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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신라는 욕먹을 만하다, 이것만 빼고

도깨비-1 2011. 1. 27. 14:55
신라는 욕먹을 만하다, 이것만 빼고
http://newslink.media.daum.net/news/20110127111904359

출처 :  [미디어다음] 정치 
글쓴이 : 오마이뉴스 원글보기
메모 : [오마이뉴스 김종성 기자]





신라 왕관. 사진 출처는 < 히스토리카한국사 가야+신라 > .

ⓒ 이끌리오

신라에서는 박씨·석씨·김씨가 평화적으로 왕권을 교대했다. 근 천년에 달하는 신라(기원전 57~서기 935년)의 역사에서 왕족의 성씨가 교체된 것은 모두 8차례였다. 성씨 교체의 첫 단추를 연 인물은 제4대 탈해왕(석탈해)이었다. 박씨에서 석씨로 왕권이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이러한 교체는 제5대 파사왕(석씨→김씨), 제9대 벌휴왕(김→석), 제13대 미추왕(석→김), 제14대 유례왕(김→석), 제17대 내물왕(석→김), 제53대 신덕왕(김→박), 제56대 경순왕(박→김) 때에도 발생했다.

이 같은 현상은 여타 왕조와 비교할 때에 상당히 특이한 일이다. 한 왕조 내에 3개 혈통의 왕족이 존재하고 그들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했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왕족의 성씨가 바뀔 때에 투쟁이나 갈등이나 전혀 없지는 않았겠지만, 내란이나 내전 수준의 비상사태 없이 평화적으로 정권이 교체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 평화적 정권교체가 가능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그 원동력을 제2대 남해왕(재위 서기 4~24년) 때의 정치시스템 개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때 만약 개혁이 없었다면, 신라는 제3대 유리왕(재위 24~57년) 때에 멸망했을지도 모른다.

부자상속제가 확산된 이후의 제왕들은 가급적이면 자기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 했다. 한국·중국의 제왕들은 혈통에 관계없이 유능한 인물에게 왕위를 물려준 고대 중국의 요임금과 순임금을 존경하고 또 존경했다. 하지만, 그냥 존경만 할 따름이었다.

대부분의 왕들은 막상 자기보다 유능한 인물이 출현하면 어떻게든 제거하려 했다. 자기보다 유능한 인물을 신하로 삼으려 한 임금들은 그나마 양반이었다.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은 욕구를 끊는 것은 그만큼 힘든 일이었다. 흡연 욕구를 끊는 일과는 상대도 되지 않았다.

만약 신라 제2대 남해왕도 여느 임금들과 다를 바 없었다면, 신라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제3대 유리왕 때에 신라가 멸망했을 수도 있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남해왕 때의 시스템 개혁이 없었다면, 신라는 천년은커녕 백년도 못 채웠을지 모른다. 남해왕 때에 신라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신라의 왕들이여, 남해왕 앞에 고개를 숙이시오





다섯 개의 능으로 구성된 신라오릉. 이 중 하나가 남해왕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경북 경주시 탑동 67 소재.

ⓒ 문화재 지리정보 서비스

정확한 시점을 확정할 수 없는 신라 초기에, 강력한 이방인 집단이 신라 해안에 출현했다. 오늘날의 러시아 캄차카반도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는 석탈해 집단이 가야 왕권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뒤에 신라 해안에 나타난 것이다. 석탈해의 도래 시점에 관해서는 다양한 기록이 있지만, 여기서는 < 삼국사기 > '신라본기'의 기록을 우선시하기로 하겠다.

출현 당시의 석탈해 집단이 강력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가야왕 김수로가 석탈해를 추격하기 위해 500척의 함선을 동원했다는 < 가락국기 > 의 기록 때문이다. 500척의 군함을 동원하지 않고는 추격할 수 없었다는 것은 석탈해 역시 상당 규모의 함선을 보유했음을 보여준다.

또 석탈해 집단이 가야 왕권에 도전했다는 것은 그만한 역량을 갖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 집단의 출현으로 인해 신라 민간에 석탈해 신화가 생긴 것은, 신라인들의 뇌리에 강한 각인을 남길 만큼의 강력함을 석탈해 집단이 보여주었음을 반영한다.

이처럼 강력한 외래세력이 도래했으니, 신라인들이 느꼈을 정신적 공황이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의 정신적 공황이 더욱 더 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의 신라가 석탈해 집단을 내쫓을 만한 역량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야는 군사력을 동원해 석탈해 집단을 추방했다는 기록이 있는 데에 비해 신라는 그렇게 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신라의 국력이 이 집단을 내쫓기에는 역부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강력한 외래세력의 도래로 인해, 경우에 따라서는 신라가 붕괴할 수도 있는 위기상황. 이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남해왕은 석탈해 집단을 신라에 연착륙시킬 있는 방안을 강구했다. 그것은 석탈해 집단을 기존의 정치시스템 안으로 포용하는 한편 기존의 시스템을 그에 맞게 적절히 변형시키는 것이었다(편의상 '포용·변형'으로 간칭).

남해왕의 포용·변형은 그의 치세 기간에 크게 3단계로 나타났다. 그가 처음부터 3단계 전체를 구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때그때의 상황변화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3단계의 포용·변형이 나왔을 것이다.

