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무는 병술년에…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 동아일보 2006년 12얼 30일)
세밑이 되면 편한 날을 잡아 고향으로 내려간다. 어린 시절에 만났던 궁핍한 삶의 모습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고, 그것이 또한 매우 익숙해서 위안을 주기 때문이다. 엄동설한의 살갗을 에는 듯한 추위에도 문을 열어 놓고 오랫동안 먼산바라기를 한다. 겨울철 특유의 잿빛 하늘과 흐릿하게 골격이 드러난 산등성이 아래의 밭고랑 뒤로 우중충한 외관을 드러낸 가옥들이 듬성듬성 박혀 있다. 휠 대로 휜 삶의 질곡들이 궁핍하고 누추한 그 농가들의 외벽 위로 자욱하게 쌓여 있다.
예나 지금이나 짓누르고 있는 고단한 삶의 중력에서 조금도 비켜나지 못했다는 흔적이 뚜렷하다. 그와 함께 나 자신이 짊어지고 있는 짐의 무게 역시 그대로라는 자책감이 뒤통수를 때린다. 짐의 무게를 덜기는커녕 폭력에 가까운 변덕과 몰락조차 아랑곳하지 않고 번지는 불화와 갈등으로 한 해를 보내 버렸다는 회한이 가슴속을 암팡지게 파고든다. 이분법적 사고가 지난 한 해의 우리 사회를 덥석 물어 버렸고, 나 또한 은연중 휩쓸려 내 고유한 삶의 무늬조차 놓쳐 버렸다는 상실감이 가슴을 짓누른다.
다시 떠나자, 어둠을 가르고 동이 트기 전 고기잡이를 나가는 어부들의 마음은 늘 바쁘고 설렌다. 29일 오전 6시 북한과 20km 떨어진 동해안 최북단 항구인 강원 고성군 현내면 대진항에서 고깃배들이 불빛 궤적을 그리며 출항하고 있다. 방조제에 나란히 서 있는 한 쌍의 등대는 다가오는 새해의 희망을 비추듯 항구의 뱃길을 연다. 고성=이훈구 기자 |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불화와 분열이라는 유령은 갑자기 확장된 모습으로 우리들을 뒤흔들어 창조적 에너지를 갉아먹었다. 너와 나는 같이 손잡고 세상의 우여곡절을 같이하는 상생과 참여의 위치에서가 아니라, 나 아닌 너는 적일시 분명하며 그래서 기어코 굴복시켜야 한다는 음험한 싸움의 등식이 어느덧 우리 사회의 속살에 깊숙하게 배어 들고 말았다.
지금 이 시각 우리들이 겪고 있는 대립과 분열은 애석하게 쓰러져도 웃으며 일어서는 너그러움으로 치유되지 못하고, 오히려 편협함과 천박함으로 도배질되고 있을 뿐이다. 또한 이 불화는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무기력으로 일관되게 만들었고, 예측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가치관의 양극화를 불러왔다. 손사래를 쳐도 계속해서 쏟아지는 막말의 소나기는 사람들의 자긍심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제 발등을 제가 찍는 것처럼 우리 스스로를 폄훼하게 만들었다.
존경의 대상에 대해서도 공격적인 대응이 상식화되어 버려 우리의 살갑던 언어 정서에도 좋지 못한 영향을 끼쳤다. 그런 막말에는 다른 사람들과의 일체감을 느끼는 결정적인 능력이 소멸되어 있다. 비웃고 조롱하고 경멸하고 쉽게 흥분하고 변덕 부리는 것이 일상화되어 버렸다. 이런 사회적 혼란과 변덕스러움은, 나아가 신중하고 질서 정연한 계획, 그리고 담대하고 확연했던 목표에서 우리를 이탈시켜 버렸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세상이 모두 그러하지는 않다는 것에 우리의 희망이 존재한다. 무참히 잘려 나간 자신의 엄지발가락을 가리키며 아직도 아홉 개의 발가락이 남아 있지 않느냐고 되묻던 인천의 두부장수가 생각난다. 아프다는 것은,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살아 있음의 확실한 증거라 했던 장애인 철도원의 한마디가 가슴속에 뭉클하게 남는다.
그처럼 바람이 불면 오히려 누워 있던 갈대가 일어나듯 우리에겐 역경 속에서 벌떡 일어날 수 있는 패기가 있다. 지상의 험악한 굴레를 벗어던질 수 있는 펄떡이는 삶의 기백이 우리에겐 있다. 여기저기에서 희한한 어법으로 사람들 속을 뒤집는다 할지라도 위안과 희망을 솎아 낼 수 있는 혜안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 몰락의 냄새만 맡고 있기엔 우리는 너무나 담대했다. 우리들 피부에 달라붙은 수치와 분노와 불화를 말끔히 씻어 내고, 선하게 생긴 큰 눈에 무한한 편안함을 싣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너그러움과 지혜가 우리에겐 있다.
대지는 항상 활력으로 가득하고 생명의 힘이 넘쳐 난다. 심지어 무심하게 내버려둔 나무도 열매를 맺고 땅속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뿌리조차 줄기차게 뻗어 대지를 뚫고 나온다. 이것이 살갗을 에는 한겨울에도 옷을 입지 않고 견디는 나무들의 생명력이다. 이 나무와 같은 질긴 생명력을 우리는 분명 가지고 있다. 우리가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자면, 불화와 분열의 징조를 숨기고 있어선 안 된다. 우리들 내부에 들어앉아 있는 증오심의 악령을 거침없이 내쫓고, 그 빈자리에 위안과 화합의 길벗을 불러 앉혀야 한다.
우리의 경제가 혹은 정치가 그냥 두어도 자라나는 손톱과 같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거짓과 음모에 손 내밀지 않았던 순결한 손으로 그 희망과 악수해야 한다. 우리들 삶의 궤적이 오래도록 구차스러울 수는 없는 것이다.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라고 스스로 썼던 아일랜드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 생각난다.
김주영(소설가·파라다이스문화재단 이사장)
2006.12.30 03:00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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