책 망쳐놓았다며 6·25 때 사관학교 동기생의 절반을 잃은 노병은 탄식하셨다.
   문제 삼아야 책의 판매만 도와주는 결과가 될 것이고 판단은 결국 독자들의 몫이니 그냥 참으시라고 전화를 끊으면서 얼마 전에 옆방의 석좌교수님 소개로 읽은 '게티즈버그의 링컨'이라는 책을 생각했다.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부"라는 유명한 내용이 담긴 아주 짧은 이 연설은 5만명에 가까운 희생자를 내고도 전쟁의 승부를 결정짓지 못한 참혹한 전투의 현장에 묘지의 완성을 기념하며 행해진 것이다. 주 연설자는 2시간 넘게 열변을 토하고 링컨은 단지 인사말로 몇 마디를 하기로 되어있었다나? 링컨은 전사자 가족의 슬픔을 애도하지도 않았고 노예제나 연방헌법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독립선언서 정신에 기초해 탄생한 자유로운 국가가 과연 오래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를 시험하는 내전"이라고 전쟁의 성격을 간명히 규정하면서, "우리는 전사자들이 못다 이루고 남겨놓은 숭고한 과업을 계승하고 이에 헌신해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이번 주말이 현충일이고 또 6·25가 다가온다. 국립묘지에 안장된 독립투사와 전몰장병들이 못다 이루고 우리에게 남겨준 과업은 무엇이던가? 우리는 무엇을 계승하고 무엇에 헌신해야 할 것인가? 안팎으로 긴장이 고조되는 6월, 무거운 마음으로 자문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