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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일본귀화, 텃세 탓 아니다”…추성훈 전 매니저 폭로>

도깨비-1 2009. 5. 27. 18:57
뉴스: <“일본귀화, 텃세 탓 아니다”…추성훈 전 매니저 폭로>
출처: 헤럴드경제 2009.05.27 15:43
출처 : 격투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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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아는 추성훈은 진짜인가.
오는 7월 UFC100을 통해 미국 MMA 데뷔전을 갖는 종합격투기 선수 추성훈(일본명 아키야마 요시히로)는 참으로 흥미로운 존재다. 유도 시절부터 종합격투기로 전향한 이후로도 그는 일부러 그러기도 어려워 보이는 드라마틱한 사건과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 결과 일본에서는 `마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강한 카리스마를 내뿜는 악역, 한국에서는 그런 핍박 속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길에 도전하는 선역이라는 극단적으로 양분된 이미지를 동시에 가진 존재가 됐다.

그런데 최근 한국에서도 추성훈을 곱지 않게 바라보는 시선이 부쩍 늘어났다. 우선 격투기 선수로서 활동보다 연예 활동 비중이 늘어나는 데 대한 불만이 조금씩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마침 인터넷을 통해 '아키야마, 추성훈의 진실'이라는 작자 불명의 글이 떠돌기 시작하면서 추성훈을 둘러싼 각종 의혹들이 팬들의 불만을 업고 점차 확대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그 동안 추성훈이 일본 귀화를 결정한 이유로 알려졌던 용인대 학벌 문제나, 일본에서 재일교포로서 차별을 받아 한국에서 유도를 하기 위해 찾아왔다는 추성훈 스토리를 시작점부터 송두리째 뒤집어버리는 주장도 포함돼 있어 혼란을 안겨주고 있다.

◆몸값 높이려 약한 상대만 골랐다?

미리 언급했다시피 추성훈에 대한 국내 여론이 나빠지기 시작한 첫 계기는 경기에 대한 소극적 태도 때문이었다. 추성훈은 2007년 12월 31일 프라이드와 K-1의 합동대회였던 '야렌노카!'에서 미사키 가즈오와 경기 이후 부상으로 인한 휴식기를 가지면서 한국에서 각종 연예 활동을 통해 한국에서의 인지도를 높였다. 하지만 본업인 격투기는 단 두 경기, 그것도 약체만을 상대로 한 싱거운 경기를 펼쳤다. 그 동안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끊임없이 경기를 통해 자신의 강함을 증명해왔던 추성훈을 기대하던 격투기 팬들로서는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거기에 '추성훈은 약한 상대만 고른다'라는 대회 주최사 FEG(현 라이츠닷컴) 총괄프로듀서 다니카와 사다하루의 비난 발언은 이런 비판 여론을 가시화시키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기대했던 2008년 연말 다이너마이트 대회 출전 교섭도 불발로 그치자 실망감은 극에 달했고 이는 곧 추성훈에 대한 분노로 바뀌었다. " 추성훈이 배가 불렀다 " " 연예활동으로 쉽게 돈 버니 격투기는 잊은 거냐 " 등의 비난이 쏟아졌다.

이에 대해 최근 추성훈의 초기 매니지먼트를 담당한 것으로 알려진 박지일(34) 씨는 이유가 있었다고 설명한다. " 원래 추성훈은 FEG에서 처음부터 약한 상대를 붙여주며 키워준 선수다. 일본 격투기계에서 '악마'가 되고나서는 외국인 강자와 싸우길 원하는 FEG와 달리 '약한 악마'는 존재할 수 없다는 이유로 자신이 이길 수 있는 상대만 선택한 것이다. " 한번이라도 지면 상품성이 떨어지는 것을 스스로 알았기에 패할 우려가 큰 경기는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내 격투기잡지 무진의 김기태(33) 편집장은 " 프로 선수로서 자신의 몸값을 지키기 위해, 계약 종료를 앞둔 시점에서 승률에 신경 쓰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더구나 일본 격투기 무대에서 선수가 상대 결정 과정에서 주최 측과 교섭을 벌이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다. 다만 선수에 따라 좀 더 힘을 쓸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사실 FEG가 그런 뻔한 시비를 걸었던 것도 결국 재계약을 위한 하나의 압박 카드로 볼 수 있다. 그저 비즈니스 상의 줄다리기일 뿐 " 이라며 큰 의미를 둘 문제는 아니라는 입장을 보였다.

◆일본 귀화 진짜 이유 따로 있나

추성훈이 일본 귀화를 결심한 것은 용인대 학벌에 의한 편파 판정과 그로 인해 조인철의 벽을 넘어서 국가대표가 될 수 없었던 상황이 이유였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박지일 씨는 그렇지 않다고 잘라 말한다.

" 용인대 파벌? 분명히 존재하지만 추성훈은 그 피해자가 아니었다. 윤동식이라면 모를까. 용인대 파벌을 문제 삼은 것은 이후 영화를 준비하면서 이야기를 갖다 붙인 것이다. 2001년 아시아선수권대회에 추성훈은 2진이지만 이미 국가대표로 출전했다. 당시 대표 선정은 대한유도회 김정행 회장의 직권 행사에 의한 것이었다. 오히려 추성훈은 재일교포라는 포지션 덕분에 한국에서도 혜택을 본 거다. 더구나 2002년 아시아게임을 앞두고 조인철은 은퇴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2진이었던 추성훈이 국가대표로 발탁될 확률은 다른 어느 때보다 높았다. 그런데 추성훈은 조인철과 우열을 가릴 수 있는 선발전에 나서지 않았고, 결국 귀화를 택했다. "

그렇다면 추성훈이 귀화를 선택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무진 김기태 편집장은 두 가지 가능성을 거론했다. 하나는 우선 추성훈이 자서전에서 밝힌 대로 태릉선수촌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 긴키 대학의 자율적인 운동 스케줄에 익숙했던 추성훈은 단기 집중형 훈련을 좋아한다. 지금도 각종 연예 활동을 병행하지만 하루에 4시간의 집중 훈련은 빼먹지 않는다. 부산시청팀에서도 자기가 주도해서 훈련 분위기를 바꿔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태릉은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들 때까지 정해진 훈련 스케쥴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추성훈으로서는 유도, 그리고 운동 자체가 싫어질 정도로 괴로웠다고 한다. 또한 선수촌 내에서 용인대 파벌과의 신경전도 있었다고 한다. 결국 다시는 선수촌에 돌아오지 않는다는 각서를 쓰고 나왔다. 그 얘기는 곧 한국에서 더 이상 국가대표가 되기를 포기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추성훈이 유도를 하기 위해서는 귀화 밖에 남은 길이 없었다. "

박지일 씨도 " 추성훈은 한국 방식, 팀스포츠 문화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이것은 재일교포나 용인대 문제를 떠나 한 인간으로서의 문제였다 " 고 지적했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금메달 획득 직후 국내 시사주간지 일요신문과 인터뷰에서 귀화 배경에 대해 추성훈 스스로도 " 국내 유도계의 텃세가 아니라 내 실력이 안됐다. 조인철이 은퇴하면 그 자리는 내 차지라고 생각했지만 한국 유도는 뿌리가 깊었고 선수층이 두터웠다 " 고 말한 바 있다.

◆애국인가, 애국마케팅인가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추성훈을 주인공으로 하는 다큐멘터리 영화와 광고 등을 기획했다는 박지일(34)은 과거 유도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추성훈에게 한국에 대한 애국심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다만 유도로 국가대표가 되어 올림픽에 나가고 싶다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 한국을 택했고, 격투기로 전향한 후에도 한국 시장을 노린 마케팅의 일환으로 한국인의 애국심을 자극하는 코멘트나 행동을 할 뿐이라는 것이다.

