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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도깨비-1 2009. 9. 11. 13:36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① 명(明)나라하고 한 판 붙어? 아님 꼬리를 내려 ─…

 

돌고 돌고, 돌고 도는 역사 ─……

 

유명조선국, 대명천지 ... 과거 친일분자와, 지금의 숭미주의자들, 뭐가 다른가?

 

찬찬히 두 꼭지 글을 보세요! ① 고려말 정치 ② 비석에 새겨진 아픈 역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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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세를 이루던 친명의 물줄기가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 역사의 물꼬를 돌려버린 것이다. 친명파를 숙청한 이인임은 어린 우왕을 용상에 앉혀놓고 국정을 농단 했다. 출생에 의혹을 안고 있는 우왕이기에 오히려 요리하기가 용이했다. 정적 경복흥을 문하시중에서 끌어내려 터무니없는 누명을 씌워 처단하고 문하시중의 자리에 오르자 안하무인이었다.

 

문하시중은 조선시대로 말하면 영의정이다.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자리다. 하지만 이인임에게는 일인지하(一人之下)도 없었다. 용상에 앉아있는 왕도 자신이 부릴 수 있는 허수아비로 생각했다. 그러니 령(令)이 설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왕명도 예외일 수 없었다. 오로지 이인임의 령(令)만이 세상을 지배했다.

 

우왕은 공민왕의 아들이라고 왕위에 오르긴 하였지만 요승 신돈의 시녀 반야의 몸에서 태어나 모니노(牟尼奴)라는 이름으로 궁 밖에서 자랐다. 이인임이 우습게 볼만도 하다. 그걸 모르고 옹립한 것도 아니다.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던 신돈의 아들이던 그것은 이인임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의 권력 학장만이 눈에 보일뿐이다.

 

자신의 사리사욕과 자파의 세력 축성이면 국가의 명운이 어떻게 흘러가던 그것은 알바 아니었다. 지엄하신 임금님이 백성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조롱거리가 되는 것이 자신에게는 유리했다. 문하시중을 꿰차고 국정을 주무르기에는 흠집이 있는 우왕이 요리하기에 편하다고 생각하여 일부러 선택한 인물이 우왕이다.

 

 

신돈의 시녀 몸에서 태어난 아이, 누구의 아들?

 

공민왕이 죽자 명덕태후(明德太后)와 문하시중 경복흥은 왕씨 종친 중에서 새로운 임금을 옹립하기를 희망했다. 공민왕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아이가 있었지만 출생에 하자가 있어 왕위를 이어가기에는 문제의 소지를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인임은 자파의 세력을 등에 업고 우왕 옹립을 밀어 붙였다.

 

이인임의 세에 밀리자 명덕태후는 묘안을 생각해냈다. 요승 신돈의 시녀 반야의 몸에서 태어나 출생의 비밀이 아리송한 아이를 왕좌로 맞아들이려면 연극을 하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선택된 것이 궁인 한씨였고 반야의 아들이 한씨의 아들로 위장하여 궁으로 들여오면서 우(禑)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거쳐 왕위에 오른 사람이 우왕이다.

 

명덕태후로서는 자존심 상하고 체면이 말이 아니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아들을 낳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지만 왕실의 안위와 체면을 생각해서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우왕은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자식이다'는 소문이 도성에 파다하게 퍼져나갔다. 권문세족들에게 핍박받던 백성들의 민심이 흉흉했다.

 

이럴수록 이인임은 쾌재를 불렀다. 우왕이 궁지에 몰릴수록 문하시중 이인임에게 매달리기 때문이다. 약점 많은 어린 우왕을 손아귀에 넣고 쥐락펴락했다. 말 그대로 안하무인이었다. 닥치는 대로 정적을 베고 눈에 보이는 대로 재물을 빼앗았다. 임금에게도 오만방자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문하시중에 시달린 우왕은 점점 국정을 멀리하고 황음에 빠졌다.

