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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남북] 개는 짖어도 카라반은 간다

도깨비-1 2011. 8. 10. 09:41


[동서남북] 개는 짖어도 카라반은 간다


   -선우 정 산업부차정/2011. 08.10. 조선일보

 

   지난주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 후쿠오카로 갔다. 동해안을 따라 규슈까지 가는 휴가 여정의 일부였다. 배편으로 대한해협을 건넌 것은 1997년 여름 이후 14년 만이다. 바닷길을 왕복하는 동안 그때가 떠올랐다.
   14년 전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잇는 페리는 보따리 아줌마의 전용 선박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줌마 수백 명이 칸막이가 없는 넓은 객실 바닥에 짐을 부렸다. 어마어마한 분량의 제품 박스였다. 아줌마들은 일제히 박스에서 제품을 꺼내 보물처럼 한곳에 담았다. 박스는 박스대로 따로 접어 차곡차곡 모았다. 공장의 포장 라인을 거꾸로 돌리는 듯했다. 1시간쯤 이런 작업을 거치고 나니 몸체보다 크던 짐이 보따리 속에 다 들어갔다. 당시 한국으로의 수입이 금지된 일본 전자제품이었다.
   작업을 마친 뒤 그들은 일제히 도시락을 꺼냈다. 수다의 소음과 함께, 순식간에 시큼한 김치 냄새가 객실을 가득 메웠다. 당시 페리의 드넓은 객실에서 보따리상이 아닌 손님은 혼자 여행하던 나와, 맞은편에 있던 일본의 대학생 배낭족 4명뿐이었다. 한구석에서 꼼짝도 못하던 배낭족들은 내내 기가 질린 표정이었다. 그때 어떤 중년 남성이 객실로 들어와 일본어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술에 취해 횡설수설했지만, 대충 이런 요지였다. "일본 제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한국인들이나, 그걸 보따리로 나르는 당신네나." 경멸감이 가득 담긴 어투였다. 아줌마들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일본 전자제품을 나르는 일이 당당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세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대한해협을 오가는 배 위에서 느끼는 한국인의 감정은 절실했던 것 같다. 1930년 시 '현해탄'에서 소설가 심훈은 관부(關釜)연락선의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객실로 내려가니 만연도항(漫然渡航)의 백의군(白衣群)이다/ 발가락을 억지로 째어 다비를 꾀고/ 상투 잘른 자리에 벙거지를 뒤집어쓴 꼴/ 먹다가 버린 벤또밥을 엉금엉금 기어다니며/ 강아지처럼 핥아먹는 어린 것들.'
   이런 풍경은 까마득한 옛일이 됐다. 일본 전자제품을 들여오던 보따리상도 10년 전에 사라졌다. 요즘 대한해협을 오가는 페리의 손님은 한국과 일본의 가족 여행자와 단체 여행객, 젊은 배낭족, 단체가 인솔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서울과 부산을 오가듯, 부산과 후쿠오카를 오갔다. 중년 남성들은 골프를 쳤고, 가족들은 캠핑을 했고, 여성들은 쇼핑했고, 젊은이들은 라면을 즐겼다.
   심훈이 대한해협을 건너던 1930년 한국은 식민지였다. 1997년 한국의 1인당 소득은 일본의 3분의 1에 머물렀다. 지금은 절반까지 다가섰다. 이 속도를 유지하면 20년 안에 한국인은 일본인과 같은 수준의 경제력을 갖는다. 이번에 함께 여행한 세 살짜리 아이가 성인이 됐을 때다. 그는 일본과 어떤 격차도 느끼지 못하고 무심히 대한해협을 건널 것이다. 한국이 일본을 극복하는 최종 장면은 결국 이런 무심함이 아닐까 한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방문객은 한 해 500만 명에 달한다. 한국의 현대사를 번영으로 이끌고 있는 거대한 주류(主流)의 일부분이다. 이들 속에 울릉도로 향하는 협잡꾼 몇 명이 끼어들 수 있고, 상대방의 정서를 해치는 딴따라의 장난질이 스며들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기를 써도 이들은 강물에 떨어진 한 방울 탁류(濁流)처럼 역사의 흐름 속에서 희석됐다. 개는 짖어도 카라반은 가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