박지일은 추성훈이 일본에서 차별을 받은 적도 없고 일본을 싫어할 이유도 없다고 말한다. " 한국에서 돌아와 자연히 재일교포임이 알려지기 전까지 추성훈은 일본 이름을 사용하고 일본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재일교포라는 사실이 드러날 여지가 없었다. 따라서 재일교포로서의 차별도 받을 리 없었다. 일본 국가대표가 될 수 없었던 것도 일본 국적이 아니기 때문이었을 뿐, 차별의 산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추성훈은 재일교포라는 이유로 특혜를 받기도 했다. 2002년 아시안게임 대표선발전 우승자는 나카무라 켄조였는데, 아시안게임 개최지가 추성훈에게 익숙한 부산이라는 이유로 허리 부상으로 결장했던 추성훈이 대표로 선발됐고, 결승전에서도 안동진이 좀 더 공격적이었음에도 판정은 추성훈에게 기울었다. MMA로 전향한 후로도 추성훈은 한국과 일본 시장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카드로 FEG의 보살핌을 받았다. 사쿠라바전에서의 사건 때문에 K-1은 망할 뻔 했다. 만약 추성훈이 보통 선수였다면 그 때 바로 매장됐을 것이다. 하지만 FEG는 추성훈을 내치지 않았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지일은 추성훈이 의도적으로 한국을 이용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말한다. " 사실 추성훈은 운동 밖에 모르고 폼 내기 좋아하는, 좋게 말하면 순진하고 나쁘게 말하면 바보 같은 캐릭터다. 실제로 유도 시절 추성훈은 말을 가려 하지 못해 다른 선수나 관계자들에게서 미움도 많이 샀다. 지금 추성훈의 모습은 매스컴과 FEG와의 이해 관계가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추성훈도 그런 상황 속에서 국적에 관한 코멘트를 하다 보니 자신에게도 이득이 된다는 것을 깨닫고 그런 말만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

나아가 박지일은 오히려 추성훈과 한국을 이용해 득을 보는 것은 일본이라고 지적했다. " FEG는 처음부터 한국 시장을 노리고 추성훈을 데려왔다. 어떤 식으로든 추성훈이 관심을 받으면 그것은 일본 격투기 산업의 수익으로 이어진다. 추성훈 자서전이 최근 한국출판사와 계약을 했는데 많은 출판사들의 판권 경쟁에 뛰어들며 판권료가 평균 수준보다 엄청나게 뛴 것으로 안다. 결국 더 많은 돈이 일본 출판사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다. "

한편 추성훈의 국내 매니지먼트를 전담하는 추성훈의 외삼촌은 박지일 씨의 주장에 대해 " 왜 난 데 없이 지금 그런 이야기가 나오느냐 " 며 " 이처럼 음해성 얘기가 계속 제기된다면 법적 조치를 할 수 밖에 없다 " 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한 인터넷에 나도는 '추성훈의 진실'이란 글을 읽어봤느냐는 질문에는 " 최근 읽어봤지만 모두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하나 반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좀 더 지켜보겠다 " 고 말했다.

박 씨와 추성훈의 관계에 대해선 " 그 부분은 내가 말하기 어렵다 " 고만 짧게 답변했다.
조용직 기자/yjc@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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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성훈 신화 설계사 박지일이 밝히는 아키야마의 진실
 
 출처 : 강대호-dogma01의 블로그
 

 

Link : http://ybnormal.ktdom.com/rdnote/rdnote.php?db=fight&action=read&dbf=1492

 

*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법을 준수했다. 이하 현지시각.

# 추성훈 신화의 설계사 박지일

아키야마의 한국 성공신화에는 대중에 드러나지 않은 설계사가 존재한다. 일본 비정부기구·비영리조직 법인 Answer Asia 대표이자 뉴스재팬(newsjapan.co.kr)을 운영하는 박지일이 바로 그다.

박지일은 한국 고려대학교·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수학, 일본 간사이외국어대학교 아시아학 수료·리츠메이칸APU대학원 아시아태평양학 졸업, 미국 머레이주립대학교 텔레비전·라디오학·국제학 졸업, 타이 탐마삿대학교 타이사회학 수료 경력자이며 이를 바탕으로 지정학의 일종인 아시아태평양학의 전문가로 국내외에서 활발한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인으로 일본 법인 대표로 있으며 한국어 일본뉴스사이트를 운영하는 보기 드문 사례 때문에 2006년 6월 18일 일본신문 아사히·산케이에 동시 보도되기도 했다.

격투기와는 전혀 무관한 이러한 경력 탓에 국내에서 ‘추성훈 신화’의 설계사로 언급되자 주변에서도 사실임을 확인하는 질문이 쇄도했다. 작년 한국 인터넷에서 격투기 사이트를 시작으로 포털에도 광범위하게 유포된 ‘아키야마, 추성훈의 진실’, ‘아키야마 혹은 추성훈의 불편한 진실’이라는 글에 박지일은 '추성훈 신화'의 설계사로 등장한다.

박지일은 일본 격투기, 미국 프로레슬링 관련 기고·언론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현지식 필명으로 쓰고 있으며 이를 국내 언론이 한국인의 글인지 전혀 모르고 인용하기도 한다. 2007년 6월 5일 일본 격투지 가미프로(kamipro.com)에 기고한 것은 본명으로 외부에 공개된 드문 사례다.

[사진: 일본 자민당 중의원 고노 타로와 회의를 마친 박지일 + 2007년 6월 5일 가미프로 134-135쪽. 고노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박태준 전 총리, 정몽준 한나라당 의원 등 한국 인사와 친분이 두터운 일본의 대표적인 지한파 정치인이다. 고노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반기문 UN 사무총장 출마 등에서 한국과 입장을 같이 했다.]

이 글은 박지일과 3시간의 인터뷰를 통해 쓰였다. 인터뷰는 비공식적인 내용을 제외하고 정리해도 A4 11장 분량에 달할 정도로 밀도가 높았으며 박지일은 학문과 스포츠를 넘나들며 능변을 쏟아냈다.

 

 

추성훈의 한국인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기본이 되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일본에서 한국인 4세로 태어난 그는 대학교 졸업 후 조국의 유도 올림픽대표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건너와 노력했으나 학연·지연 등의 벽에 막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으로 귀화, 아시안게임 결승에서 한국 선수를 격파하고 우승을 차지했다.

종합격투기 전향 후 히어로스 정상에 등극했으나 일본 MMA 산 역사라 할 수 있는 선수와의 대결에서 승리했음에도 경기 후 반칙이 지적되어 승리 취소·무효 처분과 함께 상금지급보류·무기한 출장정지의 징계를 받았다.

일본 여론 악화로 한국에서 치른 복귀전에서 승산이 희박한 것으로 여겨지던 강자를 격파하며 실력을 입증했지만, 그해 말 또 다른 강자와의 경기에서 금지기술에 골절 등의 피해까지 봤으나 항의로 무효로 정정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강한 남자임에도 한국과 일본에서 모두 차별받았지만, 뜻을 굽히지 않고 노력한다는 것이 바로 아키야마에 대한 한국의 동정과 인정, 그리고 호감이다. 현재 한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일본국적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 아키야마의 진실 - 일본대학유도

1975년 7월 29일 일본 오사카에서 재일한국인 4세 추성훈으로 태어난 아키야마는 긴키대학교를 졸업하고 1998년 유도 올림픽 국가대표를 목적으로 한국으로 건너와 부산시청 소속선수로 활약한다. 박지일은 재일한국인·한국계 일본인에 대한 관심의 하나로 1999년부터 아키야마에 대한 자료를 수집했다.

아키야마는 대학 시절 일본 오사카 지역의 강자였고 전국대회 우승 경력도 있으나 체급 일본 1-2위, 즉 대표 선발을 장담할 수준은 절대 아녔다. 한국에는 일본유도협회에서 아키야마에게 국가대표 발탁을 전제로 귀화를 제의했다고 알려졌으나 박지일은 당사자에게 확인한 결과 그런 일은 없었다고 말했다.