 

견제 받지 않은 권력을 휘두르던 이인임은 외교문제도 야기했다. 고려에 와있던 명나라 사신이 공민왕 살해사건을 자신에게 불리하게 본국에 보고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인임은 호송관 김의로 하여금 명나라 사신이 돌아가는 중간에 살해하여 자신의 과오를 은폐하고 원나라에게 잘 보이려는 흉계를 꾸미기도 했다.

 

 

우리의 땅을 내놓으라니, 한판 붙어? 아니면 순순히 내줘?

 

친명정책을 견지하던 정몽주, 정도전 등을 제거한 이인임은 지윤, 임견미, 염흥방 등 자신의 충복을 요직에 앉혀 매관매직을 일삼았다. 전국에 걸쳐 토지를 수탈하고 수많은 노비를 손아귀에 넣었다. 뇌물만 던져주면 중죄인도 옥에서 풀어주며 국법질서를 어지럽혔다.

 

권신세력을 바라보는 백성들의 원성이 비등점을 향하여 치솟고 있었다. 최영장군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간파한 이인임은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물러났다. 이인임에 이어 문하시중에 오른 최영은 만신창이가 된 조정을 수습하고 흐트러진 민심을 추스르기에 여념이 없었다.

 

난신들의 발호에 국정은 난맥상을 드러내고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져 가는데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명 태조 주원장이 철령 이북의 땅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원나라에 속했던 땅이므로 대륙의 주인이 바뀌었으니 이제는 명나라에 귀속시켜 철령위(鐵嶺衛)를 세울 것이라는 계획이 명나라를 다녀온 설장수에 의해 알려진 것이다.

 

고려조정이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었다. 묵과할 수 없다는 강경세력과 화의하자는 세력으로 갈렸다. 이색의 의견을 쫒아 우선 명나라에 밀직제학 박의중을 사신으로 파견했다. 철령 이북의 영흥과 함흥, 그리고 공험진까지 고려의 영토임을 밝히고 철령위 설치를 중지해줄 것을 요구했다. 한편 조정에서는 군대를 모아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철령(鐵嶺)이란 백두대간을 따라 남으로 내려오던 국토의 등허리가 서쪽으로 풍류산과 동남쪽으로 장수봉을 만나 영마루를 이룬 곳이 철령이다. 함경도 안변 신고산면과 강원도 하북을 가르는 경계선이며 관북지방과 관동지방을 구획 짓는 꼭지점이다. “신고산이 우르르르 함흥 차 떠나는 소리에...”로 시작하는 신고산타령의 본고장이다.

 

명나라는 고려의 요구를 일축했다. 오히려 요동 관리 왕득명을 보내 철령위를 설치하겠다고 통보해온 것이다. 때맞춰 서북면도안무사 최원지의 급보가 개경에 날아들었다. 요동의 도사(都司)가 강계에 철령위를 설치하고, 요동에서 철령까지 70개의 역참을 설치하려 한다는 사실을 보고한 것이다.

 

대륙의 패권자 원나라를 몽고라는 구석으로 밀어붙인 명나라가 고려가 실제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철령 이북의 땅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원나라가 지배했던 땅이니 이제는 명나라가 지배해야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요구였다. 실제적 지배를 무시한 명나라의 논리대로라면 발해와 고구려의 고토를 돌려줄 수 있단 말인가

 

 

과거의 역사는 오늘의 거울이다

 

동북공정이 벌어지고 있는 현재에도 되짚어볼 문제다. 여기서 잠깐 영토문제와 외교 문제가 불거져 나왔으니 이인임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겠다. 이른바 종계변무(宗系辨誣)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을 기록한 명나라의 역사서 태조실록(太祖實錄)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자신들의 실수로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로 기록되는 오류가 발생했다.

