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이슈

노무현식 시골 話法의 노림수

도깨비-1 2009. 4. 9. 07:57


[태평로] 노무현식 시골 話法의 노림수

사실의 일부만을 밝힘으로써 더 큰 사실을 은폐하는 수법
우리는 그가 말하는 '시골'에 그 화술에 너무 많이 속아왔다


 

   시골 된장, 시골 식당, 시골 밥상, 시골 식혜…. 몇 년 사이, 먹을거리 사고가 많이 나면서 '시골'이란 단어는 아무 데나 써도 되는 만사형통의 단어가 됐다. 이런 이름을 가진 식당이 다른 데보다 더 좋은 음식을 제공한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같은 값이라면', '좀 낫겠지' 하는 심정으로 어느새 이런 종류의 이름에 설득당한다.
   '시골의사'라는 필명을 가진 의사 겸 주식전문가도 있다. 사실 의사에다 주식투자까지 잘하는 이라면, 사람들에게 '미운털' 박히기 십상이다. 그 계급적인 질투심을 상쇄시켜 주는 단어가 바로 '시골'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지방에 살고 있으며 자신도 검약하고 소박한 생활을 하고 있다니 그 작명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상상도 해본다. 만일 그의 닉네임이 '강남 의사'였다면?
   우리는 언제나 '겉보다 속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그건 우리가 그만큼 쉽사리 '겉'에 현혹당해 왔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아주 자주 명명법에, 이름에, 브랜드에, 이미지에, 화술에 속는다.
   지난 몇 년간 노건평·무현 형제를 둘러싼 생각의 틀이 그랬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자신의 형을 일컬어 '시골에서 농사나 짓는 사람'이라고 했다. 순박한 얼굴과 그런 형용법은 그를 둘러싼 수많은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든든한 방패막이가 돼왔다.
   사실 노건평씨가 68년부터 10년간 지방 세리(稅吏)로 근무하다 78년 징계 파면됐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런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드문 상황에서 그를 그저 '촌부'라는 식으로 호명하는 것은 겸손한 것도, 솔직한 것도 아니다. 마치 전날 무단결근했던 회사원이 "어제 아침엔 제가 좀 늦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말의 방식이다. 사실의 '일부'만을 밝힘으로써 다른 진실을 은폐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화법은 7일 또다시 현란한 면모를 드러냈다. 대국민 사과문을 내면서 노 전 대통령은 "저의 집에서 부탁하고 그 돈을 받아서 사용했다"고 밝혔다. 최소 수억원의 큰돈 받은 일을 두고, '(난 모르고) 집사람이 한 일'이라는 식으로 얘기하는 고위공직자는 너무 자주 봐서 이젠 식상할 정도다.
   그러나 좀 더 무게를 두고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다면, 그 순박한 듯한 '사투리' 화법이다. 아무리 그의 고향 지역에서 부인을 '집'이라고 표현한다 한들, 이처럼 중대한 문제에 대한 사과문을 작성하면서 집이라는 두루뭉술한 표현을 쓰는 건, 단순히 '입에 붙은 고향 말'의 힘은 아닐 것이다. 그가 법조인 출신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게다가 언제, 얼마나 받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그러니까 그의 결정을 두고, '꼬리 자르기'라는 의심이 나온다.
   "미처 갚지 못한 빚"이라는 말도 애매하다. "경제에는 무능했을지 몰라도 정치를 바로잡고, 부패를 몰아내는 데는 앞장섰다"던 예전 재임 시 고백 방식을 그대로 닮았기 때문이다. 그 화술은 통치자로서의 무능을 인정하는 대신 자신의 '청렴' 이미지만은 더 강조하는 방식이다.
   '미처 갚지 못한 빚'이란 표현을 보는 순간, 떠오른 느낌은 두 가지다. "대체 누가 대통령에게 빚을 갚으라 독촉을 했던 것일까"하는 의문이 먼저고, 이어 이런 생각이 얼핏 스쳐 지나갔다. 노 전 대통령이 혹시 "내가 비리는 다소 있지만, 그 원인은 청렴에 있다"는 식으로 얘기하고 싶어하는 걸까.
   아니나 다를까, 어떤 노사모들은 "대통령 5년에 빚밖에 남은 게 없다니…자신을 위해 챙긴 것은 없는 사람", "그 정도 돈밖에 없다니 당신은 바보 노무현"이라는 글을 남겼다.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반응이지만, 이런 글이 나오는 것을 보면 "역시 노무현 화법은 강하다"는 찬탄이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대통령이 스스로 '사죄드립니다'라는 글을 올린 것을 두고, 한국 사회가 그만큼 진보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기엔 행간에 숨은 '노림수'에 더 신경이 가는 건 또 뭔가. 노 전 대통령의 사과문은, 여전히 '노무현식 화술(話術)'의 연장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

 

조선일보 2009년 4월 8일 (박은주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