2. 아키야마의 진실 - 한국유도

아키야마는 작년 2월 27일, 3월 5일 한국 공중파방송 MBC의 코미디프로그램 황금어장 83, 84회의 무릎팍 도사에 초대손님으로 나왔다. 당시 무릎팍 도사에 등장한 '100년을 지킨 국적'이라는 표현은 한국에 대한 아키야마의 애정을 강조하고 귀화를 더욱 극적으로 만드는 효과를 낳았다.

그러나 박지일은 한국에서 유도 선수 '추성훈'으로 활약하던 아키야마는 일본 귀화를 수시로 언급했기에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국적을 선택할 기회 자체가 없는 대다수의 한국유도 종사자에게 아키야마의 귀화 언급이 어떻게 여겨졌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또한, 한국 스포츠의 단체생활에 불편함을 숨기지 않으며 수시로 일본을 오간 것도 반감을 샀다.

‘100년을 지킨 국적’과 어울리지 않게 아키야마의 한국어 능력은 기초적인 수준이다. 가정에서 가족과 일본어로만 대화하며 재일한국인·한국계 일본인이 아닌 순수 한국인을 만날 때에만 간단한 회화를 구사한다고 전한 박지일은 따라서 국내에 방영된 각종 영상 촬영에는 상당수의 통역이 필요했을 거로 추측하기도 했다.

2001년 아시아선수권 -81kg 대표로 선발된 아키야마는 “일본에 귀화하지 않겠다. 서류도 다 찢었다. 한국에 충실하겠다.”라며 기쁨을 숨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대한유도회 기술위원 전원의 타 선수 지목에도 회장의 직권으로 성사된 ‘특혜’였다.

올림픽 대표를 목적으로 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너온 아키야마의 존재는 이미 언론에 종종 언급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일본을 택한다면 대한유도회의 위신 실추는 불가피했다. 아키야마가 일본 귀화를 수시로 언급하지 않았다면 2001년 아시아선수권 대표 선발이라는 특혜는 없었을 것이다.

아키야마는 2001년 아시아선수권 우승으로 특혜를 실력으로 무마하며 기세를 올렸지만 같은 해 세계선수권 대표로는 뽑히지 못했다. 아키야마를 대신하여 세계선수권에 출전한 조인철은 본선에서 우승을 차지했으며 이를 제외하고도 -78kg 올림픽 3위(1996)·세계선수권 1위(1997), -81kg 세계선수권 3위(1999)·올림픽 2위(2000)라는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다.

세계선수권 대표로 조인철이 선발된 것에 대해 한국 대중은 아키야마가 차별을 받았다는 인식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러나 박지일은 대표 선발 과정 막바지에 아키야마는 조인철과 맞대결로 우열을 확실하게 가릴 기회가 있었고 이를 유도계 전체가 주목했으나 복통으로 결장하여 무산됐다고 전했다.

조인철은 세계선수권을 앞두고 두 체급에서 메이저대회 4회 입상으로 아시아선수권 우승이 전부인 아키야마와 견줘 경력에서 단연 우세였다. 게다가 맞대결 기회조차 놓친 아키야마의 탈락이 과연 차별의 산물일까?

아키야마는 세계선수권 출전이 좌절됐지만 2002년 아시아경기대회(아시안게임) 대표선발전의 유력한 우승후보로 언론에 거론된다. 조인철이 세계선수권 정상 등극을 끝으로 대표팀에서 은퇴한 상황에서 아시아선수권 우승자 아키야마의 부각은 당연하다. 그러나 아키야마는 선발전을 치르지도 않고 2001년 9월 그동안 수시로 언급한 일본귀화를 현실로 만들었다.

아키야마는 박지일에게 “자신은 이로운 쪽으로 선택한다.”라고 말했다. 일본 긴키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으로 온 것, 아시아경기대회를 앞두고 일본으로 귀화한 것도 이 범주에 속한다. 아키야마는 한국에서 ‘일본 귀화’를 압박한 결과 2001년 아시아선수권 대표가 될 수 있었다.

조인철은 은퇴했지만, 한국에는 아시아경기대회 전까지 아키야마와 개인 전적 2승 2패(귀화 당시 1승 2패)의 안동진이 있었다. 그러나 아키야마의 일본 귀화 후 치러진 대표선발전 우승은 마사회 소속 김기수였다. 김기수가 부상으로 제외되지 않았다면 안동진은 아시아경기대회에 출전할 수 없던 것이 당시 한국유도 -81kg의 수준이다.

아키야마의 아시아경기대회 일본대표 선발과정을 봐도 귀화는 ‘자신의 이익’을 위한 탁월한 선택이었다.

 


3. 아키야마의 진실 - 일본유도 1/2

아키야마의 일본 귀화 후 치러진 아시아경기대회 -81kg 일본대표 선발전 우승자는 1996년 올림픽·1997년 세계선수권 -71kg 우승자 나카무라 겐조다. 비록 저 체급 출신이지만 메이저대회 2회 우승을 경험했고 아키야마는 허리부상으로 선발전에 결장했기에 일본에서도 나카무라의 아시아경기대회 출전을 당연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시아경기대회의 개최지는 다름 아닌 부산이었고 한국에서 ‘부산시청’ 소속이었던 아키야마에게 경기장은 전 직장이다. 일본유도협회는 이를 근거로 아키야마를 직권으로 아시아경기대회 대표로 선정했다. 아키야마가 재일한국인으로 출생하지 않았다면, 귀화하여 한국계 일본인이 되지 않았다면 한일 양국 모두에서 모두 ‘특혜’를 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2002년 10월 1일 아시아경기대회 결승에서 아키야마는 안동진에게 2-1 판정승을 거두고 우승한다. 같은 해 2월 13일 파리국제대회에서 안동진을 우세승으로 꺾고 정상에 오르긴 했지만 그래도 두 선수의 상대전적은 2승 2패로 팽팽했다.

박지일은 결승이 끝나고 아키야마가 이긴 경기였다고 봤지만, 주변의 한국·일본 유도관계자는 입을 모아 안동진의 우세를 말했다. 업무 대상과는 개인적인 친분을 최대한 자제한다는 신조를 지닌 박지일은 어느덧 자신이 편향된 시각을 갖게 된 것에 충격을 받았고 한국인의 상대적인 피해를 목격하자 아키야마를 돕는 것에 회의를 느꼈다.

당시 결승에 대한 한국 언론의 보도를 일부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조국을 등진 추성훈에게 금메달을 넘겨줄 수 없다는 각오로 무장한 안동진은 초반부터 적극적인 공세를 펼쳤지만, 번번이 무위로 끝났다. 중반 서로 방어 위주로 전환하면서 불꽃 튀던 대결은 소강 국면에 접어들었고 결국 둘 다 소극적인 공격에 대한 주의를 받았다.

이후 안동진은 공격을 재개했지만,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며 역습을 시도하는 추성훈에게 기술을 써 볼 기회도 잡지 못한 채 5분 경기를 마쳤다. 심판 판정에 기대를 걸었지만, 예상과 달리 심판은 2-1로 추성훈의 우승을 선언했다. 전날 남자 100㎏급의 장성호(마사회)가 '숙적' 스즈키 게이지(일본)와 팽팽한 경기를 펼치고도 판정패했던 악몽이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두 선수 모두 점수를 얻지 못했지만, 적극성에서 앞선 것은 분명히 안동진이었다. 중반 이전 공세의 안동진-수세의 아키야마 구도는 확연했고 중반 이후 소극적인 경기로 둘 다 주의를 받았지만 그나마 공격에 대한 의지를 보인 쪽은 역시 아키야마가 아녔다.

