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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학생운동

도깨비-1 2009. 10. 29. 07:38

1970년대 학생운동 스크랩

 

1971년 1월 27일 정부는 대학 교련교육의 대폭적인 강화 방침을 발표했다. 공산세력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으나, 이것은 누가 보더라도 국가안보가 아니라 정권안보를 위하여 학생들을 병영 안에 가두겠다는 속셈이었다. 3월 신학기가 시작되자 학생들은 교련 수강신청을 전면 거부하면서 연일 교련반대 성토대회를 열었다. 4월 대통령선거가 임박하면서 학생들의 이슈는 교련반대에서 공명선거운동, 선거참관운동으로 바뀌었다. 4월 27일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가 승리하자 학생들은 다시 부정선거 규탄투쟁에 나섰다. 그러나 5월 28일 서울대에 휴업령이 내려지고 대부분의 대학이 방학에 들어가면서 1971년 1학기 투쟁은 막을 내렸다. 71년 2학기 학생들의 시위에 기름을 끼얹은 것은 10월 5일 새벽에 발생한 무장군인 고려대 난입사건이었다. 고대생들이 발표한 부정축재자 명단에 당시 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이 포함된 데 앙심을 품은 수경사 소속 헌병들이 무장한 채 고대에 난입하여 도서관에서 농성 중인 학생들을 무차별 구타, 연행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학생들은 격분했다. 학생들의 시위가 격렬해지고 전국으로 확산될 기미가 보이자 박정희는 10월 15일 위수령을 발동하여 군인들을 학교에 진주시키고 8개 대학에 무기한 휴업령을 내렸다. 이어 대대적인 탄압이 자행되어 전국 23개 대학에서 177명의 학생이 제적되고 강제입영되었다. 이것으로 학생운동은 거의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노동운동이나 시민운동이 아직 성숙하지 않았던 1970년대 초반 학생운동이 붕괴하면서 박정희에 저항할 세력은 더 이상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1972년 10월 17일 전국에 비상계엄이 내려진 가운데 10월유신이 선포되었다. 박정희의 종신집권이 시작된 것이다.



유신의 공포 아래 모두가 숨죽이고 있던 1973년 10월 2일 서울대 문리대에서 유신 선포 이후 최초의 학생 시위가 발생했다. 학생들은 선언문에서 “패배주의, 투항주의, 무사안일주의와 모든 굴종의 자기기만을 단호히 걷어치우고” 유신체제와의 투쟁을 선포하였다. 이 날의 시위로 20명이 구속되었으나 학생들의 시위는 이제 시작이었다. 10월 4일 서울법대, 5일 서울상대 시위 이후 잠시 소강상태에 빠졌던 학생 시위는 11월 5일 경북대 시위를 계기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학생들은 데모뿐만 아니라 동맹휴학, 시험거부, 검은 리본 달기 등 다양한 방법으로 유신반대운동을 조직했다. 처음에는 강경책으로 일관했던 박정희도 결국 12월 7일 구속 학생을 전원 석방하며 학생들 달래기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1974년 신학기가 시작되자 학생들은 1974년을 민주 승리의 해로 만들자고 결의하고, 전국의 각 대학이 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이란 이름 하에 연합하여 대규모 시위를 벌일 것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사전에 중앙정보부에 감지되었다. 시위가 예정되어 있었던 4월 3일 서울대 문리대의 데모는 학생들보다 경찰이 더 많은 가운데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상황은 다른 대학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이 날 박정희는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하였다. 이 조치는 민청학련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고, 그 형량 또한 사형, 무기, 5년 이상의 징역이었다. 학생들의 시위에 대해 이렇게 어마어마한 중형을 선고하기 위하여 인민혁명당(인혁당)이란 이름의 가상의 공산주의단체가 조작되었고, 많은 종교인, 지식인들이 관련 혐의로 구속되었다. 검찰은 이 사건을 학생들이 인혁당계 지하공산세력, 조총련계열, 일부 종교인 등 국내 반정부세력과 결탁하여 반정부 연합전선을 형성한 후 유혈폭력혁명을 통해 일거에 정부를 전복하고 임시과도연립정부를 거쳐 궁극적으로 공산정부를 수립하고자 한 국가변란사건으로 규정했다. 이 사건으로 군법회의에 회부된 사람의 수만 253명에 달했고, 1심 재판에서 서도원, 도예종 등 인혁당 관계자 8명과 이철, 유인태 등 민청학련 관계자 6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으며, 기타 관계자들도 대부분 무기징역이나 10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수사가 마무리되면서 박정희는 8월 23일 긴급조치 4호를 해제하였다. 그러나 구속자는 석방하지 않았다. 그러자 가을이 되면서 학생들이 동료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에 나섰다. 민청학련사건에 신부, 목사들도 연루되면서 천주교와 기독교까지 반유신 대열에 합류하였고, 언론인, 문인들도 가세하였다. 이에 견디다 못한 박정희는 1975년 2월 12일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반대의 의사표명이 봉쇄된 가운데 실시된 국민투표는 예상대로 찬성으로 끝나고 말았다. 민청학련 관계자들은 국민투표가 끝난 3일 후인 2월 15일 대부분 석방되었다.