제1단계는 석탈해를 맏사위로 삼은 것이다. 남해왕 재위 5년의 일이었다. 제2단계는 석탈해에게 국정의 전권을 맡긴 것이다. 이 일은 남해왕 재위 7년에 있었다. 이때까지 남해왕이 취한 대응방식은 '포용'이라 할 수 있다. 기존의 정치시스템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이방인 집단을 포용한 것이다.

제3단계는 석탈해에게 왕위 계승의 길을 열어준 것이다. 남해왕이 사망한 남해왕 재위 21년의 일이었다. 죽기 직전에 그는 '아들뿐만 아니라 사위도 왕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하되, 아들과 사위 중에서 나이가 많고 어진 사람에게 우선권을 인정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왕조 국가에서는 왕의 한마디가 곧 법률이었으므로, 이 유언은 시스템 개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석탈해의 도발을 막기 위해 사위에게도 왕위계승을 인정했으니, 이때 남해왕이 취한 대응방식은 '변형'이라 할 수 있다.

이 유언에 따라, 아들 유리왕(고구려 유리왕과 다름)과 사위 석탈해 중에서 '나이가 많고 어진' 유리왕이 남해왕의 뒤를 이어 제3대 임금이 되고 유리왕이 죽은 뒤에는 석탈해가 제4대 임금이 되었다. 남해왕은 '나이가 많고 어진 사람'(年長且賢者)에게 우선권을 준다는 유언을 남겼지만, '어진 사람'이란 것은 객관적 측정이 불가능한 것이므로 이 유언은 실제로는 '나이가 많은' 유리왕에게 우선권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박·석·김의 평화적 정권교체, 역성혁명은 없었다





석탈해의 무덤인 탈해왕릉. 경북 경주시 동천동 산17 소재.

ⓒ 문화재 지리정보 서비스

석탈해 집단으로 인한 신라왕조의 붕괴를 막기 위해 시스템을 변형한 남해왕. 남해왕의 유지를 받들어 석탈해를 후계자로 삼은 유리왕(박씨). 이들의 결단으로 인해 신라에서는 왕권이 박씨에서 석씨로 넘어갔다.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이 전례가 되어 그 후에도 박씨·석씨·김씨가 평화적으로 정권을 교체할 수 있었다. 파사왕(박씨)은 유리왕의 아들이라는 자격으로 석탈해의 뒤를 이었고, 벌휴왕(석씨)은 석탈해의 손자라는 자격으로 아달라왕(김씨)의 뒤를 이었으며, 미추왕(김씨)은 조분왕의 사위라는 자격으로 첨해왕(석씨, 조분왕의 아들)의 뒤를 이었다.

유례왕(석씨)은 조분왕의 아들이라는 자격으로 미추왕의 뒤를 이었고, 내물왕(김씨)은 미추왕의 사위라는 자격으로 흘해왕(석씨)의 뒤를 이었고, 신덕왕(박씨)은 헌강왕의 사위라는 자격으로 효공왕(김씨)의 뒤를 이었으며, 경순왕(김씨)은 문성왕의 후손이라는 자격으로 경애왕(박씨)의 뒤를 이었다.

이 같은 사례들을 보면, 각 시기의 신라 왕실에서는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는 도전세력이 나타날 때마다 도전세력의 수장을 사위로 삼아 왕위계승의 가능성을 열어주거나 아니면 도전세력의 수장이 옛 왕족(자신들과 성씨가 다른)의 자손이나 사위라는 이유로 왕위를 넘겨주었음을 알 수 있다. 혁명이나 쿠데타를 예방하면서 쌍방의 체면을 살리는 길을 모색한 것이다.

이렇게 하다 보니, 박·석·김씨가 교대로 왕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노력이 없었다면 그들이 '한 지붕 세 가족'을 이룰 수도 없었을 것이고 또 신라 왕조를 천년 가까이 유지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 같은 평화적 방법이 나오지 않았다면, 8차례의 성씨 교체는 8차례의 역성혁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국가 혹은 왕조가 8차례나 바뀌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신라 수도인 경주의 남쪽에 있는 남산. 위쪽 사진은 1932년에 조선총독부 주관 하에 촬영된 것이고, 아래쪽 사진은 오늘날 촬영된 것이다. 출처는 < 경주 신라 유적의 어제와 오늘 > .

ⓒ 성균관대학교 박물관

신라가 당나라와 손잡고 고구려·백제를 멸망시킨 사건으로 인해, 많은 한국인들은 신라를 원망하고 있다. 물론 신라의 행위로 인해 한민족의 영역이 축소된 것은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라의 행위는 민족사적 측면에서 비판받을 여지가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신라사 전체를 무시하거나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신라의 역사에는 '버려야 할 부분'도 있지만 '배워야 할 부분'도 있다. '버려야 할 부분'을 비판하는 데에만 지나치게 매몰되다 보면, '배워야 할 부분'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하기 쉽다. 그렇게 되면, 역사로부터 좀 더 많은 것을 배울 기회를 잃게 된다.

이 글에서 소개한 것처럼, 신라인들이 평화적 방법으로 위기를 극복한 측면이나 3개 성씨가 왕위를 공유한 측면 등은 마땅히 '배워야 할 부분'에 속한다. 신라 역사의 부정적 측면 때문에, 이 같은 긍정적 측면까지 무시하거나 소홀히 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싫어하는 대상의 긍정적 측면도 함께 바라보고, 좋아하는 대상의 부정적 측면까지 함께 바라볼 줄 아는 균형감각을 가진 국민만이 역사로부터 좀 더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