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담

[스크랩] 라흐마니노프 ‘폭풍 연주’ 90분 숨죽이던 객석이 흐느꼈다

도깨비-1 2008. 1. 24. 12:42
출처 : 인물
글쓴이 : 중앙일보 원글보기
메모 : [중앙일보 김호정.최승식]

 22일 밤 서울 예술의전당.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 2번에 이어 3번이 울려 퍼졌다. 마지막 악장의 클라이맥스. 어렵기로 유명한 화음이 쏟아졌다. 피아노를 치던 서혜경(48)씨의 크리스털 귀고리 한 쌍이 모두 무대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하지만 피아니스트는 전혀 개의치 않고 온몸으로 건반을 계속 내리쳤다.

 한 시간 반 동안의 폭발적 연주를 마친 서씨가 마이크를 잡았다.


“제가 방사선 치료를 마친 지 3개월이 조금 넘었….” 말을 잇지 못하는 피아니스트를 향해 청중은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귀고리가 떨어지는 것도 모를 정도의 열정 뒤에는 안쓰러운 모습이 있었다. 서씨는 오케스트라 연주로 피아노가 쉬는 동안엔 왼팔을 들어 오른팔을 주물렀다. 양손을 깍지 끼고 뒤로 쭉 뻗어 보기도 했다. 지난해 4월 유방암 수술의 후유증이었다.

 서씨는 2006년 10월 유방암 판정을 받았다. 겨드랑이의 림프절까지 모두 절단해 내면 피아노를 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의사 7명을 찾아갔다고 했다. 그중 5명은 “생명을 살리기도 힘든데 왜 피아노에 욕심을 부리느냐”고 나무랐다.

 “나이 마흔을 넘어 겨우 피아노란 걸 조금 알 수 있게 됐어요. 음악을 조금이나마 할 수 있게 됐는데, 어떻게 포기할 수 있겠어요.”

 그는 암 덩어리를 안고 일본으로까지 날아가 연주하기도 했다. 하지만 세계적 음반사인 도이치 그라모폰과의 꿈같던 계약은 결국 포기해야 했다. 아버지 서원석(82)씨가 “살인죄로 고소하겠다”고까지 하며 매니저에게 딸의 모든 일정을 취소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암이 그에게 처음 닥친 시련은 아니다. 만 스무 살에 국제무대(부조니 콩쿠르)에서 동양인 최초로 우승한 뒤 그는 근육마비를 겪었다. 2년 넘게 쉬었다. “왜 나였을까요. 그것도 두 번이나.”

 서씨는 33번의 방사선 치료와 한 번의 대수술이라는 시련을 딛고 일어섰다. 그리고 다시 연습을 시작했다. “수술 후 무리하지 말라”는 조언도 무시한 채 한 곡 연주하기에도 벅찬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을 두 곡이나 잡았다. 원래 세 곡을 치려 했지만 그나마 조금 양보한 결과다. “살아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고 했다.

 그의 길었던 머리(스스로 삼손이라고 생각해 머리를 자르지 않았었다고 함)는 항암 치료 때문에 쇼트 커트로 바뀌었지만, 건반 주위에서 바람이 일 듯한 두드림은 전성기 시절 그대로였다. 그는 “살아난 뒤 사람을 사랑하게 됐고, 함께 노래하는 즐거움을 알았다”고 했다.

 음악도 깊었다. 협주곡 2번 1악장에서 악보를 잊어 버리는가 하면, 음악에 대한 욕심에 손가락이 방향을 잃는 모습도 간혹 보였지만 생명과 피아노 중 후자를 택한 그는 자신의 재기를 객석에 뚜렷하게 각인시켰다.

 서씨는 아직 재발의 두려움 속에서 산다. 밀가루 음식은 입에 대지도 않는다. 스트레스도 최대한 피해야 한다. 재발에 대한 공포 때문에 소스라치듯 잠을 깨는 새벽도 찾아온다. 연주를 마친 그는 “재발되지 않고 계속 연주할 수 있길 바란다”고 소망했다. 그리고 앙코르곡을 연주했다. 슈만의 ‘꿈(트로이메라이)’이었다. 객석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글=김호정 기자 , 사진=최승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