그럼에도, 판정으로 웃은 것은 유도 종주국 일본대표 아키야마였다. 한국에서 차별받았음을 공언한 아키먀아가 일본 대표로 한국 선수를 석연치 않은 이유로 꺾은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아키야마에 대한 국내 언론의 ‘조국을 등진’이라는 수식은 당시 한국 유도계의 당연한 감정이었다. 아키야마는 재일한국인으로 올림픽 대표를 꿈꾼다며 한국에 와서 수시로 ‘일본 귀화’를 거론한 덕분에 특혜로 2001년 아시아선수권에 출전했다. 한국 유도에서 특정대학 출신의 이점은 누구나 인정하지만, 아키야마는 ‘피해’를 받아 일본으로 귀화한 것이 아녔다.

(국내 유도계 인사의 비공식 전언에 따르면 현재 안동진은 양지와는 거리가 먼 - 굳이 말하면 음지에서 - 생활을 하고 있다. 아시아경기대회 우승을 발판으로 한일 양국에서 부를 얻은 아키야마와 너무도 대조적이다.)


4. 아키야마의 진실 - 일본유도 2/2

한국대표로 2001년 아시아선수권 우승, 일본대표로 2002년 아시아경기대회 우승을 차지한 아키야마는 명실상부한 아시아 -81kg 최강자가 됐다. 그러나 거칠 것 없던 아키야마의 2003년은 물의의 연속이었다.

2003년 2월 4일 아키야마는 일본 후지TV의 정크스포츠에 출연, “방한용 속옷을 미끄럽게 하여 시합을 유리하게 이끈다. 어머님이 섬유유연제의 거품을 이용하여 세탁한다.”라고 발언했다. 이에 대해 국내 일각에서는 “아키야마가 제정신이라면 저런 발언을 공개적으로 할 리가 없다.”라며 진위자체를 의심한다.

그러나 박지일은 해당 프로그램을 직접 시청했다면서 이를 일축했다. 정크스포츠는 정크(junk, 폐물·고물·시시한 일)라는 단어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가벼운 얘기가 오가는 프로그램인 덕분에 당시 아키야마의 발언이 큰 화제가 되지 않았지만, 매우 경솔한 발언이었다고 덧붙였다.

아키야마는 2003년 4월 세계선수권 일본대표선발전에서 우승했지만, 그와 대결한 나카무라 겐조는 도복이 미끄럽다는 항의를 했다. 아키야마가 정크스포츠 발언의 경솔함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올림픽·세계선수권 -71kg 우승자이자 2002년 아시아경기대회 -81kg 대표선발전에도 우승했지만, 아키야마에게 밀려 피해를 본 나카무라의 항의가 진지했다면 엄청난 파장이 불가피했다. 그러나 나카무라는 ‘무도인’에 가까운 이로 결과 자체에는 승복했고 경기장 바깥에서는 항의를 입에 담지 않아 파문이 진화될 수 있었다.

그러나 아키야마는 세계선수권 본선에서 ‘문제 선수’라는 낙인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부전승으로 32강에 합류한 추성훈은 3연승으로 준결승에 진출하나, 이 과정에서 프랑스-몽골-터키 국적의 패자가 입을 모아 ‘도복이 미끄럽다.’라고 항의했다.

아키야마는 “도복을 세탁한 직후라 비누기가 남아있던 것 같다.”라고 변명했으며 당시 국제유도연맹(IJF) 심판이사 후안 카를로스 바르코스는 도복의 미끄러짐은 개최지인 오사카의 높은 습도와 유니폼 세정제가 원인으로 선수의 잘못과는 무관하다고 판단하고 도복을 갈아입을 것을 지시했다. 공교롭게도 도복이 바뀌고 아키야마는 준결승과 3·4위전 2연패로 5위에 그쳐 입상이 무산됐다.

이에 대해 한국 일부 누리꾼은 아키야마가 종합격투기(MMA)로 전향하고 나서 반감을 품은 일본인이 악의적으로 과거를 조작하여 퍼트린 거라 자위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선수권의 아키야마 문제는 2003년 9월 14일 한국 일간스포츠, 9월 16일 세계 3대 통신사 중 하나인 AFP의 보도로 확인할 수 있는 엄연한 사실이다. 이를 일부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도복이 미끄러워요.' 재일교포 4세로 지난 2001년 일본으로 귀화한 남자 81㎏급 추성훈(28. 일본명 아키야마 요시히로)이 도복에 기름칠했다는 의혹이 제기. 추성훈은 12일 16강전에서 상대 담딘수렌(몽골)이 경기 도중 도복을 잡으면 자꾸 미끄러진다며 심판에 문제를 제기하고 비슷한 시비가 계속 일자 8강부터는 예비 도복으로 갈아입고 경기에 나섰다. 올해 일본 대표 선발전에서 추성훈과 맞붙었던 나카무라 겐조도 같은 주장을 한 적이 있다. 대회 관계자들은 도복 세탁 시 묻은 섬유 유연제가 땀에 젖으면서 미끄러워졌을 가능성에 무게를 뒀다.

AFP, OSAKA, JAPAN
Tuesday, Sep 16, 2003.

A dispute over a slippery judo jacket may have denied hosts Japan a perfect ending to the world judo championships although they have heaved themselves back from a disastrous performance two years ago.

The International Judo Federation (IJF) ruled out a breach of fair play in the case of middleweight Yoshihiro Akiyama, whose slippery jacket, or judogi, has drawn protests from France, Mongolia and Turkey.

Akiyama was forced to change his judogi, which was suspected of being waxed to make it difficult for his opponents to grip.

He had beaten opponents from the three countries to reach an 81kg light middleweight semifinal on Friday.

Wearing a reserve jacket, the Asian Games champion narrowly lost to German Florian Wanner who eventually won the title.

IJF referee director Juan Carlos Barcos said an examination of the jacket found that the slippery texture was due to high humidity which prevailed in Osaka and a detergent used to wash the uniform.

The incident was unheard of in IJF-sanctioned tournaments, Barcos said. But Akiyama was also accused of wearing slippery gear by former world and Olympic champion Kenzo Nakamura when they fought at the world championship trials last April.


세계선수권 당시 상대 선수의 3연속 항의라는 전대미문의 사태는 도저히 넘어갈 수 없는 사안이었다. 그럼에도, 이렇다할 징계 없이 넘어갈 수 있던 것은 유도 종주국 일본이 자국에서 개최한 세계선수권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 유도계는 아키야마에 대해 ‘한국에서 배운 부정행위’라며 은연중 자신과 관계가 없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이는 아키야마가 일본 유도선수 시절 언론에 직간접적으로 했던 한국 폄하 발언과 연관될만한 사안이다.

아키야마는 일본에서 “한국 유도계와 한국인이 재일한국인을 차별했기에 나에게 국적은 의미가 없었다. 일본에서 잘하고 싶다.”라는 등의 발언을 한 바 있다.


10. 아키야마의 진실 - 현재·미래

아키야마는 사쿠라바전으로 일본 신용이 땅에 떨어졌으나 데니스 강의 승리로 실력을 인정받고 마왕, 즉 악마로 통한다. 작년 아키야마는 K-1 히어로스의 후신으로 FEG가 구 프라이드 운영진과 합작으로 운영하는 드림에서 시타바 가쓰요리(3승 1무 6패)·도노카 마사노리(1승 2패)에게 승리를 거뒀다.

일각에서 MMA 미들급(-84kg) 세계 10강으로까지 추켜세우는 아키야마의 상대로 시바타와 도노카의 수준은 현격한 차이가 있다. 박지일은 ‘약한 악마’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서 FEG는 아키야마가 일본 대표로 동체급 외국 강자와 싸우길 원했지만, 아키야마는 사쿠라바전 이후 일본에서 절대 질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아키야마는 올해 4월 일본 출판사 베스트셀러즈에서 발간한 자서전 ‘두 영혼 - 배신자 혹은 영웅’에서 작년 연말대회 희망 상대 중에는 전 K-1 -100kg 챔피언 바드르 하리(입식타격기 70승 1무 9패, MMA 1패)도 있다면서 약한 이만 원한 것은 아니라고 변명했다. 그러나 지명도는 높지만, 그래플링 역량이 극히 떨어지는 하리는 아키야마를 이기면 효과 만점, 져도 체급 차로 변명할 수 있는 부담없는 상대다.