1975년 신학기가 되면서 학생들은 석방학생들의 복교를 요구하며 시위에 나섰다. 학생들의 시위가 점점 격화되는 가운데 4월 7일, 8일 고대생들이 유신철폐, 독재정권퇴진 등을 요구하며 가두진출을 시도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에 박정희는 4월 8일 고려대 내에서의 집회와 시위를 금지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긴급조치 7호를 발동하여 고려대에 휴교령을 내리는 한편 군인을 진주시켰다. 국가의 안전보장이나 공공의 안녕질서가 중대한 위협을 받을 경우 선포하게 되어 있는 긴급조치가 일개 대학의 시위 때문에 발동된 것이다. 4월 9일에는 서도원, 도예종 등 인혁당 관계자 8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러나 학생들의 시위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4월 11일에는 서울대생 김상진이 유신헌법의 철폐를 요구하며 할복자살하였다. 이제 학생들의 시위는 긴급조치가 없이는 막지 못할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때마침 4월 30일 월남이 패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국민들 사이에 공산주의에 대한 경계심이 널리 확산되기 시작했다. 박정희에게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었다. 5월 13일 마지막 긴급조치로 역사에 기록될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되었다. 9호의 내용은 1호와 큰 차이 없었다. 다만 형량이 1년 이상의 징역으로 조정되고, 군사법정이 아닌 일반 법정에서 재판하도록 한 것뿐이었다. 긴급조치 9호는 긴급조치가 아니라 일상 조치가 되어 박정희가 사망할 때까지 존속하였다.



1975년 5월 22일 서울대생들이 김상진열사의 장례식을 거행하며 반유신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은 최초의 긴급조치9호 위반 사건이었다. 6월에는 범대학연합체를 구성하여 대규모 시위를 계획하다 사전에 발각되어 구속된 세칭 천주교정의구현전국학생총연맹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들 사건 이후 학생운동은 장시간 소강상태에 빠졌다. 무엇보다 민청학련사건과 75년 봄의 투쟁으로 학생운동의 중추 역량 대부분이 구속 또는 제적되어 학원으로부터 쫓겨났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1975년과 1976년 학생운동은 지하로 잠적하여 역량 비축에 힘을 쏟았다. 학생들은 소규모 지하 이념써클을 조직하여 사회과학을 학습하면서 앞으로의 투쟁에 대비하였다. 또한 민주화운동의 궁극적인 승리는 노동자, 농민 등 민중이 투쟁의 주체가 될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인식 하에 야학, 농촌활동 등 민중을 의식화하고 조직화하는 데도 힘을 기울였다. 그러면서 학생운동은 점차 예전의 역량을 회복하여갔다. 1976년 12월 8일 서울대에서 유신반대 시위가 터졌다. 이 시위는 졸업을 불과 2개월 앞둔 4학년생들이 주동하였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이것은 시위를 주동하는 학생들이 앞으로 자신의 일생을 민주화운동에 헌신하는 직업적 운동가로 살 것을 각오했다는 의미였다.