 

이것을 발견한 조선 조정에서는 명나라에 사신을 보낼 때마다 정중하게 정정을 요구했으나 명나라는 들어주지 않았다. 우리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머리를 조아린다는 것이 기막힌 노릇이다. 자신들의 실수로 야기된 명백한 오류임에도 정정은커녕 그것을 조공국을 길들이는데 역이용했다.

 

조선 초기와 중기를 거치면서 명나라에게는 조선을 압박하는 무기로 사용되었으며 조선에게는 굴욕의 멍애로 작용했다. 조선과 명나라 사이의 외교 현안으로 끈질기게 작용했던 종계변무는 명나라 왕조가 기울어 청나라에 패망하기 48년 전, 즉 1588년 선조 대에 와서야 비로소 정정되었다.

 

실로 200년 이상을 우려먹고 자신들의 실수를 사과는커녕 무슨 시혜나 베푸는 것처럼 정정해주었다. 강대국과 동등한 관계가 아니라 사대하는 약소국의 설움이다. 중국이 지금 현재 추진하고 있는 동북공정을 마무리하여 고구려사를 중국변방사로 편입해놓고 통일 후 한국에 대하여 어떠한 흉계를 꾸밀지 걱정이다.

 

종계변무가 마침표를 찍는데 200년이 걸렸듯이 중국사에 편입된 고구려사를 우리의 역사로 되찾아 오는데 몇 백 년이 걸릴지 아무도 모른다. 광개토대왕을 자신들의 변방을 다스렸던 왕으로 폄훼하는 중국의 시각이 우리에겐 어처구니없지만 중국은 중국의 시각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책동을 사전에 저지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다.

 

[오마이뉴스 이정근 기자]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

'빛나는 조선국'이 아니었네?

 

서울역사박물관의 앞뜰에는 무덤 앞에서 가져온 석물들이 있다. 비석을 비롯해 망주석·장명등·문인석 등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다.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고 서있는 이 석물들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사진 촬영장소가 되기도 한다. 가끔은 유심히 살펴보는 사람도 있어서 나름대로 박물관 구성요소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모처럼 이 비석들을 살펴보다가 조선 선비들의 사대주의 사상의 일면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다름 아니라 조선 후기에 세워진 두 개의 비석에서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이란 글귀를 다시 보았기 때문이다.

 

 

'빛나는 조선국'이 아니었네?

 

'유명조선국'. 오래 전부터 많이 보아왔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왜 '조선' 또는 '조선국'이라 하지 않고 '유명(有明)'이란 수식어를 붙였을까? 처음에는 그저 '밝은' '빛나는' 정도의 평범한 수식어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 뜻을 알고부터는 늘 마음이 편치 않았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이 말은 '명나라의' '명나라에 속한'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유명조선국'은 '명나라에 속한 조선'이라는 의미이다. 스스로 명의 속국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 안타까운 조선의 처지여. 그렇다고 조선시대를 한심하게만 볼 수는 없다. 당시 명나라는 현실적으로 세계의 최강대국이었다. 그 막강한 힘으로도 그렇고, 세계의 중심이 중국이라는 당시의 지리관으로도 그랬다. 유럽의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기 전, 명나라는 이미 수십 척의 배로 대함대를 편성해 아프리카까지 원정을 했을 정도이다.

 

예나 지금이나 강대국은 힘이 곧 정의요, 그들의 입장이 곧 질서이다. 따라서 맹목적인 저항은 화만 부를 뿐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최강대국 명에 인접해 있는 조선으로서는 이에 맞선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작은 나라로서 어쩌랴, 이것이 현실인 것을.

 

문제는 이런 상황에 얼마나 주체적으로 대응했느냐 하는 것이다. 조선 전기에는 이런 상황에 비교적 잘 대처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은 명과 자의반 타의반으로 조공관계를 맺은 것이다. 이는 조선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외교정책이었다. 약소국 조선이 사대(事大)를 하는 형식으로 강대국 명나라의 명분을 살려준 것이다.

