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합의는 북핵을 매개로 한 한반도와 동북아의 미래에 관한 합의다. 한반도의 정전(停戰)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고 북한과 미국, 북한과 일본이 관계를 정상화함으로써 남북한과 미-일-중-러 4강의 교차 승인을 통해 안정과 평화를 유지하자는 구상이다. 이 모든 것이 북의 핵 폐기 여부에 달려 있다지만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앞으로 미국은 북이 핵 시설을 동결 또는 폐쇄만 해도 60일 내에 북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빼는 문제를 논의해야 한다. 20년 가까이 북-미 관계 개선을 가로막아 온 이 문제가 해소되면 양국 관계는 곧 정상화된다. 북-일 수교도 시간문제다. 한반도의 탈(脫)냉전 프로세스가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경험이다. 머릿속에선 수없이 그려 봤지만 현실에선 한번도 부딪혀 본 적이 없는 환경이다.
차기 대통령은 적어도 두 가지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한다. 우선 탈냉전 프로세스를 늦추더라도 북핵의 완전 폐기에 매달릴 것인지, 아니면 더는 악화되지 않도록 묶어 놓는 데 만족하고 그 대신 냉전체제의 실질적 해체에 치중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이미 시작된 脫냉전 프로세스
둘 다 동시에 이뤄질 수 있다면 좋겠지만 쉽지 않아 보인다. 북이 순순히 핵을 포기할 리도 없거니와, 미국의 핵 폐기 의지도 갈수록 흔들리는 듯해서다. 이번 합의만 해도 북의 과거와 현재의 핵은 빠져 있다. 이대로 가면 핵을 가진 북과 미국의 수교를 현실로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른다. 미국으로선 북이 추가 핵 개발을 안 하고, 핵 물질을 외부로 확산하지 않겠다는 보장만 있다면 북과의 수교를 통해 북핵을 관리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만 언제까지 ‘선(先) 북핵 폐기’를 고집할 수 있을까. 최악의 경우 돈은 돈대로 쓰면서 북핵도 제거하지 못하고, 탈냉전 과정에선 소외되는 삼중(三重)의 어려움에 빠질 수도 있다.
평화체제 문제도 이제는 정리를 해야 한다. 평화체제라고 해서 평화가 자동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1953년에 체결된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바뀔 뿐이다. 평화협정 아래서도 평화를 보장해 주는 것은 한미동맹이지만 한미동맹은 평화체제와 상충된다. 평화체제가 되면 주한미군은 물론 유엔군사령부도 이 땅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어진다.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그렇다. 북이 그동안 무력 불사용, 평화보장체계 등으로 표현을 바꿔 가면서 줄기차게 평화체제 협상을 제의해 온 것은 이 때문이다.
여기에 북-미 관계 정상화까지 이뤄지면 한미동맹의 기반은 더 위축될 수밖에 없다. 동맹이 당장 해체되지는 않겠지만 주한미군 감축과 역할 변화는 물론 북에 의한 서해 북방한계선(NLL) 재설정 요구 같은 것이 즉각 제기될 수 있다. 워싱턴-서울-평양 축 대신에 워싱턴-평양 축이 생기면 노무현 대통령의 표현대로 ‘미국 엉덩이 뒤에 숨어서’라도 “한국을 버리지 말라”고 간청하게 될지도 모른다.
노 대통령은 이번 합의에 대해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구조를 정착시키기 위한 협상을 해 나간다는 조항이 들어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 대통령은 평화체제 논의를 위한 별도의 협상에 큰 기대를 걸고 있는 듯하다. 6자회담이 결국 이를 보장하는 다자적 틀이 되지 않겠느냐는 희망도 깔려 있다. 하지만 6자의 틀보다 평화체제와 충돌하지 않을 ‘새로운 한미동맹’을 모색하는 것이 더 확실한 평화보장책일 수도 있다. 6자 체제와 신(新)한미동맹을 묶어야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이 역시 차기 대통령이 결정할 문제다.
워싱턴-평양 축에 대비해야
이번 대선의 핵심 이슈는 경제라고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경제는 나빠졌다가도 좋아질 수 있다. 하지만 외교안보는 한번 실패하면 그걸로 끝이다. 현상을 관리하면서도 변화에 기민하게 적응해 나갈 창의성과 실천력을 가진 지도자가 절실히 필요하다. 경제나, 알맹이도 없는 보혁(保革) 논쟁에 묻혀 외교안보 리더십이 선거의 뒷전으로 밀린다면 불행한 일이다. 한국판 비스마르크가 필요한데 아직 보이지도 않고 누구도 찾으려 하지 않는다.
이재호 논설실장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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