작년 9월 23일 드림 6의 도노카전을 앞두고 아키야마는 대진 미정이던 2003년 중앙아시아경기대회 권투 +91kg 2위 세르게이 하리토노프(MMA 16승 4패)의 상대를 자청했다. 도노카전과 함께 1일 2경기도 마다하지 않겠다며 ‘일본대표’로서의 마음가짐도 거론했다.

그러나 MMA에서 1일 2경기는 토너먼트가 아닌 이상 찾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 하리토노프와의 대결은 애초 성사 가능성이 작았다. 또한, 미국 고화질 유선방송 HD넷의 인사이드 MMA -120kg 25위 하리토노프는 ‘체급 차’라고 변명할 수 있는 상대이며아키야마의 승리를 기대하는 이도 거의 없다.

아키야마는 전형적인 ‘폼생폼사’ 유형이라고 한다. 아키야마가 외적인 치장에 신경 쓰는 것은 유명한데 이러한 특성은 비단 외모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악마’로 활동할 수밖에 없는 일본 시장의 환경은 아키야마에게 절대 달갑지 않았다. 반면 세계최대최고 MMA 단체인 미국의 UFC는 이와 무관하다.

작년 드림 2경기를 끝으로 계약이 끝난 아키야마는 FEG 연중 최대행사인 연말대회 다이너마이트 참가를 놓고 협상했으나 결렬됐다. 작년 11월 15일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 MGM 그랜드 가든 아레나에서 열린 UFC 91을 직접 관람하고 12월 10일 UFC 한국 중계권을 가진 IB스포츠를 방문하는 등 탈 FEG·친 UFC 행보를 가시화했다.

이에 FEG 대표 다니가와 사다하루(만 47세)는 일본 데일리 스포츠와의 인터뷰에서 “아키야마에게 정나미가 떨어졌다. 단체에 대한 애정이 없다.”라는 강도 높은 비판과 함께 금지된 로션 사용으로 징계를 받은 과거를 상기하며 “아키야마가 우리에 폐를 끼친 적도 많다.”라면서 불쾌함을 드러냈다. 작년 12월 23일 한국 중앙일보는 아키야마가 단체 최고대우를 요구하여 FEG와 관계가 악화했다고 전했다.

새해가 되면서 그동안 FEG가 후원했던 추성훈 공식홈페이지가 폐쇄되고 개인 블로그 형식의 독자적인 사이트가 개설됐다. 양측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듯한 분위기였고 결국 2월 24일 UFC는 공식홈페이지를 통해 아키야마 영입을 발표했다. 아키야마는 3월 3, 4일 일본, 한국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UFC와 6경기 계약을 맺었음을 밝혔다.

3월 11일 한국의 무술·건강 사이트 무카스(mookas.com)는 UFC의 경기당 대전료는 3만 달러(3,783만 원)이며 아키야마 희망액과의 차이는 IB스포츠가 메운다고 보도했다. 박지일은 “아키야마의 UFC 진출은 독자적인 선택이 아니며 IB스포츠가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번에도 한국의 도움을 받은 셈이다.”라고 설명했다.

UFC 이적설이 수면에 떠오르기 전에는 일본 주식회사 월드빅토리로드(WVR)의 MMA 대회 센고쿠에 진출한다는 얘기도 나왔다. 이에 대해 박지일은 일본에서 악마로 활동하기 싫었던 아키야마에게 센고쿠는 고려 대상이 아녔으며 센고쿠 역시 아키야마를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고 전했다. UFC에서 실패하면 센고쿠에서 권토중래를 꾀할 수는 있지만 센고쿠에서 실패하면 사실상 MMA를 은퇴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아키야마의 UFC 성적과 관계없이 일본 격투계는 한국 마케팅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일본 자서전의 한국판 발매를 놓고 많은 국내 기업이 경쟁을 벌였다. 설령 한국 사정 변화로 아키야마에 대한 반감이 는다고 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이미 일본은 아키야마에 대한 반감을 ‘관심도’의 측면에서 활용하고 있으며 이는 한국에서도 통용될 수 있다.

* ‘추성훈 신화 설계사 박지일이 밝히는 아키야마의 진실 9/9’에서 계속됩니다.

 

추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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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성훈(秋成勳, 1975년 7월 29일 ~ )은 한국계 일본인으로 유도 출신의 종합격투기 선수이다. 일본 오사카에서 재일 동포 4세로 태어나, 2001년에 일본으로 귀화하였다. 일본식 이름은 아키야마 요시히로(일본어: 秋山 成勲 (あきやま よしひろ))다.

한국 국가 대표로 2001년 아시아 유도 선수권에서, 또 귀화 후에는 일본 대표로 2002년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땄고, 2004년 종합격투기에 데뷔하여 2006년 K-1 히어로즈 라이트헤비급 그랑프리 챔피언을 거쳐, 현재는 UFC 웰터급에서 활동 중이다.

생애

추성훈은 태릉선수촌에서 만나 결혼한 재일 한국인 유도 선수 추계이와 한국인 수영 선수 유은화 사이에서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오사카 이쿠노 구 쓰루하시의 한인촌에서 자라면서 아버지의 영향으로 3살 때부터 유도를 시작하였다. 긴키 대학시절에는 간사이 지역 유도 대회에서 3연패를 차지했으며, 졸업 후 1998년 4월 한국에 건너와 부산광역시청에 입단하였다. 2000년 코리아 오픈 유도 대회에서 우승[1]했고, 이듬해 2001년 국가대표팀으로 선발됐다.[2] 2001년 4월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열렸던 아시아 유도 선수권 대회에서 전 경기 한판승으로 우승을 차지했다.[3] 하지만 일본과 다른 스파르타식 훈련 시스템, 그리고 끊임없이 찾아 온 파벌에 대한 불만 등이 겹쳤고, 조인철에게 밀려 국가대표팀에도 늦게 뽑히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2001년 10월에 출전한 전국체전[4]을 마지막으로 3년 7개월간의 모국 활동을 마치고, 일본 헤이세이 관재국에 귀화를 조건으로 입단하여, 2002년 부산에서 열린 아시안 게임에서 일본 국가대표 81kg급으로 출전하여 한국의 안동진을 꺾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5] 하지만 2004년 하계 올림픽 일본 국가대표팀 선발전에서 탈락하여 그 해 5월에 유도복을 벗게 됐다.[6]

2004년 12월 종합격투기에 데뷔 하여 여러 차례의 승리로 인지도를 얻다가,2006년 10월 9일 네덜란드의 타격가 멜빈 마누프와의 K-1 히어로즈 라이트헤비급 그랑프리 결승전에서 승리해 챔피언에 올랐다. 같은해 12월 31일 K-1 다이너마이트 대회에서 일본의 격투기 영웅 사쿠라바 가즈시와 대전해 TKO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후 반칙 행위(크림 도포)가 발각되어 경기는 무효 경기가 되었고 무기한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았다. 2007년 10월 28일, 징계가 풀린 후, K-1 서울 대회에서 슈퍼 코리안 데니스 강과 메인 이벤트에서 맞붙었는데,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단 일격으로 KO승을 이끌어냈으며, 이를 계기로 추성훈은 전폭적인 한국 언론의 관심을 받게 된다.

2007년 12월 31일, 야렌노카 대회에서 1년 만에 일본 무대 복귀전으로 미사키 가즈오와 맞붙게 되었다. 일본 관중의 야유와 함께 경기가 시작되고 1라운드 내내 팽팽하게 맞서다가 8분 14초만에 4점 포지션 사커킥을 맞아 코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고 패배하였는데, 승리를 축하하러 다가선 추성훈에게 미사키는 '너는 많은 사람들과 아이들을 배신했다'며 링 위에서 훈계를 하는 등의 행동을 하여 수모를 겪었다. 하지만 이 경기는 반칙 공격으로 인한 무효 경기로 처리되었다.

