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택시기사의 '장밋빛 인생'
[김윤덕 기자의 '줌마병법']
2009년 7월 8일 조선일보
시간이 돈, 1분1초가 아쉬운 직장맘 영미씨. 마케팅 회의 끝나니 밤 9시라 총알같이 택시를 잡아타는데 지갑 속에 동전만 굴러다니렷다. 용기를 낸다.
"저~ 카드도 되나요?"
뜻밖의 답변.
"그럼요. 지붕에 카드택시라 써 붙였는걸요."
호기심 많은 영미씨, 넉살 좋은 기사님의 대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어디까지 모실까요?"
"○○동요…."
"좋은 동네 사시네요."
"인심 하나는 '짱'이죠. 얼른 뉴타운 돼야 하는데…."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죠."
"근데 앞차는 왜 저렇게 헤맨대요? 길을 모르면 차를 끌고 나오질 말든가. 혹시 아줌마?"
"초행길인가 보네요. 요즘은 운전 잘하는 여자분도 많아요."
"옴마! 저 은색 승용차 좀 봐. 깜빡이도 안 켜고 사정없이 끼어드네."
"급한 일 생겼나 봅니다."
"경찰은 뭐 하나 몰라. 차도에 불법주차한 인간들 안 잡아가고."
"일부러야 그러겠어요? 주차할 데가 없나 보죠."
"근데 기사님, 되게 특이하시다~. 신호 위반도 하고 끼어들기도 하셔야 택시 타는 맛이 나죠. 그래서 어디 돈 버시겠어요?"
"재미난 얘기 해 드릴까요? 언젠가 금요일 밤 종로서 손님을 태웠는데 서울서도 가장 골짜기인 △△동에 가자고 해요. 거기 한번 들어갔다 빈 차로 나올 동안 강남은 두세 번 오갈 수 있는데 말이죠. 여하튼 차 한 대 겨우 빠져나올 골목에 내려주고 궁싯거리며 후진해 나오는데 뒤에서 '택시!' 하는 소리가 들려요. 한 남자 성급히 올라타더니 '대구까지 갑시다' 하는 겁니다. 고향에 급한 일 생겼다며. 횡재는 그렇게 오더라고요."
"그 후로 인생관이 달라지셨다는?"
"친구 중에 한때 건설회사 상무였던 녀석이 있지요. 강남 40평대 아파트에서 살고, 교육에 열성인 아내 덕에 1등을 놓쳐본 적 없는 아들까지 남 부러울 것 없는 친구였죠.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걷잡을 수 없이 시력이 떨어지는 희귀병 진단을 받아요. 설상가상으로 건설업계가 고꾸라지는 바람에 그 친구 직장을 잃고요. 아들 수술비, 병원비에 아파트마저 날아가니 이 못난 친구, 죽고만 싶더래요. 죽으면 보험금으로 아내와 아들은 살 수 있지 않겠나 싶어. 그래 병원 가서 붕대로 눈을 친친 감은 아들을 어루만지는데, 아들놈이 그러더래요. '아빠 손 참 크다. 따뜻해…. 아빠, 아빠가 내 손잡아준 게 얼마 만인지 아세요?'"
"……."
"이튿날부터 남자는 택시를 몰았죠. 다행히 아이 눈은 더 나빠지지 않아서 돋보기보다 더 두꺼운 안경을 쓰면 그 좋아하는 책은 읽을 수 있다네요. 성적은 한참 떨어졌지만 그 친구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답니다."
"그거 기사님 얘기죠?"
"하하! 눈치 한번 빠르시네."
"직장맘 10년이면 눈치가 100단이에요. 근데 질문 있어요."
"뭔데요, 손님?"
"그래도 솔직히 카드로 택시비 내면 싫으시죠?"
"카드 택시 탔는데 카드 결제 안 되면 돈 안 내셔도 됩니다. 평안한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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