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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도올고함(孤喊)] 숭례문 화재현장에서

도깨비-1 2008. 2. 12. 11:49
뉴스: [도올고함(孤喊)] 숭례문 화재현장에서
출처: 중앙일보 2008.02.12 04:40
출처 : 사회일반
글쓴이 : 중앙일보 원글보기
메모 : [중앙일보 김용옥.임진권] 예부터 회록지재(回祿之災)라는 말이 있다. “받은 녹(祿)을 되돌리는 재난”이라는 뜻인데, 재난 중에 최악의 재난이라 하겠다. 천지자연으로부터 받은 녹을 천지자연으로 되돌리는 재난이니 문명을 향유하려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재난일 수밖에 없다. 도둑맞은 물건은 어딘가 뒹굴고 있어 되찾을 수도 있다. 회록지재란 예부터 화재(火災)를 일컫는 아언(雅言)이었다.



어젯밤 TV 뉴스 속보를 볼 때만 해도 연기만 뿌옇게 올라온다 했고, 그다지 큰 불처럼 보이지 않았다. 사다리차를 탄 소방관들이 물을 뿜어대고 있어 그슬리는 차원에서 끝나버리면 그래도 상량(上樑)의 묵서(墨書)라도 보존되어 복원의 명분이라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국보 1호 숭례문 전소.” 참으로 믿어지지 않는 소식이었다.

11일 아침 나는 숭례문으로 달려가 보았다. 너무도 참담한 모습이었다. 불세출의 서성(書聖),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도 과천에서 내왕할 때면 해 저무는 줄 모르고 우뚝 선 채 황홀하게 쳐다보았다는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현판 글씨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에겐 그것이 일차적 관심이었다. 현판이라도 우선 떼어냈어야 했거늘… 쳐다보니 현판이 보이지 않아 우선 안도의 숨을 내쉬었으나, 탐문해 보니 그것조차 떼어내는 과정에서 떨어뜨려 손상이 되었다고 한다. 하여튼 개판이다.

국보 1호라는 하중감 때문에 소방관들의 대처가 본격적이지 못했고, 또 문화재청의 안일한 상황 판단이 결국 전소라는 수치스러운 참사를 지어낸 것이다. 국민들이 빤히 쳐다보는 가운데 진화 장비를 완벽하게 갖춘 50여 대의 소방차가 출동해 있으면서도 그냥 훨훨 태워버린 것이다. 오호라!

“기분이 나빠요.” 친구에게 전화 거는 어느 어린 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가 그리 기분이 나쁜가?

나를 쳐다보더니 재빨리 휴대전화를 접고 정중하게 답변한다.

“어찌 되었든 국보 1호잖아요. 그런데 저렇게 처참하게 무너진 꼴로 우리 눈앞에 놓여있는 모습이 뭔가 불길한 국운을 상징한다는 느낌도 들어요. 국민 누구든 가슴이 아플 거예요. 아니, 부끄럽겠죠.” 중앙대학교 약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란다. 이름은 신동호.

―국운? 좀 거창한 얘기지만 일리가 있군. 저렇게 처참하게 무너진 꼴이 노무현 정권의 마지막 모습일까, 이명박 정권의 시작하는 모습일까?

“서로가 서로에게 덮어씌우겠죠.”

젊은이들의 지나치는 이 한마디가 오늘날 우리나라 세태의 전부를 말해준다.

“부끄럽다”는 그 한마디에 더 첨삭할 언어가 어디 있겠느뇨?

맹자의 혁명사상을 접한 신진유생 삼봉 정도전(鄭道傳·1342~1398)은 고루한 친원파들과 대결, 나주 소재동 등지로 귀양을 다니면서도 동북면 도지휘사 이성계와 결탁해 혁명을 모의하고 결국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정권을 장악한다. 1392년 7월 17일 신왕조를 개창하고 태조 3년(1394) 10월 25일에는 한양 천도를 감행한다. 개성의 지세가 쇠하였다고는 하나 개성 문벌 귀족의 틈바구니 속에서는 도저히 새로운 국가,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새 궁궐을 조성할 때도 하륜(河崙)은 무악을 주산으로 삼자 했고, 무학대사는 인왕을 주산으로 삼자 했지만, 오늘날의 백악현무(白岳玄武), 인왕백호(仁王白虎), 낙산청룡(駱山靑龍)의 모습으로 궁궐과 도성의 모습을 결정한 것은 삼봉 정도전이었다. 삼봉이 꿈꾼 것은 불교라는 고려의 낡은 이데올로기를 불식할 수 있는 새로운 유교이념! 그 유교이념을 형이상학으로서가 아니라 형이하학으로서 도시에 구현하고자 했다.

태조 4년(1395) 삼봉은 새 궁궐의 전각 이름을 지었고, 5년에는 도성 8대문의 이름을 지었는데 『시경』과 『서경』에서 그 아름다운 뜻을 취하였다. 특히 4대문은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오행(五行)에 배정시켜 그 이름을 결정하였다. 인(仁)은 동방(東方)이므로 동대문에 배속되고, 의(義)는 서방(西方)이므로 서대문에 배속되고, 예(禮)는 남방(南方)이므로 남대문에 배속되고, 지(智)는 북방(北方)이므로 북대문에 배속된다. 이렇게 해서 동대문의 이름이 흥인지문(興仁之門)이 되고,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이 되고, 북대문은 소지문(炤智門)이 되었다. 그리고 오행 중 중앙에 해당하는 신(信)은 종로 중앙의 보신각(普信閣)의 이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 중 유독 동대문만 갈 지(之) 자가 들어갔는데 그것은 그 지역이 타 지역에 비해 낮고 지세가 꺼져 있어 땅 기운을 돋우어 주자는 의도로 갈 지를 더하여 넉 자 현액을 걸어주었다 한다. 그런데 숭례문 현액이 특이한 점은 타 현액이 모두 횡으로 쓰여 있는데, 이 숭례문 현액만 위에서 아래로 써 있는 종액(縱額)이라는 것이다. 일설에는 서울 도성의 정문인 남대문은 귀한 백성이 드나들게 되므로 서서 맞이함이 예절에 합당하다 하여 세워 달았다 한다. 타설에는 남방 화(火)에 해당되는 글씨인 까닭에 불이 타오르는 형상으로 세워 달았는데, 그것은 한강 건너 남쪽 조산(朝山)인 관악산의 불길을 불로 막아, 그 관악의 화기가 서울 도성을 범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숭례문은 자신이 불길에 휩싸임이 없이 기적적으로, 600여 년의 성상을 견디었다. 서울에 남아 있는 건물로는 여말선초(麗末鮮初)의 화려한 다포(多包)양식을 보존하고 있는 유일한 목조였다. 나머지는 모두 임란 이후에 재건된 것이다.