그 후, 무릎팍도사를 비롯한 방송활동, CF. 가요 프로. 모델 활동을 함으로써 그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드림콘서트에 출연하여 《하나의 사랑》을 부르며 한국에서의 인기 또한 상승하였다. (후에 추성훈이 부른 이 곡은 디지털 싱글로 발매된다.)

2008년 7월 고향인 오사카에서 열린 드림 대회에서 시바타 카츠요리에게 1라운드에 깃 초크로 승리하고, 9월에는 토노오카 마사노리에 1라운드 암바로 승리하여 2연승을 기록한 후, 2009년 2월 세계 최대 메이저 단체인 UFC와 6경기 계약을 맺고 미국무대에 진출했다. 2009년 7월 11일 UFC 데뷔전에서 엘런 벨처에게 가까스로 승리를 거뒀지만 이후 크리스 리벤, 마이클 비스핑, 비토르 베우포르트, 제이크 쉴즈등 체급내 최강자들과 대결하여 화끈한 경기를 선보이며 몇차례 보너스도 획득했으나 경기 결과는 연달아 패배했다.

2009년 3월 일본의 탑 모델 야노 시호와 결혼하였고,[7] 2011년 10월 24일 딸 사랑(일본어: 秋山 紗蘭 (あきやま さらん) 아키야마 사란[*])[8]을 출산하였다. 2013년 11월부터 KBS 예능프로그램 해피 선데이 -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딸 추사랑과 함께 고정출연하면서 공식 마스코트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2014년 9월 일본 사이타마에서 열린 UFC 대회를 통해 2년 7개월만에 복귀한 추성훈은 TUF 우승자 출신의 미국의 아미르 사돌라를 심판 전원일치 판정으로 꺽고 2009년 UFC 데뷔전 승리 이후 무려 5년만에 종합격투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9]

부정 의혹

유도 대회에서의 미끄러운 도복 의혹

2003년 10월의 세계 유도 선수권에서는 2회전부터 4회전까지의 대전 상대인 프랑스, 몽골, 터키로부터 "유도 도복이 미끄러진다"는 항의를 받았다. 국제유도연맹이 확인한 바로는 문제가 없다고 밝혔지만, 야마시타 야스히로 이사의 지시로 유도 도복을 교환했다.[10] 추성훈은 “씻어서 비누가 좀 남아 있었다”라고 말했다.

K-1 히어로즈에서의 크림 도포

2006년 12월 31일, 추성훈은 K-1 다이너마이트 대회에서 사쿠라바 가즈시와 대전했다. 사쿠라바는 추성훈의 몸이 미끄러워 잡을 수가 없다며 심판에게 어필했지만 경기를 계속 진행했고, 추성훈은 사쿠라바의 가드 사이로 계속 주먹을 날리며 레프리 스톱에 의한 TKO승을 이끌어냈다. 종료 후 심판은 사쿠라바의 몸이 미끄럽다는 항의에 추성훈의 몸을 직접 손으로 확인 후 이상이 없다는 표시로 추성훈에게 고개를 아래 위로 끄덕여 이상이 없음을 알려주었고, 추성훈도 이에 동의하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당시 심판은 추성훈의 다리는 확인하지 않았다. 당시 대회 프로듀서는 “게임을 멈추는 것은 심판의 판단이고, 추성훈의 몸에서 기름 같은 것은 나오지 않았다. 급소를 가격하거나 눈을 찌른다면 모를까 사쿠라바의 주장만으로는 경기를 멈출 수 없다. 그러나 사쿠라바가 저렇게 화난 것은 처음 본다”라고 언급했다.

추성훈은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경기에 앞서 전신에 스킨 크림을 발랐음을 밝혔다. 그 크림은 바셀린이나 글리세린 성분이 포함된 것으로, 추성훈의 건조한 피부 때문에 평소에 사용했던 것이었다. 추성훈은 바셀린이나 오일이 아니면 괜찮은 줄 알았으며, 주최사는 TV 카메라 앞에서 당당하게 크림을 칠한 것으로 보아 추성훈 측에 악의가 없다고 판단했다고 발표했다. [11] 규정상 경기 전에 몸에 무언가 칠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규정을 위반한 추성훈의 승리는 무효처리가 되었고 추성훈의 파이트 머니는 전액 몰수되었다. 그 후 1월 17일 추성훈은 무기한 출장 정지라는 이례적인 처분까지 받았다. 이는 거의 추방과 다름없이 받아들여졌고, 한때 다른 단체인 프라이드로의 이적설[12]까지 돌게 되었다.

이 논란의 과정에서 일본의 여론은 추성훈에 큰 실망과 비판의 목소리를 보냈고, 그에 맞춰 히어로즈의 스폰서가 떠나고 대회를 중계하는 TBS 방송국에까지 비난의 화살이 날아왔다. 또한 추성훈의 일본 모델과의 연애까지 비난하며 글러브 안에 너클을 넣었다는 둥 일본 인터넷에는 그를 비난하는 악성 댓글이 무수히 올라왔다. 반면 한국에서는 추성훈에 대한 대회사의 처분이 “사쿠라바가 일본의 종합격투기 영웅이었기 때문에 괘씸죄를 적용한 것”이나 “재일 한국인에 대한 차별”이라며 불만을 표시하는 여론이 일어났다.

일본국적으로 귀화

추성훈은 어린시절부터 유도를 시작해 일본에서 각종 대회에서 상위에 입상했으나 한국 국적으로 인해 국제대회에 나갈 수 없었다. 재일교포 유도선수로 전국체전에서 우승한 적이 있는 아버지 추계이씨의 "할아버지의 나라 한국에서 태극기를 달고 한국인의 기상을 떨치라"라는 당부에 따라 1998년 4월 여동생 추정화와 함께 한국으로 건너왔다. 부산시청 유도팀에 입단하여 2000년 12월 코리아오픈 준결승에서 조인철선수를 한판으로 이기고 결승전에서 18초만에 중국의 다이 선수를 한판으로 이겨 첫 국제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시드니 올림픽 선발전에는 조인철선수에게 져서 국가대표에 선발되지 못했다. 2001년 3월 국가대표 선발전 준결승에서 다시 판정으로 패배하여 국가대표 선발 순위 3위에 랭크되었으나, 대한유도회 김정행 회장의 지시로 국가대표 2진으로 선발되어 참가한 몽골 아시아선수권에서 전 경기 한판승으로 81kg급 1위를 차지한다. 6월 이란에서 열린 FAJR 국제유도에서 81kg급 1위, 10월 충남에서 열린 전국체전에서 1위를 마지막으로 한국에서 유도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2001년 9월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 당시 이 이유에 대해 교포에 대한 차별, 특정 대학 학연으로 얽힌 한국 유도계의 텃세와 파벌 싸움으로 자신이 한국에서는 2인자로서 대표가 될 수 없었기 때문 등 여러 추측이 일어났으나, 본인은 일본의 스타일이 자신에게 더 맞기 때문이라고 말했다.[13][14] 2002년 그는 일본 유도 국가대표로서 부산 아시안 게임에 참여했고, 결승전에서 한국의 안동진을 꺾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에 스포츠조선은 "조국을 메쳤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내는 등 한국의 여론은 추성훈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14]

종합격투기 선수로 전향한 뒤 그는 2005년 11월 5일에 열린 HERO'S 서울 대회에서 승리한 뒤, 링 위에서 “(지금 국적은) 한국인이 아니지만, 제 가슴 안에, 여기 들어가 있는 피는 완전 한국인입니다”라는 발언을 했다.[15] 이어 11월 13일 KBS가 제작한 추성훈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었고, 과거 추성훈이 한국에서 유도 선수로 활동했을 때 용인대학교대한유도회의 밀어주기식 편파 판정에 피해를 보았음을 밝혔다. 국가 대표 선발전 등의 중요한 대회가 있을 때마다 추성훈에 불리한 판정을 내렸다는 것이다.[15] 결국 대한민국 남자 유도 81kg급에서 양대 산맥으로 군림하던 추성훈과 조인철은 이러한 편파판정 속에 희비가 엇갈렸고 그로 인해 재일교포 출신인 추성훈 대신 용인대학교 출신의 조인철이 발탁되었던 것이다. 방송이 나간 뒤 한국에서는 추성훈에 대한 지지와 대한유도회와 용인대학교에 대한 비난의 여론이 일기도 했다.[16]

그는 종합격투기 경기에 나설 때마다 도복의 양 어깨에 한국의 태극기와 일본의 일장기를 달고 등장하며 경기에 들어가기 전에 양 국기를 손바닥으로 번갈아 툭툭치는 제스처를 한다.