 
▲ 근처 은신군신도비의 뒷면 첫머리에도 '유명조선국'이라 쓰고 있다.
ⓒ2006 백유선

다소 비굴하다고 볼 수도 있으나 사실 그렇지만은 않다. 국왕의 책봉을 받아야 했으나 정치적 간섭은 받지 않았다. 또 조공을 바치면서도 답례품을 받아오니 선진문물을 수입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교과서에서는 이를 조공무역이라고 하며 실리외교라고 평가하고 있다.

강대국 명은 기본적으로 주변국가와 일대일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니 현실을 인정하며 실리를 취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이는 성리학의 '이소사대(以小事大,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섬긴다)'의 이론에 의해 뒷받침되어 조선 지배층의 일종의 철학이자 사상으로 자리잡게 된다.

전근대 중국 주변의 외교 관계는 이런 식으로 이루어졌으며, 조선 역시 그 현실을 받아들인 것으로 생각하면 틀림이 없다. 그러다 보니 비석에 조차 우리나라의 국명을 표기할 때 '유명조선', 또는 '유명조선국'이라 표기하게 된 것이다.

물론 아쉬움은 있다. 구태여 무덤 앞에 세우는 비석에까지 이런 식으로 표기해야 했느냐 하는 것이다. 중국과 외교를 할 때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 내부에서 조차 이렇게 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사대에서 사대주의로

 

문제는 명나라가 망한 후에도 이런 전통이 계속 이어졌다는 것이다. 명나라 말 만주족이 후금(청)을 세웠을 때, 광해군은 명과 후금 두 강대국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통해 약소국인 조선이 살 수 있는 방도를 찾았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와준 명에 대한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는 서인세력의 반격을 받게 되었다. 쿠데타에 의해 쫓겨난 광해군의 주된 죄목은 바로 명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고 오랑캐의 나라와 소통을 했다는 것이었다.

 

 

즉, 인조와 서인세력은 후금(청)을 오랑캐의 나라로 보아 배척하고, 오로지 기울어가는 명에 대한 사대만을 내세우게 된다. 그 결과 조선은 청의 침략을 받고 치욕적인 항복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 은신군묘표의 뒷면 마지막에는 '숭정기원후 5신미'라고 연도를 표시하고 있다.
ⓒ2006 백유선

그럼에도 조선의 지배층과 선비들의 태도는 변화가 없었다. 이들은 여전히 청을 오랑캐의 나라로 여겼으며, 이미 망해버린 명에 대한 사대의 생각만은 버리지 않았다. 이쯤 되면 '사대'라기보다는 '사대주의'라고 할 정도로 맹목적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부에서는 청의 선진문물의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세는 명에 대한 의리의 강조였다. 나아가, 명이 망했으니 이제는 조선이 정신적으로는 세계의 중심이라는 소중화 의식이 싹트기까지 했다.

그 의지의 올곧음은 대단하지만, 실제로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사대주의 사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도대체 현실을 이렇게까지 무시하는 생각이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까지 하다. 그러니 조선 후기의 비석에도 여전히 '유명조선국'이라는 글씨가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연호를 표기할 때에도 공식적인 기록에는 반드시 청의 연호를 사용하였지만, 청의 시야 밖에 있는 비석 등에는 여전히 명의 연호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로 시작되는 연도 표시 방법이다. 이미 망해 버린 명의 연호를 변칙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서울역사박물관 앞에서 본 비석들도 마찬가지였다. '숭정기원후 5신미(崇禎紀元後 五辛未)' '숭정기원후 3갑신'이라고 되어있었다.

'숭정'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1628~1644)의 연호이다. 따라서 '숭정기원'은 1628년이다. '5신미'는 '숭정 기원후 5번째 돌아온 신미년'이라는 뜻이니 1871년을 말한다. 명이 망한지 무려 200여 년이 훨씬 더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쓰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맹목적인 사대주의가 놀라울 뿐이다. 하지만 더 유감스러운 것은 근처에 식민지시기에 세워진 조선 왕족의 비석을 보니 '소화(昭和)'라는 일본 연호가 쓰여 있었다는 것이다. 그 오랜 생각이 어찌 그렇게 쉽게 바뀌었는지 모르겠지만.