1977년 봄 서울대와 한신대에서 소규모 시위가 일어나면서 학생운동이 마침내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1977년 10월 7일 서울대에서 발생한 시위는 주동자도 없이 우발적으로 터진 것이었다. 이 날의 시위로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된 이후 최초로 서울대가 20일간의 휴업에 들어갔다. 10월 26일에는 연세대에서 시위가 발생하여 9호 이후 최초로 경찰의 제지를 뚫고 신촌로타리까지 가두시위를 벌였다. 11월 11일에는 서울대에서, 12, 14, 18일에는 서강대에서 연속하여 시위가 발생하였다.



1978년 들어 학생들의 시위는 더욱 확산되었다. 1978년 6월 12일 서울대에서 발생한 시위에서 학생들은 6월 26일 광화문에서 모여 유신반대시위를 벌일 것을 제창했다. 사전계획의 미비와 경찰의 철통같은 봉쇄로 시위는 산발적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학생들의 시위는 이제 교내를 떠나 가두시위를 계획할 정도로 발전하였다. 1978년 10월에는 실제로 유신선포일인 10월 17일을 기해 광화문에서 대대적인 가두시위를 계획하던 6개 대학의 연합 그룹이 사전에 체포되기도 하였다.



1979년에 들어서면서 이제 전국 각 대학에서 유신반대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회과학써클이 대학마다 뿌리를 내렸고, 투쟁 방법도 시위뿐만 아니라 유인물 살포, 낙서 등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박정희가 학내에 전투경찰을 상주시키고, 학생들을 마구잡이로 구속, 제적시켰지만 이제 학생들의 움직임을 막을 수는 없었다.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에서 시위가 터졌다. 1974년 이후 5년 동안 단 한 차례도 시위가 발생하지 않아 유신대학이란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던 터에 발생한 시위라 그런지 시위가 발생한 지 한 시간도 채 안되어 시위대는 무려 7,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학생들은 경찰의 제지를 뚫고 오후 2시경 남포동으로 집결하였다. 학생들은 경찰에 쫓기면 골목으로 숨거나 시민들 사이에 섞여 있다가 다시 곳곳에서 쏟아져 나오는 식으로 경찰과 끈질기게 공방전을 벌였다. 시민들은 학생들을 숨겨주거나 아니면 옥상에서 연탄재, 화분 등을 던지는 등 경찰의 진압을 방해하였다. 8시 무렵 퇴근하던 시민들이 가세하면서 5만여 명의 시위대가 남포동 일대를 가득 메웠다. 시위는 파출소를 습격하는 등 민중항쟁의 양식을 띠기 시작했다. 17일 교내에서 시위를 마친 동아대 학생들이 휴교조치가 떨어진 부산대학생들과 시내에서 합류하면서 시위가 다시 시작되었다. 시위대에는 이제 학생들보다 시민들이 더 많았다. 시위는 세무서, 동사무소 등 관공서를 습격하는 민중항쟁으로 발전했다. 18일 0시를 기해 부산지역에 계엄이 선포되고 군대가 투입되었다. 군인들의 가혹한 진압으로 부산의 시위가 가라앉은 18일 오전 인접도시 마산에서 경남대생들과 마산대생들이 주축이 되어 다시 시위가 발생했다. 19일 마산수출자유지역의 노동자와 고등학생들까지 시위에 가세하면서 마산의 시위도 민중항쟁으로 발전하였다. 20일 마산, 창원 지역에 위수령이 선포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부마항쟁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이제 누구의 눈에도 박정희의 몰락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10월 26일 궁정동에서 총소리가 몇 방 들렸고, 그것으로 박정희 18년 통치도 끝이 났다. 박정희의 가혹한 탄압에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전개한 학생들의 가열찬 투쟁이 결국 박정희독재를 끝장내고 만 것이다.

 

내용출처 : http://www.kdemocracy.or.k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