 

 

"나는 조국을 메치지 않았다"
<스포츠조선>의 '이상한 제목'

'아시안게임 유도 금메달' 재일동포 추성훈 선수의 '항변'

02.10.04 14:06l최종 업데이트 02.10.06 15:33l
"나는 '야키야마 요시히로'란 이름보다 '추성훈'이 먼저다. 언제나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2002 부산 아시안게임 유도 81kg 종목에서 금메달을 딴 야키야마 요시히로(27·일본 간사이 소속). 그는 일본 이름 '야키야마 요시히로'보다 한국 이름 '추성훈'이 먼저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추성훈 선수는 재일동포 4세다. 그는 74년 전국체전에 재일동포 유도대표로 뛰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유도를 시작했다. 일본 유도명문 긴키대를 졸업한 98년 4월 "한국인으로서 최고 영광인 유도 국가대표"를 위해 현해탄을 건너왔다.

▲ 추성훈 선수
ⓒ 스플 이혜준
하지만 추 선수는 조인철 선수에 가려 만년 2인자로 지내다가 3년 7개월간의 한국 생활을 접고, 지난 해 겨울 '자신에게 맞는 유도'를 위해 일본에 돌아가야만 했다. 그리고 지난 1월 일본 대표에 선발된 뒤 이번 아시아 경기대회에서 안동진(경남도청) 선수를 판정으로 이긴 뒤 시상대 꼭대기에 오를 수 있었다.

<스포츠피플> 기자는 어렵게 추성훈 선수와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급히 부산 구덕체육관으로 몸을 옮겼다. 그런데 체육관에 거의 도착했을 때 바로 앞 건널목에 검은 얼굴에 강렬한 눈빛, 건장한 체격의 추 선수가 보이는 게 아닌가. 재빨리 움직여 길을 건너는 추 선수에게 말을 걸었다.

"지금 요 앞 숙소로 짐을 가지러 가고 있다."

숙소? 일본 대표팀 숙소는 '아시아 경기대회 선수촌'일 터인데. 알고 봤더니 유도 경기가 열렸던 부산 구덕체육관 바로 건너편 '문화 아파트 802호'는 추 선수가 한국에 있을 때 소속팀 부산시청 선수들과 함께 3년간 사용했던 숙소였다. 그리고 추 선수는 금메달을 목에 건 뒤 이틀간 이곳에서 머물렀다. 아직까지 802호는 부산시청 선수들의 숙소다.

"정든 곳이다. 대표선발 된 뒤 하루빨리 오고 싶었다. 부산은 내가 선수생활 하던 곳이다. 바로 내가 살던 동네였다. 바로 이곳에서 금메달 땄다는 것은 다른 일본선수들이 느끼는 기분과 차원이 다를 것이다."

추 선수는 부산에서의 기억들을 되살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한국어로 기자의 질문에 또박또박 대답했다. (추 선수의 한국어 구사 능력은 일상 대화는 편하게 나눌 수 있었지만 세밀한 심정 묘사에는 문제를 겪는 듯 했다. 그는 자주 "어떻게 말해야 하나"며 일본어로 중얼거리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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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 선수의 기대대로 그의 경기가 있던 날 부산 시민들은 그에게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보냈다. 하지만 안동진 선수를 이기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을 땐 야유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그는 어느 정도 각오를 하고 이번 대회에 참가했다고 한다.

ⓒ 스플 이혜준
"물론 서운했다. 하지만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마 한국 선수를 이기고 금메달 따서 그랬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추 선수는 한국을 떠나야만 했을까. 이는 관중들이 박수만 보낼 수 없었던 주된 이유였을 것이다. 그가 일본으로 돌아간 시점인 지난 해 겨울, 그는 이미 목표였던 국가대표가 돼 있었고(물론 2진이었지만), 작년 체전에서는 1인자 조인철 선수를 눌렀기 때문에 국가대표 1진이 될 기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 선수는 자신에게 보다 맞는 유도를 하고 싶었다고 한다. 20년 이상 해왔던 자율적인 훈련 방식을 택했던 것.

- 일본에 왜 돌아가야만 했나?
"한국 유도스타일보다 일본 스타일이 내게 더 맞는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는) 감독님과 선수들이 모두 열심히 하지만 모든 것을 짜여진 대로만 하는 경향이 있다. 일본은 조금 더 자율적이다.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다. 나를 위해서 보다 자율적으로 훈련하고 싶었다."

- 한국에선 자율성이 보장되지 않는가?
"가장 컸던 것 중 하나가 국가대표 된 뒤 태릉선수촌에 들어가 있어야만 했다는 것이다. 다른 선수들은 그런 훈련방식을 좋아할 수도 있지만 내겐 맞지 않았다."

일본의 경우, 국가대표에 선발돼도 소속팀 선수들과 훈련을 받는다고 한다. 그러다 가끔씩 대표 선수들을 소집해 기량을 점검한다거나 미팅을 갖는다고.

혹시 다른 이유는 없었을까. 추 선수가 한국에서 선수생활 할 땐 그의 앞에는 항상 조인철 선수(은퇴, 용인대 강사)가 있었다. 늘 2인자 역할만 해온 것.

"조인철은 정말 좋은 선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2인자였던 것에 대해 아쉬웠다든가 하는 점은 없었다."

아니면 유도계 시스템의 문제는 아니었을까. 일단 유도 경기장 안팎에서 만난 유도인들과 팬들은 하나같이 우리나라 유도계의 문제점에 대해 지적했다.

"추성훈이를 보면 일본에서 기본기 잘 배워 기술과 힘 모두 뛰어나다. 유도계에서 유도대(용인대)를 나오지 않으면 국가대표 달기 힘들다. 추성훈이도 피해자다. 어떻게 보면 성훈이가 자기 스타일에 맞게 일본으로 잘 돌아간 것인지도 모른다."(부산 모 팀 감독)

"비통할 따름이다. 우리 스포츠계는 지연과 학연 때문에 올바로 선수들이 운동을 못하는 거 같다. 실력 있는 선수보다는 후배랍시고 실력 떨어지는 선수를 뽑는다. 어떤 사람들은 추성훈이 조국 버렸다고 말하는데 나는 오히려 조국이 추성훈을 버렸다고 생각한다."(유도 팬 하원옥씨)

ⓒ 스플 이혜준

하지만 정작 추 선수는 이에 대해 함구했다. 아니 입을 열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그는 포기하고 도망간 것일 수도 있으니까.

또 하나의 걸림돌은 언론이었다. 추 선수는 '조국을 메쳤다'는 제목의 기사를 1면에 다룬 모 스포츠 일간지를 보고 처음에는 좋아했다. 그는 말은 잘 했지만 읽는 것엔 서툴렀기 때문에 내용을 몰랐던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조국을 등지고 한국 선수를 이겼다'는 기사내용을 읽어주자, 이내 들고 있던 신문을 무릎에 내려놓으며 당황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다시 그가 입을 열었다.