 

또다른 흔적, '대명천지(大明天地)'

▲ 화양구곡의 화양서원과 만동묘터. 현재는 복원되어 있다.
ⓒ2006 백유선

 

사실 이와 같은 조선 후기의 지나친 사대주의 흔적을 발견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그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를 들어 보자. 다름 아닌 바로 '대명천지'라는 말이다. 충북 괴산의 화양구곡에는 만동묘라는 곳이 있다. 만동묘는 임진왜란에 도움을 준 명나라 황제 신종과 의종을 제사 지내는 곳이다. 이미 망한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조선에서 지내고 있었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이 근처에는 송시열이 새긴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이라는 글귀가 있다.

 

'대명천지'란 말은 지금도 많이 사용하는 말이다.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고 있는 이 말은 사전적인 의미로는 '밝고 환한 세상'을 뜻한다. 하지만 본래의 의미는 '큰 명나라의 세상' 즉, '명나라가 중심이 된 세상'이라는 뜻이다. 당시의 사대부들이 그토록 꿈꾸던 중화 명나라의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숭정일월'도 비슷한 뜻으로 해석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의 연호가 '숭정'이다. 그러니 결국은 두 말이 모두 같은 뜻이다. 대명 황제가 다스리는 밝고 환한 세상을 꿈꾸며 쓴 말인 것이다. 이쯤 되면 그들의 사대주의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상주의 경천대에도 이 글귀가 쓰여 있다. 이외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의 글들은 다른 곳에서도 종종 볼 수 있으니, '대명강산(大明江山)', '대명산수(大明山水)' 등 조선후기의 선비들이 자주 사용하던 용어이다.



 

 
▲ 상주 경천대에 채득기가 쓴 '대명천지 숭정일월'
ⓒ2006 백유선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와준 명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지 말자는 명분론은 명이 멸망하고 청이 중국을 차지한 뒤에도 변함이 없었

다. 송시열의 북벌론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며, 조선 말기 서양문화를 배척하자는 위정척사론 역시 이 연장선상에서 해석되

고 있다. 명분에 집착해 현실을 보지 못한 어리석은 생각이었고 결국 조선은 멸망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명에 대한 의리와 명분을 지키려는 이런 모습들을 지조와 절개로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나친 사대주의에서 비롯된, 오직 명에 대한 지조와 절개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조선후기의 대부분의 비석에서 보이는 '유명조선국'등의 글

귀나, '숭정기원후'로 시작되는 연호 표시는 바로, 이들의 머릿속에 너무나 깊게 뿌리박힌 한심한 사대주의의 흔적인 것이다. 명은 이미 망했는데 여전히 '명에 속한 조선'이라니.

 

약소국으로서 국가의 보전을 위해 강대국과 일정한 관계를 수립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면서도 가급

적이면 주체성을 상실하지 않고 그들에게는 명분을, 자국에는 실리를 가져오는 것이 외교의 바른 길일 것이다.

 

지나치게 강대국에 의존하고 정신마저 빼앗길 정도로 사대주의에 빠지는 것이 문제이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사대주의 사상은 지금도 뿌리 깊게 내려오고 있다. '대명' 대신에 새로운 우상인 미국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얼마 전 전시 군사작전지휘권을 둘러싼 문제에서도 일부에서는 이런 모습을 보여주었다. '유명조선국' '대명천지'의 망령을 다시 보는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제는 그 실체는 인정하되, 맹목적인 '숭미(崇美)'의 망령을 떨쳐버릴 때라는 것을, 비석에 쓰인 '유명조선국'은 말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백유선 기자는 우리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많은 중학교 국사 교사입니다.

 


출처 : 國家와 民族을 ♡하는 老宿者 입니다.
글쓴이 : 老宿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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