1962년 남대문을 중수(重修)할 때 3개의 대들보가 발견되어 그 정확한 건축연도를 알 수 있는데, 남대문은 도성의 제2차 공사를 완료한 후 12일 뒤인 태조 5년 10월 6일에 상량하고, 그 2년 후인 1398년 2월 8일에 준공하였다. 그러나 남대문 자체가 도성의 연속된 성로(城路) 위에 지은 것인데 이 도성을 짓기 위하여 지반을 돋울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가라앉으면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세종조에 영의정 황희(黃喜) 이하 여러 대신이 건의하여 근본적으로 남대문을 신축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세종 30년(1448) 3월 17일 상량하였고 5월에 준공하였다. 그 뒤 성종 10년(1478)에 한 번 더 개축한 사실이 대들보로 확인된다.

남대문은 이상하게도 임진왜란 때도, 병자호란 때도 화를 면했다. 경복궁이 임란으로 송두리째 잿더미로 화하여 대원군이 재건하기까지 273년 동안을 인왕산 호랑이가 어슬렁거리는 공궐(空闕)로 남아 있었던 사실에 비한다면 숭례문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흥망성쇠를 기억하고 있는 혼이요 얼굴이었다. 지금 우리는 서울이 다 터져 있어 도성팔문의 의미를 망각했지만, 과거에는 저녁 10시경 인정(人定)에 8문을 다 닫고 새벽 4시경 파루(罷漏)에 일제히 여는 통금 제도가 정확히 유지된 성곽 도시, 한성(漢城)이었기 때문에 남대문의 의미는 막중한 것이었다. 여기를 통과치 않고서는 한성 진입이 불가능했다.

1905년 일본이 을사늑약을 강요한 후, 1906년 황태자(훗날 大正天皇)가 한국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때 남대문을 통해 들어올 수 없다고 강짜를 부리며 남대문을 대포로 분쇄해 버리겠다고 제의했다. 이에 민중의 여론이 들끓자 그들은 융희 원년(1907) 남대문에 연결된 북쪽 성벽을 헐어 길을 내었고 이듬해에 남쪽으로 연결된 성벽을 헐어 달랑 남대문만 남겨놓았던 것이다.

왜놈들이 헤이그밀사 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켰을 때도 우리 민족은 이 남대문 주변으로 치열한 항쟁을 벌였다. 일본군은 남대문 성벽에 대포와 기관총을 설치하고 마구 쏘아댔다. 상인, 노동자, 남녀 학생, 부녀자들까지 용감무쌍하게 항전을 계속했으나 결국 피를 흘리며 압제의 굴레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6·25전쟁 통에도 광화문은 무참히 파손되었지만 남대문만은 그 원형이 훼손되지 않았다. 억센 운명을 타고난 우리 민족의 600년 유물, 국보 1호, 그 숭례문이 덧없이 하룻밤 사이의 회록지재로 사라진 것이다.

웬 일일까?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방화를 의심하거나 문화재 관리소홀을 탓하여 부질없는 경비 예산이나 늘리는 호들갑일랑 이제 되풀이하지 말자! 근원적으로 문제되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의 죄악의 반성이요, 우리 사회의 신뢰의 부족이요, 이 민족 혼백의 타락이다.

세종대왕은 이 민족의 구원한 미래를 위해 우리 민족의 독창적 문자인 훈민정음을 반포하고 2년 후에 남대문을 신축하여 오가는 백성들에게 위용과 믿음을 주었다. 그런데 지금 새 정권은 기껏 생각한다 하는 것이 “영어몰입교육”이요, 회록지재보다 더 무서운 재앙인 대운하 강행에 혈안이 되고 있다. 정부 기구 통폐합 운운도 어떤 합리적 원칙이나 철학이 엿보이지 않는다. 대선 전의 민생 공약은 실종되어만 가고 있다. 과연 남대문의 무너진 흉측한 모습을 과연 우발적 사건으로만 돌릴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떠나가는 그 젊은이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여보게! 부끄러워 말게. 문화재는 이제 자네 머릿속에서 솟아나와야 할 것이 아닌가? 자네들이 컸을 때 삼봉이 구상한 코스모스보다 더 위대한 작품들로 이 땅을 수놓기 바라네.”

5시간 숭례문에 화재가 발생해 완전히 무너져 내릴 때까지 걸린 시간. 불은 10일 오후 8시40~50분쯤 났다. 10일 자정쯤 건물 천장에서 화염이 치솟았고, 11일 오전 1시쯤 2층 누각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불이 난 지 5시간 뒤인 오전 1시50분부터 석반을 제외한 2층 누각 전체와 1층 누각 대부분이 무너졌다.

글=도올 김용옥 기자, 사진=임진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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