"(이런 기사가 나왔는지) 잘 몰랐다. 그냥 나를 유도선수로 봐줬으면 좋겠다. 이런 기사를 보니까 (마음)아프긴 아프다. 서운하기도 하다. 그런 거 때문에(조국 배반하기 위해) 유도한 거 아닌데... 그래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이해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이런 기사 안 냈으면 좋겠다. 이렇게 하는 건 자제했으면 좋겠다. 관심 가져주는 것은 감사하지만..."

ⓒ 스플 이혜준
이 대목에서 추 선수는 답답한지 "어떻게 말하지"를 되뇌며 일본어 통역을 찾았다. 주위에서 통역원을 못 찾자 경기장 옆 연습장으로 기자들과 함께 갔지만 역시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다시 경기장으로 돌아와 <스플> 기자와의 인터뷰를 매듭지을 수밖에 없었다.

추성훈 선수는 한민족의 핏줄을 가지고 한국의 대표가 되기 위해 한국에 왔다. 하지만 돌아가야만 했다. 어떤 이들은 그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야유를 보냈고, 어떤 이들은 박수를 보냈다. 추 선수는 그에게 부정적인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했지만, 이를 강조하는 그의 마음 한 구석엔 상처가 있는 듯 했다.

"(금메달 땄을 때) 특별히 더 많이 기쁘다거나 만족감이 든 것은 아니다. 보통만큼만 기쁘다고 생각했다. 내가 금메달 딴 것을 두고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솔직히 유도가 좋았을 뿐이다."

그의 말대로 그는 단지 자신에게 맞는 스타일을 찾아 일본으로 간 것일 지도 모른다. 사인을 부탁하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친절하게 사인을 해주는 추 선수의 모습이 조금은 측은해 보였다. 4일 아침 9시, 경기를 마친 유도대표팀과 한국을 떠나는 추 선수의 마음은 어떨까.

"그동안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들었어요. 일본에 돌아가면 일단 쉬어야죠. 여행이나 갈까요. 음...그리고 난 조국을 배반하지 않았어요. 아까 뭐라고 했죠? 그 신문에서..."
- '조국을 메쳤다'요.

"난 조국을 메치거나 그러지 않았어요."


<스포츠조선>의 이상한 '추성훈 금메달' 보도

'추성훈 선수 금메달 보도'에 가장 많은 공을 들인 신문은 <스포츠조선>(이하 '조선')이다. 2일자 조선은 1면과 4면에 걸쳐 `추성훈 선수`에 대해 가장 많은 지면과 사진을 할애했다. 또한 5개 스포츠신문 중 유일하게 추성훈 선수와의 인터뷰 내용을 일문일답 형식으로 소개했다.

1면에는 '조국을 메쳤다'는 제목 아래 "만화에서나 나올법한 슬픈" 추성훈 선수의 운명적 스토리를 소개했고, 4면에는 '선수는 승부에서 이기는 게 생명' 제하로 추성훈 선수의 결승전 소감과 한국 텃세에 좌절해서 일본으로 귀화했다는 내용의 박스기사를 함께 실었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다른 신문사에 실려 있는 추성훈 선수의 '말'을 찾아볼 수가 없다. 조선은 '한국 선수로 활약하다가 일본대표로 출전한다는 것이 어색했을텐데', '이번 대회에 대비해 훈련은 어떻게 했나', '결승전에서 승리를 자신했나', '앞으로의 목표' 등 4개 질문을 던졌다. 조선의 인터뷰 기사에서 볼 수 있는 '귀화'와 관련한 멘트는 "부담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운동선수는 우선 승부에서 이기는 것이 생명이라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했다"는 답이 유일하다.

▲ 2일자 스포츠조선. 5개 스포츠신문사중 경기 장면을 촬영한 신문사는 스포츠조선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스포츠서울은 시상식 장면을, 타 신문사는 연합뉴스 사진을 사용했다
ⓒ 스플 이정환

다른 신문에 나와 있는 추성훈 선수의 말은 어떨까. 간단하게 경기소식과 추성훈 선수 소개를 박스 기사로 처리한 <굿데이>를 제외한 나머지 3개 신문사에 실려 있는 추성훈 선수의 말은 다음과 같다.

"유도를 하기 위해 귀화했고 유도는 국적과 관계없다는 걸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래도 저는 한국 사람입니다. 감사합니다. 우승해 기분이 좋습니다"(스포츠서울)
"대한민국 구호가 나를 응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국적은 상관없다. 유도를 계속하고 싶었을 뿐이다" "유도가 좋아 선택한 길인만큼 앞으로도 열심히 할 것이다" (일간스포츠)
"나는 한국사람입니다. 귀화는 유도 때문에 했습니다. 유도에는 국적이 없습니다" (스포츠투데이)

모두 '조국을 메쳤다'는 조선의 기사 제목을 어색하게 만드는 말들이다. 다른 신문들의 기사 제목 또한 조선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래도 전 한국입니다'(스포츠서울), '유도가 좋았을 뿐'(일간스포츠), '추성훈 "유도위해 귀화...난 한국인"(스포츠투데이)

특히 <한겨레신문>을 보면, 신문 기사가 '사람을 보는 시각'에 어느 만큼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다. 한겨레 기사는 "추성훈은 1일 금메달을 따낸 뒤 '열심히 응원해주신 동포여러분께 정말 감사드린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로 시작, "그가 경기장을 나서며 던진 능숙한 한국말은 우리들의 가슴을 깊숙이 찌른다"며 '나는 영원한 한국 사람입니다'는 추성훈 선수의 말로 끝맺고 있다.

조선이 왜 그렇게 추성훈 선수 보도에 많은 공을 들였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조국을 메쳤다'고 보기 힘들게 만드는 추성훈 선수의 말들은 왜 쏙 빼버렸을까. 2일자 조선은 확실히 이상했다. 특히 아키야마의 마음속에 '추성훈이란 이름 석자와 한국'이 살아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 이정환 기자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스포츠피플(www.sple.com)에 실려 있습니다.

 

'신예' 안창림, "추성훈 선배처럼 일본으로 귀화생각 없다"

 

출처 OSEN|입력 2014.11.28 18:03|수정 2014.11.28 18:05

 

OSEN=제주, 우충원 기자] "일본으로 귀화할 생각 없다".

안창림(용인대)은 28일 제주특별자치도 한라체육관에서 열린 2014 제주 그랑프리 국제 유도대회 남자 73kg급 결승전에서 사기 무키(이스라엘)을 상대로 한판 승을 거두며 최고 자리에 올랐다.

재일교포 3세 안창림은 지난 3월 남자 유도 73kg급 국가대표에 발탁됐다. 지난 3월 열린 국가대표 2차 선발전에서 3위를 기록한 데 이어 6월 최종선발전에서는 1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일본 유도 명문인 츠쿠바 대학에서 용인대로 편입한 안창림은 한국인의 자긍심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그의 꿈은 선배인 왕기춘(양주시청)처럼 세계 정상급 선수가 되는 것. 그는 67kg급에서 한 체급 올린 것이 왕기춘과 비슷하다.

그의 최종 목표는 올림픽 금메달. 재일교포 선배인 추성훈도 이루지 못했다. 특히 2002 부산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추성훈도 태극마크로 올림픽에 나서지는 못했다. 추성훈은 2001년 국제유도연맹(IJF) 아시아대회에는 국가대표로 출전했지만 올림픽에는 나가지 못했다.

안창림은 경기 후 가진 인터뷰서 "한국에 와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일본에 있을 때 보다 훈련도 더 힘들다. 한국말을 잘 하지는 못하지만 왕기춘형처럼 기술적으로 뛰어났으면 좋겠다"면서 "꼭 더 좋은 선수가 되어 올림픽에도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어 그는 "추성훈 선배에 대한 이야기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절대로 일본에 귀화할 생각이 없다. 일본에서 귀화 제의를 받기는 했지만 현재 최선을 다하는 것이 가장 중요"리고 강조했다.

10bird@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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